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6화
176화 충격과 공포 (5)
현장은 이미 지옥이었다.
불타는 전차들의 잔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웠다.
겨우 연기를 뚫고 나아가자, 이번에는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리스군 병사들이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우릴 독일군으로 착각했는지,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흩어졌다. 뒤늦게 우리가 영국군임을 확인한 장교들이 소리쳤지만, 한번 이성을 잃은 병사들의 귀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리스군한테서 정보를 얻고자 그들에게 말을 걸었지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그리스어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결국, 그리스군과의 만남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허무하게 끝났다. 그리스군은 도망치기 바빴고, 우리는 그들을 붙잡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
"소대장님, 저놈들 그냥 놔둡니까?"
보리스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어쩌게?"
"병사 한 명이 아쉬운 판인데 저대로 냅둬도 되는 건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어쩌겠냐?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데. 게다가 저놈들, 상태 보면 알겠지만 이미 멘탈 나갔어. 억지로 붙잡아서 끌고 가봤자 우리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이지."
"허, 누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러 가는데 누구는 도망치기 바쁘다니. 나 참."
보리스처럼 나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었다. 억지로 싸우라고 붙잡는다 해도, 한 번 모랄빵이 난 부대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존재라는 게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증명되지 않았던가. 차라리 우리끼리 싸우는 편이 낫지.
"주의. 전방에 엔진음."
엔진 소리가 들리자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다시 팽팽해지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소대에 정지 명령을 내린 뒤, 소리가 들리는 방향 쪽으로 포탑을 돌렸다.
이윽고 모퉁이 너머에서 전차 한 대가 튀어나왔다.
"쏘지 마요! 크롬웰이야!"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전차는 크롬웰이었다. 그런데 포탑 측면에 하얀 별 대신 하얀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군이 노획한 크롬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못 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다.
정신없이 후진하던 크롬웰은 뒤에 있는 도랑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빠지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조종수가 전차를 움직여 도랑에서 빠져나왔지만, 곧바로 포탄이 날아와 포탑을 허공으로 사출시켰다.
"판터다!"
크롬웰의 모가지를 날려버린 전차는 독일제 판터였다.
"쏴요, 원사!"
놈이 포탑 측면을 내보이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게이츠 원사가 주포를 격발시키자, 철갑탄이 일직선으로 날아가 판터의 포탑 측면에 내리꽂혔다.
"격파!"
측면에 구멍이 뚫린 판터는 연기를 내뿜으며 정지했다. 조종수와 무전수가 전차에서 빠져나와 도망치는 사이, 새로운 전차가 튀어나와 곧장 이쪽으로 달려왔다.
"재장전!"
닉이 포탄을 장전하는 동안, 소대 전차들이 대신 발포했다. 포탄 3발이 한 대의 4호 전차에 집중되었다. 거의 동시에 포탄을 얻어맞은 4호 전차는 대폭발을 일으키며 불타올랐다.
"여기는 참새, 적과 교전함. 현재까지 적 전차 2대를 격파했다."
-여기는 황새. 알겠다, 즉시 지원하겠다.
무어 소령이 본대를 이끌고 달려오기 전에 나는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적들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먼저 나서서 공격해야 하나?
고민 끝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보리스, 전진해."
"잘 못 들었습니다."
"여기는 참새 1. 전 차량에 전한다. 우리는 전진해서 제리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현 위치를 고수하며 이쪽으로 오는 적 전차들을 저격하는 것이 안전할 터였지만, 적들이 이쪽으로 오지 않고 그대로 후방을 공격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었다. 적들이 포위망을 만드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는 꼴이나 다름없으니.
따라서, 내가 내린 최선의 결론은 우리가 먼저 적의 통수를 때리는 것이었다.
"소대, 전진!"
***
스무 살의 이등병 빌헬름 쇠너는 기쁨에 겨워 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입대하고 처음 전장에 투입된 뒤로, 빌헬름은 셀 수 없이 많은 패전과 퇴각을 반복해왔다.
한때 전 유럽을 손에 넣을 것만 같았던 대독일의 아성은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프랑스에서 쫓겨난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발칸의 동맹국들까지 일제히 총부리를 돌렸다.
정녕 독일에 미래란 없는 것일까? 이대로 1918년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연합군은 자만감에 도취되어 무리하게 진격을 거듭했고, 전선이 늘어난 만큼 취약해진 측면을 형편없는 동맹군에게 맡기는 실책을 범했다.
그리고 지금, 독일군은 반격을 개시했다.
"승리가 코앞에 있다, 제군들! 저 거만하기 짝이 없는 앵글로색슨 놈들과 발칸의 배신자들에게 독일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거다!"
"우아아아아!"
총사령관 에리히 회프너의 연설은 젊고 혈기왕성한 병사들을 흥분시켰다. 패배에 익숙해진 그들에게, 승리만큼 달콤한 것도 없었다.
드디어 승리를 맛볼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감이 그들을 날뛰게 만들었다.
"어이, 저놈 좀 봐! 저거 속옷 아냐?"
전투가 끝나갈 무렵, 그리스군 병사 한 명이 속옷을 벗어 총에 걸고 휘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백기가 없으니 대신 속옷을 걸어 항복하겠다는 의도를 전하려는 것이렷다.
하지만 이미 복수에 눈이 먼 빌헬름은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헉!"
총탄을 맞은 그리스병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푹 쓰러졌다.
"역겨운 배신자 놈. 이제 와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면 오산이지."
병사들은 투항하는 적들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하기 일쑤였다. 특히, 독일의 옛 동맹이었던 그리스군과 불가리아군 병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사살당했다. 독일을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하라는 회프너의 지시 때문이었다.
들풀과 풀꽃으로 가득했던 들판은 삽시간에 피로 얼룩졌다. 사방에는 총을 맞고 죽은 시체들로 가득했고, 격파된 장갑차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땅에 스며들었다.
"다 태워버려라. 우리에게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줘라."
"영국 놈들도 별거 아냐! 이제 우리가 다시 승리할 차례다!"
"이참에 소피아까지 가자!"
시체들의 산을 뒤로하고, 빌헬름과 병사들은 만세를 외치며 전진을 거듭했다. 독일의 기술자들이 만들어낸 강력한 전쟁 병기들이 그들을 호위하듯 좌우에서 나란히 굴러갔다.
크롬웰 한 대가 미친 듯이 포를 쏘아대며 필사적으로 후진했다. 하지만 당황하여 아무렇게나 쏘는 포탄이 제대로 맞을 리가 없었다.
도망치던 크롬웰은 도랑에 빠졌고, 도랑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판터가 쏜 포탄을 맞고 격파당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때,
"뭐야? 무슨 일이야?"
"판터가 당했다!"
크롬웰을 격파하고 의기양양하게 나아가던 판터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포탄에 맞아 격파당했다.
황급히 4호 전차가 달려나갔지만, 판터와 똑같은 최후를 맞았다. 모두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에, 처음 보는 전차가 나타났다.
그 전차의 정체는 영국군의 코멧 전차였다.
***
"전진! 다 쓸어버려!"
눈앞에 있는 모든 병사들은 독일군이었다. 놈들은 도로에서 자동차와 마주친 고라니마냥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줄 몰랐다.
기관총 두 정이 불을 뿜고 나서야, 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놈들이 도망칩니다!"
"나도 아니까 총이나 쏴!"
제레미가 차체 기관총으로 적 보병들을 유린하는 동안, 게이츠 원사는 왼편으로 포탑을 돌렸다. Sd.Kfz 251 장갑차 한 대가 급히 후진 중이었다.
"발사!"
독일군의 장갑차는 꼬치구이처럼 정면을 관통당해 폭발했다.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장갑차에서 뛰어내리다가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남은 두 대의 장갑차도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적 기갑차량이 전멸하자, 마음 놓고 유탄을 장전했다. 우선 적 보병들이 모여있는 곳에 한 발 날리곤, 시계방향으로 포탑을 돌리며 기관총을 난사했다.
"참새로부터 황새에게, 적 보병들과 교전 중! 규모는 중대 이상으로 보인다!"
-전차는? 보이는가?
"전차는 보이지 않는다. 전부 보병들뿐이다."
-알겠다. 곧 그리로 가겠다!
"수신 완료."
독일군 입장에선 그야말로 사신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들은 당황한 나머지 싸울 생각도 못 하고 도망치기 바빴다.
들판은 도망치다 총을 맞고 고꾸라진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소대 전차들과 보병들까지 합류해 총탄을 퍼붓자, 독일군은 괴멸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모든 적들이 당하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펑!
-참새 3, 피격! 빌어먹을!
정신없이 총탄을 퍼붓는 와중에 참새 3이 판처파우스트를 맞고 격파당했다. 전차에 불이 붙자, 승무원들은 지체 없이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전차에서 탈출한 승무원들은 서둘러 다른 전차의 뒤로 숨었다. 판처파우스트를 쏜 병사는 또 다른 전차를 향해 판처파우스트를 쏘려다가 아군 보병들이 난사한 총탄에 벌집이 되어 나뒹굴었다.
비록 전차 한 대를 잃긴 했지만, 전투는 아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독일군 1개 중대를 괴멸시키는 데 성공한 데다, 추가적으로 보병들의 수색을 통해 작전지도까지 노획했다.
잠시 뒤 도착한 무어 소령에게 노획한 지도를 보여주자, 그는 브랜슨 대령에게 이를 보고했다. 브랜슨 대령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작전지도를 활용해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7km만 더 가면 적의 보급소에 도달할 수 있네."
"그럼 거길 털어야겠군요. 하지만 놈들이 미리 연락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여기 이놈들이 워낙 신속하게 털려서 미처 연락 못 했을 가능성이 커. 설령 연락했다고 한들 인근에 있는 부대가 도착하기엔 거리도 멀고. 충분히 해 볼 만 해."
작전 회의는 금방 끝났다. 이로써 우리의 다음 목표는 독일군의 보급소로 정해졌다.
지도에 따르면, 보급소에는 정비중대와 탄약중대, 제빵중대 등 전투력을 기대하기 힘든 부대들만 가득하다. 거길 전차중대로 공격한다면? 양 떼 한가운데에 늑대들을 풀어두는 것이나 다름없겠지.
"대위님,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뭔데요, 원사?"
"탄약이 문제입니다. 총알도 그렇고, 포탄도 절반 밖에 안 남았어요."
탄약. 그 중요한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게, 그렇게 미친 듯이 쏴댔는데 탄약이 충분할 리가 없다.
"그렇게 부족합니까?"
"전투 1회분을 치를 분량은 됩니다만, 제가 보기엔 간당간당합니다. 특히 철갑탄은 9발이 전부입니다."
"연료는요?"
"연료는 아직 충분합니다!"
보리스가 대답했다. 그나마 연료는 충분하다니 다행이군.
전투가 끝나는 즉시 탄약을 보급을 받을 수밖에.
내친김에 다른 전차들의 탄약도 조사해보니, 사정이 거의 다 비슷했다. 무어 소령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무어 소령은 우리 소대의 위치를 뒤로 돌렸다.
-지금부터 내가 선두에 서도록 하겠다. 적들은 우리가 올 줄 꿈에도 모르고 있다. 잽싸게 때리고, 잽싸게 튀어서 다시 싸우도록 한다. 그럼, 전진!
강철 야수들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좋아, 이제 다 갔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네. 무전기는 멀쩡한가?"
"멀쩡합니다, 중대장님. 잘 작동합니다."
"그럼 빨리 무전 넣어. 토미들이 보급소 쪽으로 가는 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