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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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5화
195화 몰락 (2)
"11시 방향에 T-34다! 거리 400, 빨리!"
조종수 울리히 헤르츠 병장은 잽싸게 조종간을 움직여 3호 돌격포를 회전시켰다.
그가 차량을 멈추자, 포수가 주포를 격발시켰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던 T-34는 차체에 구멍이 뚫리며 정지했다.
"명중!"
"다시 정면으로! 이반들이 개새끼들처럼 몰려오고 있다!"
젠장맞을. 헤르츠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전장의 가혹한 환경에 푸념하며 돌격포를 재차 회전시켰다.
소련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된 직후, 남들이 모두 서부전선으로 향할 때 헤르츠는 동부 국경에 배치되었다.
그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모두 전장에서 싸울 때 자신은 안전한 후방에서 지내게 되었으니까. 지난 2년 동안 러시아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한 보답이 마침내 이루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황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전방으로 차출되어 떠나는 부대가 많아졌지만 헤르츠의 부대는 같은 자리에 계속 남았다. 헤르츠는 암울한 전황에 한숨을 쉬면서도 내심 이곳에 되도록이면 오래 있고 싶었다. 그 지옥 같은 전장에서 구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못해도 2년은 가리라고 생각했던 2차 독소불가침조약은 겨우 몇 개월 만에 종잇조각으로 변했다.
소련은 다시 전쟁을 걸어왔고, 헤르츠는 다시 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망할 러시아 새끼들. 그냥 좀 조용히 지내면 안 되는 거야? 우리가 사죄의 의미로 폴란드까지 내줬잖아? 폴란드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거야?
"장전 끝!"
"발사!"
이번에도 75mm 주포가 불을 뿜었다. 하지만 포탄은 적의 장갑에 튕겨 나왔다.
"도탄당했다! 재장전!"
상대는 T-34보다 장갑이 두꺼운 T-43으로, 3호 돌격포의 75mm 48구경장 주포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었다.
"후진해! 놈이 우릴 조준하고 있다!"
T-43의 포탑이 돌아가는 모습을 본 전차장이 다급히 외쳤다. 헤르츠는 서둘러 돌격포를 후진시켰다.
하지만 적이 더 빨랐다. 조준을 끝낸 T-43의 85mm 주포에서 섬광이 터져 나오는 순간, 헤르츠는 온몸이 거대한 충격파에 휩쓸리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참을 수 없는 뜨거움이 온몸을 뒤덮었다.
***
"소련군이 공격해오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베크의 자살로 대통령직까지 겸하게 된 괴르델러는 소련군이 독일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했다.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파기했습니다! 우리가 보내는 모든 대화 요청도 거부당했습니다!"
괴르델러는 눈앞이 아찔했다. 소련과의 강화를 제일 처음 주장했던 그도 소련을 믿지 않았다. 소련이 다른 마음을 품을 경우에 대비하여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방어선을 축조했지만, 소련의 배신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놈들이 아주 제대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이미 메멜이 포위되었고, 쾨니히스베르크도 공습을 받았습니다."
"빌어먹을 러시아 놈들. 기어코......."
누가 봐도 독일이 곧 망할 것 같고, 노르웨이나 이탈리아, 체코는 먹지 못할 것 같으니, 대신 독일 동부 영토라도 최대한 뜯어내겠다는 속셈이었다.
방어선에 배치된 사단들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지만, 수백만 대군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정예병들 대다수가 늑대 작전과 만슈타인의 투항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소련군의 진격은 더더욱 빨랐다.
소련까지 다시 적으로 돌아선 이상, 독일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항복하여, 미국과 영국에게 소련군의 진격을 멈춰 달라고 호소하는 것. 현실적으로 이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당장 처칠과 루스벨트에게 연락하게. 지금 항복하겠다고. 아무 조건 없이 말일세."
마지막으로 내걸었던 1937년의 국경 유지 조건도 포기하고, 당장 항복하겠다는 소리였다. 카나리스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알겠습니다, 각하. 지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네. 독일이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어."
괴르델러의 말은 사람들에게 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카나리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무거웠다.
***
"스탈린, 그 늙은 공산주의자 놈이 또 일을 저질렀군!"
소련군이 독일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은 런던의 처칠에게도 전해졌다.
침대에 누워 꿈나라를 거닐고 있던 처칠은 밤중에 자신을 깨운 비서에게 벌컥 화를 냈지만, 소식을 전해 듣곤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한가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바로 전쟁성으로 가지! 서두르게!"
전쟁성은 집에서 불려 왔거나 밀린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다 발목이 잡힌 내각 관료들과 장성들로 가득했다. 그들 모두 갑작스러운 소련의 독일 침공 소식에 짜증을 내면서도 동시에 혼란스러워했다.
"소련군은 어디까지 진격했나? 독일의 반응은?"
"소련군은 메멜을 포위하였으며, 단치히와 쾨니히스베르크, 포즈난 등 동부 독일 도시들이 공습을 당했습니다. 독일군 병력 대부분이 서부 라인 방어선과 헝가리에 집중되어 있어서 소련군의 진격은 매우 빠른 편입니다.
독일 또한 소련의 재침공을 사전에 알아채지 못했는지 크게 당황한 눈치입니다. 독일이 모든 외교적 수단으로 연락을 시도하고 있지만, 소련 측에선 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일은 소련군이 연합군보다 먼저 베를린을 점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연합군이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선 라인강을 건너 독일 한복판을 가로질러야 하지만, 소련군은 오데르강만 건너면 곧바로 베를린이었다. 독일군이 필사적으로 소련군과 싸우는 중이었지만, 워낙 병력과 화력의 차이가 크다 보니 전선이 실시간으로 뒤로 밀리고 있었다.
"소련이 베를린을 먼저 차지하게 냅둬선 안 되네! 그랬다간 놈들은 체코슬로바키아도 노릴 테고 나아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까지 차지하려 들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베를린에 먼저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처칠이 열변을 토하는 것과 별개로 그것이 매우 힘든 일임은 자명했다. 연합군은 아직 라인강조차 넘지 못했다. 독일군이 남은 병력을 대거 끌어모아 라인강 일대에 배치한 탓에, 라인강을 건너려면 상당한 희생과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그나마 남은 희망은 독일이 소련을 막기 위해 라인강과 덴마크, 이탈리아에 배치한 병력들을 동부전선으로 재배치하는 것이었는데, 바꿔 말하자면 그전까지는 연합군도 움직일 수 없다는 소리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참석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식이 흘러나왔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락은 아직인가?"
"곧 소식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각하! 각하!"
처칠의 비서가 회의실에 들어와 방금 런던에 전해진 속보를 전달했다.
"독일 정부로부터 연락입니다! 독일 총리 겸 대통령 대행인 카를 괴르델러가 방금 무조건 항복을 타전해왔습니다!"
독일의 항복. 그 소식이 전해지자 몇 초 전까지 소련 문제로 시끌시끌하던 회의실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그리고, 환성이 터졌다.
"드디어, 드디어로군! 드디어 놈들이 항복했어!"
"축하드립니다, 총리 각하!"
독일의 항복 소식에, 무거웠던 분위기는 단번에 반전되어 축제 현장을 연상케 했다. 자그마치 5년 가까이 끌어온 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린 것이다.
"자, 자.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시게. 아직 듣지 못한 소식들이 더 남아있으니."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처칠이 손짓하자, 얼싸안고 환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이전보다 부드러워진 말투로 처칠이 물었다.
"그래, 다음 소식은 뭔가? 말해보게."
"예. 1944년 1월 4일 부로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며 모든 병력의 무장해제 조치에 찬성한다고 합니다.
다만, 동부전선의 소련군을 상대로는 무조건 항복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연합군이 소련을 중재하여 독일군에 대한 공격을 멈춘 후에만 진행하겠다고 합니다."
영국과 미국에게는 항복하겠지만, 소련한테는 항복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동시에 소련을 말려서 독일에 대한 공격을 멈춰달라는 호소이기도 했다.
"좋네. 어차피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우리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니까."
"각하,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화입니다."
"지금 가겠네."
루스벨트도 방금 소련의 독일 침공 소식과 독일 정부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두 거물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대통령 각하. 지금 당장 스탈린에게 연락해서 소련군의 진격을 멈추라고 압박해야 합니다. 저들이 베를린까지 진격하기 전에 말입니다."
"그야 물론입니다. 하지만 독일군도 즉시 무기를 내려놔야 합니다. 미군과 영국군뿐만 아니라 소련군을 향해서도요."
루스벨트는 독일이 소련군과의 전투를 이유로 대면서 무장해제 조치를 피하려고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칠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안될 일입니다. 그랬다간 소련군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독일 내부로 진격할 것이고, 베를린을 넘어 독일 전역까지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소련군이 계속 전투행위를 지속한다면 독일군도 이에 맞서 항전하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총리, 독일군의 무기가 다시 우리 병사들에게 향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내 장담하지요. 이제부터 독일의 목숨줄은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저들은 틀림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복종할 겁니다. 공산당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우리한테 빌붙는 수밖에 없거든요."
루스벨트는 처칠의 설득에도 여전히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 눈치였지만, 끝내 그의 말에 동의했다. 소련에 유화적인 입장이었던 그조차 최근 소련이 보인 여러 행보로 인식이 달라졌거니와, 처칠의 말대로 소련이 독일 전역을 장악했다간 당장 그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리고도, 독일을 연합국이 아닌 소련이 낼름 먹었다간 국민들과 야당이 뭐라고 반응하겠는가? 최악의 경우 루스벨트가 스탈린과 짜고 독일을 일부러 소련이 차지하게 내버려 뒀다는 소리까지 들을 수도 있었다. 이미 야당의 그런 류의 공세에 시달렸던 루스벨트로선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전쟁이 끝났다니. 느낌이 묘하군."
기어코 독일의 항복을 보게 되다니. 루스벨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탁자 위에 둔 지구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독일이 무너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일본이었다.
진주만의 복수를 할 순간이 다가왔다.
***
"대위님, 그레이 대위님!"
간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끝내고 나오려는데, 게이츠 원사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데요, 원사?"
"대대장님 호출입니다.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다고 대대 전원은 정렬하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는 어떤 할 말이 있어서 대대원들을 불러 모은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대대원들이 모두 모이지도 않았는데, 브랜슨 대령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오른발을 탁탁거렸다.
"대대, 전원 집합했습니다!"
"모두 차렷!"
대대원들이 모이자, 브랜슨 대령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제군들, 방금 전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는 이 한마디만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항복. 그 말 한마디가 가지는 효과는 엄청났다.
대대원 모두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순간이었다.
"이로써 여기서의 전쟁은 끝났다. 독일군은 현 시간부로 무장해제에 들어갈 예정이며 동시에 우리도 그들에게 섣불리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이 전해졌다. 추후 새로운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모두 현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한다, 이상."
브랜슨 대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군모를 벗어 던졌고, 서로 얼싸안으며 종전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전쟁이 끝났다!"
"만세!"
"우아아아아아!!!"
나는 소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반강제로 허공으로 솟구쳐졌다. 나뿐만 아니라 게이츠 원사와 무어 소령, 브랜슨 대령도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헹가래를 당하고 있었다.
"소대장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이날이 왔다!"
비단 우리 대대만이 아니라 사단 전체에서 비슷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곳곳에서 만세를 외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에 맞춰 하늘에선 스핏파이어 편대가 땅이 진동할 정도로 낮게 날며 양쪽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길고 길었던 유럽에서의 전쟁은 1944년 1월 4일부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