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74화
174화 충격과 공포 (3)
"백기입니다, 대위님."
루마니아군이 주둔 중인 마을의 깃대에는 백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혹시나 싶어 쌍안경을 꺼내 다시 확인했지만, 분명히 백기였다. 마을 입구에는 이미 루마니아군이 몰려나와 우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거...... 진짜야?"
전투를 예상했던 내겐 다소 황당한 상황이었다. 이것들, 단체로 몰카라도 찍나? 알고 보면 뒤에 이경규 있는 거 아냐?
적의 함정일 수도 있었기에, 중대는 마을 부근에서 정지하고 나만 마을로 접근하기로 했다. 내가 전차를 타고 다가가자, 지휘관인 것으로 추정되는 장교가 나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어서 오시오. 나와 우리 대대원들은 귀관에게 항복하는 바요."
영어를 할 줄 아는 병사가 지휘관의 말을 통역해서 내게 들려줬다. 루마니아군 지휘관의 계급은 자그마치 중령으로, 나보다 높았지만 그는 시종일관 내게 겸손하게 굴었다.
"아서 그레이 대위입니다. 정말로 항복하시는 게 맞습니까?"
"그렇소. 항복이오. 무기는 이미 모두 수거해서 마을 중앙에 쌓아놨으니 확인해보시구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한 병사들의 표정을 보니 함정 같지는 않았다. 무전으로 이 사실을 본대에 알리자 무어 소령이 본대를 이끌고 마을로 진입했다.
투항한 루마니아군은 편제상 대대였지만, 실질적인 수는 중대 수준에 불과했다. 무기는 더욱 처참했는데, 대전차화기는 보포스 37mm 대전차포 한 문에 화염병이 전부였다.
만약 항복 대신 저항을 택했더라면 전멸을 피하지 못했을 터. 이들의 항복은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마니아군의 항복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을을 점령한 아군은 10분간 휴식을 취한 뒤 서둘러 출발했다. 최종 목적지인 플로이에슈티로 가려면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다.
이를 위해 출발 전 전 병력에게 각성제가 지급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각성제의 위험성이 잘 알려지지 않고, 오늘날의 피로회복제 정도로 여겨지던 시절이라 다들 망설임 없이 각성제를 입안에 털어 넣었지만 진실을 아는 나로서는 영 꺼림칙했다.
"소대장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손바닥에 올려놓은 알약을 응시하는 나를 보리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야."
"별 고민을 다 하십니다. 그냥 먹으면 될 일 아닙니까?"
그건 나도 안다. 진짜 문제는 후유증이란 말이지.
각성제를 먹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작전을 위해 여러 번 먹었고, 그 효과도 제대로 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며칠간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린 탓에, 내겐 영 꺼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휴, 그놈의 전쟁이 뭐라고 이딴 걸 먹는지."
지금은 작전 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남들 다 깨어있는데, 혼자서 졸면 안 되니까. 그래도 스스로 독약을 먹는 것 같아 기분이 영 그렇다. 전쟁 끝나면 건강부터 챙겨야지.
***
"개씨발 이게 대체 뭔소리야!"
영국군을 막으러 보낸 루마니아군이 싸우기는커녕 총 한 번 쏴보지도 않고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군 사령부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빌어처먹을 놈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루마니아 방어군 총사령관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은 역정을 토해냈다. 루마니아군이 전투를 거부하고 퇴각하거나 자발적으로 항복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화를 겨우 가라앉힌 회프너는 긴장한 얼굴로 뻣뻣하게 서 있는 자신의 참모장에게 명령했다.
"지금 우리 군 휘하에 있는 루마니아군이 얼마나 되지?"
"7개 사단입니다."
마음 같아선 전부 다 후방으로 보내거나 아예 군복을 벗기고 독일에 노동자로 보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모두 빼자니 빈자리가 너무 많아진다.
"그중에서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부대가 있나?"
"2개 사단 정도만이 겨우 믿을만합니다. 이들 사단의 장교들과 병사들의 적지 않은 수가 독일 혈통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렇군. 일단 142보병사단과 25기갑여단을 빼도록 하지. 그 자리에는 앞서 언급한 루마니아군 2개 사단을 투입하게."
회프너는 보고받은 연합군의 진격로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무슨 수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리며 새 질문을 던졌다.
"적군의 측면을 지키고 있는 부대는 어떤 부대인가? 미군인가, 영국군인가?"
"즉시 확인하겠습니다."
3분 후 돌아온 참모장의 보고는 회프너에게 일말의 희망감을 안겨주었다.
"적의 측면을 지키고 있는 부대는 그리스군과 불가리아군이라고 합니다."
독일군이 그랬던 것처럼 연합군도 전투력이 강한 영국군을 선두에 세우고, 측면의 방어는 전투력이 다소 떨어지는 그리스군과 불가리아군이 전담하고 있었다. 회프너는 쾌재를 불렀다.
"답은 정해져 있군. 정면의 영국군은 놔두고, 측면을 공격한다. 허리가 끊어지면, 뱀 대가리는 그대로 고립될 뿐이지."
회프너는 보다 확실한 성공을 위해, 휘하에 있는 티거와 판터들까지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소방수로 쓰기 위해 가급적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후방에만 놔뒀다. 이제 그 진가를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
"정지."
지금 내 눈앞에는 너비가 족히 50m는 넘는 강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강을 건널 유일한 수단은 다리는 저 모양이고.
"폭격에 맞은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제리들이 퇴각하면서 터뜨린 모양이네."
이 강을 건너야 건너편에 있는 아군 공수부대와 합류할 수 있다. 지금도 그들이 독일군과 싸우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렸다.
공수부대가 전멸하기 전까지 서둘러 강을 건너야 했다.
"자, 드디어 우리 차례다!"
"가즈아!"
공병들이 나타나 부교를 설치하는 동안, 우리는 주변을 경계했다. 교량전차가 있었다면 서둘러 강을 건널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에겐 교량전차가 없다.
정확히는 있긴 했었다. 하지만 속도가 느려 행렬 맨 뒤에서 졸졸 따라오다 낙오한 독일군의 습격으로 그만 격파되고 말았단다. 곧장 반격해서 기습을 가한 적군을 모두 죽여버리긴 했지만, 이미 황천길을 건넌 교량전차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당겨!"
"좋아, 좋아. 조금만 더."
악을 써가며 부교를 만드는 공병들을 보니, 새삼스레 옛날 생각이 났다. 입대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포병과 취사병, 공병만큼은 피해라던 복학생 선배들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친구 한 놈은 선배들의 진심 어린 조언을 무시하고, 빨리 군대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공병에 지원했다가 그만 무릎 인대가 작살이 난 채 돌아왔다. 이제는 취미인 축구도 할 수 없다고 우는소리를 하던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대위님, 이것 좀 드시죠. 이럴 때 배를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마워요, 원사."
막간을 이용해 게이츠 원사는 크래커를 이용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한입 베어 무는데, 맛이 좀 이상했다.
못먹을 맛은 아니지만, 식감이 이상했다. 이거 설마-
"이거...... 스팸 맞죠?"
"맞습니다. 크래커 사이에 스팸을 끼어서 먹어봤는데, 제법 괜찮더라고요."
스팸. 본고장인 미국인들보다 한국인들이 더 많이 먹는 요상한 식품.
2차대전 때 물자 부족에 곤란해하던 각국에 대량 원조되어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준 고마운 음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원래 익혀서 나온 거라 생으로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는 하지만, 굽거나 찌개에 넣어서 먹는 것에 익숙했던 내게 생 스팸의 맛은 충격이었다.
이런 걸 먹으니까 혀가 마비됐다고 사람들이 욕을 하지.
어느새 부교가 완성되었고, 1소대 차량들부터 부교를 건넜다.
부교를 건넌 전차들은 곧장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돌격했다. 작전은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
"그리고리, 담배 있냐?"
"내 몫밖에 없어."
"그럼 그거라도 줘."
"내가 왜?"
"너도 지난번에 나한테서 담배 한 개비 받아갔잖아."
그리고리는 짜증을 내며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마르틴에게 건넸다.
그들이 소속된 불가리아 제1사단의 임무는 영국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참호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간 지 어느새 5시간째. 병사들이 지루함을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딱히 할 일이 없자 병사들은 본분을 망각하고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반과 그리고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놈의 전쟁도 거의 다 끝나가는데, 전쟁 끝나면 뭐할 거냐?"
"당연히 제대해야지.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좆같은 곳에 남아있냐?"
둘 다 전쟁이 터지고, 정부가 동원령을 선포하면서 군에 징집되었다. 그들에겐 다행으로, 불가리아는 공습을 몇 번 당한 것을 빼면 전투에 참여한 일이 전무했기에 여태까지 그들이 전장에 투입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입대 전까진 무슨 일을 했는데?"
"올리브유 공장에서 일했지. 빡세지만 적어도 군대보단 자유롭거든. 보수도 그렇고. 그러는 너는?"
"나? 아교 공장에서 일했어. 냄새가 지독한 데다 여름철에는 죽을 맛이었지. 그래서 나는 군대 일이 더 편하더라고. 마음대로 술 못 마시고 여자도 없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그럼 전쟁 끝나도 군대에 계속 있을 생각이냐?"
"아마도? 그래도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살려면 군대 월급만으론 힘들지. 아교 공장이 일은 빡세도 보수는 괜찮아서 지금도 고민 중이야."
"그렇군. 그래도 사회가 군대보다...... 이건 뭔소리야?"
그리고리는 말을 멈추고 전방을 응시했다. 틀림없이 무한궤도 구르는 소리였다. 잠시 후 4호 전차가 나타나 불가리아군의 진지를 향해 다가왔다.
"전차다!"
"진정해, 아군이야."
전차의 출현에 놀란 불가리아군이었지만, 이내 포탑 측면에 그려진 불가리아군 마크를 보곤 안도했다. 불가리아군도 독일제 4호 전차를 굴리기에 식별 마크가 없었다면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없었을 터였다.
"......가만, 지원 온다는 소리가 있었나?"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반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장교들은 지원이 오는 줄 알고 있거나, 아니면 상부에서 그들에게 제때 전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실제로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4호 전차 6대는 그대로 불가리아군 진지로 다가왔다. 진지 코앞까지 다가온 전차의 포구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와, 불가리아군의 4호 전차에 구멍을 냈다.
"뭐, 뭐야!"
"우린 아군이잖아! 그런데 왜-"
이윽고 기관총 사격이 가해지고 경악하던 불가리아 병사들을 고꾸라뜨렸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장교들이 외쳤다.
"독일군이다! 모두 사격!"
불가리아군이 자국산 4호 전차를 쓰고 있는 것에 착안한 독일군의 기만전술이었다. 철십자 마크를 지우고, 불가리아군 마크를 그리자 불가리아군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방심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이윽고 건너편에서 독일군이 튀어나와 4호 전차들과 함께 불가리아군의 진지를 유린했다.
-모조리 다 죽여라. 배신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라.
-명중! 그대로 깔아뭉게!
"아아아아아악!"
"도망쳐!"
기만술로 불가리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독일군은 불기둥과 잔해들을 만들어내며 후방으로 진격했다. 총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