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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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5화
175화 충격과 공포 (4)
공병들이 피땀 흘려 만든 부교를 건너자 곧장 적진이었다.
아군 공수부대는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필사적으로 교전 중이었다.
아무리 창공에서 낙하산 하나 메고 뛰어내리는 강심장들이라 해도, 소화기로 기갑부대를 이길 수 없는 일.
우리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들은 전멸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았다, 아군이야!"
"우리 기갑부대다!"
우리를 알아보고 환성을 질러대는 공수부대원들과 달리, 독일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이제 막 보스몹 다 잡아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최종보스가 튀어나오면 페이커라도 당황하지.
"장전 완료!"
목표는 측면을 대놓고 드러낸 3호 돌격포였다. 서둘러 차체를 돌리고 있지만, 지형 때문에 선회가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준 완료!"
"발사!"
측면에 내리꽂힌 철갑탄은 돌격포를 유폭으로 몰고 갔다. 전투실이 통째로 뜯겨나가고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광경이 아주 예술이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바뀌자, 독일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왜냐? 그야 우리가 퇴로를 막고 있거든.
이제까지 처맞는 입장이었던 공수부대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해 공격을 퍼붓자, 독일군은 사냥개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갈팡질팡했다. 결국, 도망치기 어렵다고 판단한 지휘관이 항복하면서 전투는 끝났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전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공수부대 대위가 내게 칼같이 경례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5분만 늦었어도 저희 전부 다 전멸하거나 포로가 됐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런 일로 감사를 받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뭔가 쑥스럽지만, 그래도 칭찬받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승리의 성취감을 만끽하기도 전에, 비보가 들려왔다.
"그레이 대위! 아서 그레이 대위!"
"어? 중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무어 소령의 표정이 심히 좋지 않았다. 십중팔구 또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다.
"대대장님께서 장교들은 모두 집합하라고 하시네. 보아하니 일이 터진 것 같아."
***
"측면이 돌파당했단 말입니까?"
"그래. 덕분에 지금 후방은 난장판이라고 하네.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아."
브랜슨 대령이 말하길, 몇 시간 전 아군의 측면을 지키고 있던 불가리아군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었다.
그것도 보통 당한 것이 아닌 모양인지, 사단장 2명이 포로로 잡히고 독일군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나머지 부대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진지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불가리아군이 이토록 빠르게 붕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아군 사령부도 난리였다. 급한 대로 그리스군이 방어에 나섰지만, 그들도 얼마나 버틸지는 미지수.
진짜 제대로 좆된 셈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제리들을 포위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우리가 포위당하게 생겼어."
아직까지 후방과 단절된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그리 될 수 있었다.
"방금 명령이 내려왔네. 우리 대대는 즉시 뒤로 빠져서 제리들의 후방을 공격하라는군."
"하지만 우리가 빠진 뒤에 제리들이 전면에서 공격해오면 어떡합니까?"
무어 소령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말대로, 우리가 후방으로 간 사이 독일군이 공격해온다면 여러모로 곤란할 터였다. 브랜슨 대령도 그 점이 걱정되는지 인상을 썼다.
"다른 부대들이 알아서 잘 막아주길 바래야지.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나."
후방 부대들 다수가 보병들뿐인 데다 전차는 얼마 없어서 반격은커녕 방어만으로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상부에선 실력이 검증되었고 피해도 적은 우리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돌려막기란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브랜슨 대령의 말대로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우선이었다. 다른 대대들이 우리 몫까지 잘 버텨주기를 믿을 수밖에.
서둘러 회의를 끝낸 뒤, 소대로 돌아와 현 상황을 설명했다. 또 싸우러 가야 된다는 소식을 들은 소대원들의 얼굴이 썩어들어가더니, 내가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도 얘기하자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대장님, 그럼 저희는 지금 포위되기 일보 직전이란 소립니까?"
"아직은 아냐. 아직은. 하지만 이후의 결과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여기서 다 함께 손잡고 룰루랄라 포로수용소로 가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병사들은 군말 없이 출동 준비에 들어갔다. 곧 대대 전체가 출동 준비를 마쳤고, 우리를 대신할 크롬웰 대대도 도착했다.
-대대, 출발한다. 각 차량 간 거리 유지하면서 이동한다.
우리는 다시 부교를 건넜다.
***
쾅!!!
"빌어먹을."
판터가 쏜 포탄을 맞고 포탑이 날아가는 크롬웰을 보며 요르요스 카이네 중위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영국군이 증여한 크롬웰 전차는 나쁜 전차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셌다.
판터 한 대에 크롬웰 3대가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1분 만에 두 대가 격파당했다. 졸지에 혼자가 된 크롬웰은 전의를 상실하곤 도망쳤다.
"씨발, 도망치면 어쩌자는 거야! 우리는 어쩌고!"
한 병사가 도망치는 크롬웰을 보며 소리쳤다. 곧이어 눈먼 총알이 날아와 병사의 머리통에 구멍을 냈다.
"중대장님! 1소대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2소대를 투입해!"
여태껏 도망만 치다가 어렵사리 반격의 기회를 잡게 된 독일군은 물 만난 고기처럼 마구 날뛰었다. 요르요스의 중대는 독일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갈수록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피해가 너무 커 몇 번이나 상부에 퇴각 허가를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끝까지 버티라는 형식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하다못해 지원이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상부에선 크롬웰 전차 3대를 보냈다. 그리고 두 대가 당했다.
"망할 불가리아 새끼들 때문에 이게 뭐야!"
요르요스는 악을 쓰며 소총을 장전했다. 그리스와 불가리아는 사이가 원래 좋지 않았다. 세계정세 때문에 어쩌다 같은 편이 됐을 뿐.
가뜩이나 사이도 좋지 않은데, 불가리아군이 싸질러 놓은 똥을 자기들이 대신 치우는 중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어째서 원수들의 뒤처리를 해야 하는지 의문을 느끼며 요르요스는 방아쇠를 당겼다.
"좋아, 맞았군."
그가 쏜 총알은 MP40을 들고 달려오던 독일군 상병의 턱을 맞추었다. 턱을 맞고 쓰러진 적병은 꿈틀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요르요스는 무신경하게 노리쇠를 젖혀 탄피를 빼냈다.
지금 싸우고 있는 독일군과도 몇 개월 전까지는 동맹군이었다. 요르요스는 1년 전, 자국군의 훈련을 참관하러 온 독일군 장교들을 떠올렸다. 훈련이 끝난 뒤 함께 술을 마셨지.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적이 되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요르요스는 탄식을 흘리며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에도 명중이었다.
"아아악!"
어느새 참호 코앞까지 다가온 판터가 부상병의 다리를 짓밟았다. 독일군의 총알을 맞고 신음하던 부상병은 다리가 으스러지자 괴성을 질러댔다.
독일과 동맹이던 시절에 독일로부터 공여받은 PaK 38이 불을 뿜었지만, 판터는 이를 가뿐하게 튕겨냈다. 측면도 아니고 전면에서 PaK 38로 판터를 막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쪽으로 온다!"
"피해!"
판터가 다가오자, 대전차포병들은 대전차포를 버리고 도망쳤다. 독일 노동자들이 만든 독일제 대전차포를, 독일 전차가 짓밟아 고철로 만드는 요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돌아버리겠군. 뭐 하나 제대로 싸우는 놈이 없어."
요르요스는 툴툴거리며 주머니에서 새 클립을 꺼냈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탄약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이 이상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다.
"부중대장, 후퇴 준비해. 더 이상 못 버텨. 여긴 곧 뚫린다."
"알겠습니-"
퍽 소리와 함께 부중대장의 머리가 터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잽싸게 자세를 낮춘 요르요스는 독일군이 어느새 참호 안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지체 없이 수류탄을 꺼내 핀을 뽑았다. 그리고 3초를 센 뒤, 있는 힘껏 던졌다.
폭음이 울리고, 괴성 비스무리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요르요스는 살아남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퇴각한다! 전원 퇴각!"
그토록 고대하던 퇴각이었지만, 시기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 병사들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독일군과 싸우는 것조차 벅차, 퇴각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복한다! 전원 퇴각해라!"
목청껏 퇴각을 부르짖던 요르요스는 착검한 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독일군을 보곤 서둘러 총구를 돌렸다. 곧바로 방아쇠를 당겨 적의 미간에 총탄을 박아넣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크흡!"
총검은 가슴팍에 박히자, 요르요스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리스군의 저항을 분쇄한 독일군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승리를 향해서.
***
"그 많고 많은 대대 중에서 왜 하필이면 저희인지 모르겠습니다."
제레미가 무거운 어조로 불만을 쏟아내자, 봇물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한탄이 터져 나왔다.
"내 말이. 맨날 일 터지면 우리부터 찾더라."
"해주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평소였다면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던 게이츠 원사조차 이번만큼은 침묵을 지켰다. 표정을 보니 그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계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는 모양이었다.
"소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나도 불만이 없겠냐. 장교라서 말 안 하고 있는 것뿐이지."
처음 보리스의 질문을 들었을 땐, 장교인 내가 사실대로 말해도 되려나 하는 우려였다. 하지만 나라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닌 데다, 어차피 우리뿐인데 조금은 솔직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우리가 네임드 부대라고 하지만, 솔직히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애초에 우리가 발칸에 올 이유는 하나도 없는데 말이지."
물론 혜택도 없지는 않다. 네임드 부대랍시고 보급품도 대부분 신삥으로 들어오는 데다, 신형 무기가 나왔다 하면 전군에서 우리 부대에 먼저 지급된다는 '사소한 장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특별대우는 필요 없으니 제발 좀 그냥 가만히 놔뒀으면 싶었다. 군대에서 일을 너무 잘하면 맨날 부려 먹히기만 할 뿐이니까 적당히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물론 저희가 그만큼 대우도 받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부려진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는 것 같군요."
잠자코 얘기를 듣던 게이츠 원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보리스가 신난 듯이 말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 목소리를 내면, 분명히 상부에서도-"
"잠깐, 정지!"
한창 달리고 있는 와중에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아군 병사였다.
"아군이로군. 소속은?"
"제7전차연대 1대대 1중대다. 상부 명령을 받고 가는 중인데, 그쪽은?"
"28보병연대 3대대입니다!"
뒤늦게 내 계급을 알아본 병사가 황급히 경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전방에선 폭음과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독일군은 어디에 있지? 규모는 얼마나 되고?"
"사방에 널린 게 제리들입니다, 대위님. 저희도 죽다 살아났습니다. 규모는 못해도 사단급은 될 겁니다.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고요."
원군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안도해서인지 말이 많아졌다. 이들은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부대가 반토막 나는 피해를 입곤 겨우 퇴각해 방어선을 형성한 상황이었다.
"전차를 봤나?"
"예, 제리들이 보유 중인 전차를 전부 투입한 게 분명합니다. 숫자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단급은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전차가 제법 많으리라고 예상했다. 숫자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차의 종류였다.
"종류는 뭐지? 4호 전차였나?"
"대부분 4호나 돌격포였습니다. 드물게 타이거와 판터도 섞여 있었고요."
티거에 판터도 있다라. 벌써부터 똥줄을 타게 만드는군.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무전으로 티거와 판터도 존재한다고 알렸다. 무전망에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렸다.
"씨발, 돌겠네 진짜. 타이거에 판터까지 있다니."
닉이 입술을 깨물었다. 게이츠 원사도 떨리는지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았다.
그 귀중한 티거와 판터까지 투입했다는 말은, 독일군이 아주 제대로 작정하고 쳐들어왔다는 소리였다. 전방에서 들리는 소음이 더 커졌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전차 전진. 모두 마음 단단히 먹도록."
걱정과 희망이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보병들을 지나쳐, 우리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