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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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63화
163화 격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포격이 끝나자 중대는 수많은 연기 기둥들이 공동묘지의 십자가처럼 솟아난 숲을 향해 움직였다. 적들이 퇴각하면서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다행히 도로에 지뢰는 없었다.
적이 어디에 매복해있을지 몰랐기에 다들 주의하며 움직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경계심은 무뎌졌다. 나중에는 이곳이 전쟁터라는 사실도 잊을 정도였다. 무전기에선 몽고메리의 연설문이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적들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아군은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고 있으며, 적들은 퇴각하느라 여념이 없다. 곧 파리도 해방될 것이며 가을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독일 국경에......
"생각해보면 빡치는 일 아닙니까?"
"어떤 일 말인데?"
얌전히 연설문을 듣고 있던 닉이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녀석들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피똥 싸는 동안 그놈들은 본토에서 꿀이나 빨다가 제리들이 남부로 빠진 뒤에야 빈집털이 했잖습니까."
닉이 화를 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린 여기서 개고생하는데 어떤 놈들은 전쟁 날로 먹는다는 이유.
"어쩌겠냐? 원래 군대란 게 케바케인데. 뭐, 나중에 그놈들이 우리가 파리를 해방했다며 거들먹거리고 다니면 나라도 꼴받겠지만."
적당히 노가리나 까면서 길을 가는데, 좌우로 포화가 작렬하며 걸어가던 보병들이 피를 흩뿌리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적습이다! 모두 산개!"
"전차 뒤로 피해!"
전사자들을 애도할 시간 따윈 없었다. 보병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전차 뒤로 도망쳤고, 나는 즉시 쌍안경을 꺼내 적의 위치를 탐색했다. 주변에 숲이 많아 적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곧이어 포탄이 직사로 날아와 셔먼 한 대가 불덩이로 변했다. 탈출자가 없는 걸로 봐선 전차병 5명 모두 즉사한 모양이다. 빌어먹을.
-11시와 12시 방향 사이에 섬광 발견!
-사격!
발사광을 발견한 아군이 그리로 총탄과 포탄을 쏘아대자 곧 숲에선 요란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의 크기로 보건대 대전차포 진지다. 포탄이 유폭해서 진지째로 날아간 것이 분명하다.
이에 보복하듯 또 한 발의 포탄이 날아와 보병 서너 명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서둘러 포탑을 돌리는데, 눈앞의 전차가 밥솥처럼 터져버렸다. 포탑이 땅에 떨어지고, 접합부에선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철갑탄에 관통당해 유폭한 것이다.
"모두 전차 빼! 도로에서 벗어나! 가만히 있다간 표적이 된다!"
휘하 전차들이 도로에서 빠져나갈 동안 나는 자리를 지켰다. 앞서 당한 전차가 방패 역할을 해주는 데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되려 다른 전차의 기동을 방해해서 아수라장이 될 수 있었다.
마침 시야에 숲 언저리에서 돌격포 한 대가 보였다. 놈이 선회하며 주포를 발사하자 불행한 크롬웰 한 대가 당해 불을 토해냈다. 너 아주 잘 걸렸다.
"1시 방향에 돌격포다. 철갑탄 장전!"
"장전!"
"조준 완료!"
사격을 외치기 무섭게 주포가 강렬한 섬광을 토해내며 불을 뿜었다. 포탄은 일격에 명중. 기동륜과 궤도가 날아간 돌격포는 곧이어 날아든 2발을 맞고 그대로 리타이어했다.
하지만 이내 강적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타이거, 타이거다!
-씨발, 진짜 타이거야!
듣기만 해도 살 떨리는 그 이름, 티거가 나타난 것이다. 놈의 거대한 몸체를 본 병사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괴성이 무전을 타고 전해지는 가운데, 중대장은 황급히 공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닉, 철갑탄 장전!"
***
"장전 완료!"
"침착해라, 볼. 우선 주포 긴 놈들부터 처리한다."
"알겠습니다."
비트만이 지목한 표적은 챌린저였다. 차체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큰 포탑과 기다란 주포는 척 보기에도 보통 전차가 아니었다.
동부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경험을 쌓은 베테랑 전차병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위협이 되는 전차들부터 처리해나갔다.
"발사!"
포탑에 88이 내리꽂힌 챌린저는 유일한 장점인 17파운더를 사용해볼 틈도 없이 불덩이가 되었다. 표적을 해치운 볼이 주먹을 불끈 쥐는 사이, 비트만은 곧바로 다음 목표물을 탐색했다.
"10시 방향! 탄종은 철갑탄 그대로, 조준!"
도로에서 벗어나 들판으로 뛰어든 코멧이 급히 포탑을 돌리고 있었다. 전차장은 멍청하게도 해치 밖으로 상체를 허리 벨트까지 내밀고 있다가 아군의 총탄에 맞아 푹 쓰러졌다.
"장전 완료!"
"쏴!"
측면에 포탄을 맞자 코멧의 포탑이 허공으로 날아갔고 주변에 있던 보병들은 폭발에 휩쓸려 온몸이 산산조각 났다.
"다음!"
다음 목표물을 찾는데, 차체 전면부에 충격이 전해졌다. 곧이어 통신수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아아악!"
차체 전면에 명중한 포탄이 장갑을 반쯤 파고든 것이었다. 다행히 포탄은 아슬아슬하게 관통에 실패했다. 겨우 3도 차이로 그들은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비트만은 방금 포탄을 쏜 전차를 찾았다. 잔해 뒤에 몸을 숨긴 코멧 한 대가 이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조금 전 포탄을 쏜 그놈이리라.
"적 전차 정면!"
***
"씨발! 저, 저 괴물 같은 놈이......"
차체 전면에 일격을 먹여줬음에도 멀쩡하게 포탑을 돌리는 티거를 본 게이츠 원사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포탄은 간발의 차이로 차체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장갑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신뢰성과 가격을 포기한 대가로 얻어 낸 사기적인 맷집다웠다. 씨발, 이걸 버티다니. 17파운더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다음으로 강력한 녀석인데.
어느새 포탑을 돌린 티거가 발포했고, 포탄은 우리 앞의 전차 잔해에 맞고 폭발했다. 당장은 목숨을 건졌지만, 놈이 각도를 수정해서 재차 발포하면 우린 끝장이었다. 코멧의 포탑 전면은 4호 전차의 75mm 포탄은 튕겨낼 수 있어도, 88에는 종잇장처럼 뚫리니까.
여기저기 널브러진 아군 병사들의 시체를 그대로 밟고 지나갈 만큼 보리스가 필사적으로 전차를 모는 사이, 닉은 철갑탄을 장전했다.
"장전 끝!"
"조준 완료! 쏩니다!"
"쏴!"
적과 거의 동시에 포탄을 쏘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꽝이었다. 적이 쏜 포탄은 내 전차 포탑을 긁고 지나갔고, 이쪽에서 쏜 포탄은 적 전차 옆에 있는 나무를 쓰러뜨렸다.
이걸로 다시 동점.
서둘러 포탑을 재장전하는데, 상공에서 굉음이 울렸다. 굉음을 정체를 본 병사들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지며 입에선 환성이 터져 나왔다.
"아군이다! 살았어!"
중대장의 지원요청을 받고 호커 타이푼 편대가 나타난 것이다. 전투 현장에 나타난 타이푼 편대는 로켓포를 발사해 숲에 불을 질렀다.
"우아아아아!"
"좋았어! 다 태워버려!"
로켓포 공격을 받은 숲이 화염에 휩싸이고,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자 우박처럼 쏟아지던 총탄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티거는 아직 살아있었다.
숲이 불에 휩싸이자 놈들은 과감하게 밖으로 나오는 것을 선택했다. 숲에서 빠져나온 티거는 총 3대. 그중 한 대가 내 쪽으로 달려오면서 주포를 발사했다.
콰작!
"으왓!"
포탄이 차체에 맞고 튕기면서 전면에 부착된 기관총을 부러뜨렸다. 때마침 제레미는 총탄이 다 떨어져서 재장전 중이었고 그 덕분에 녀석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원사, 궤도를 노려서 쏴요!"
내 지시대로 게이츠 원사는 티거의 무한궤도를 향해 발포했다.
"명중입니다!"
궤도를 작살냈으니, 이제 저놈은 움직이지 못한다. 궤도가 끊어진 티거가 정지하자, 나는 기다리지 않고 보리스에게 전진을 명령했다.
"전진! 좌측으로 돌아서 저 새끼 대가리 깬다! 실시!"
"실시!"
아직 포탑이 남아 있긴 하나, 티거의 포탑은 회전 속도가 매우 느리다. 그 틈을 타 녀석의 측면을 잡으면 이쪽의 승리다.
***
"궤도가 끊어졌습니다!"
"적이 측면으로 돈다!"
부하들의 비명 섞인 보고에도, 비트만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는 우선 조종수에게 있는 힘껏 전차를 돌리라고 지시한 뒤, 볼에게도 새 명령을 내렸다.
"볼, 너는 포탑을 최대한 돌리고 명령하기 전까지 쏘지 마라. 알겠냐?"
"알겠습니다!"
조종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전차를 돌리자, 한쪽 궤도로도 그 무거운 차체가 어느 정도 돌아가기 시작했다. 볼도 미친 듯이 포탑을 돌려 적을 거의 다 따라잡았다.
비트만은 적이 사격을 위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적이 사격을 위해 전차를 멈추는 그때 비트만은 발사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티거의 주포가 불꽃을 토했다. 곧이어 코멧의 측면에서 섬광이 터졌다.
***
"큭!"
순간적으로 강렬한 진동이 전차 내부를 휩쓰는가 싶더니, 뒤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측면이 적탄에 맞은 것이다.
전차의 피격 사실을 인지하자 닉이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피격당했다! 탈출해야 해!"
"기다려, 인마! 아직 일이 남았어!"
엔진이 망가지고 전차에 불이 붙은 상황에서도 포탑은 아직 제대로 작동을 했다. 티거의 측면을 잡은 게이츠 원사가 격발장치를 누르자, 주포가 후퇴하며 탄피를 토해 냈다.
그리고 명중.
"맞았다!"
우리처럼 놈도 측면에 포탄을 맞았다. 엔진룸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포탑의 회전이 완전히 정지했다. 우리가 당한 걸 놈에게 똑같이 되갚아줬으니, 이제는 얌전히 도망칠 차례다.
"탈출한다! 무기 챙기는 거 까먹지 말고!"
서둘러 해치 밖으로 나와 전차에서 뛰어내린 뒤 기어서 전차 뒤로 움직였다. 게이츠 원사, 닉, 보리스, 제레미도 무사히 전차에서 나와 나를 따라 바닥에 엎드렸다.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에서 숨을 고르는데, 창공에서 타이푼 편대가 날아와 다시 숲을 향해 공격을 퍼부어댔다. 전차 뚝배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군 전차들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광경이 보였다. 아군이 승기를 잡은 것이다.
"그레이 대위!"
"중대장님!"
무어 소령의 전차는 빈대떡처럼 땅에 누워 있던 우리 앞에서 멈췄다. 이윽고 해치 밖으로 상체를 내민 무어 소령은 우릴 보고 웃으며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이번에도 살아남았군.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보다시피 저희 5명 모두 멀쩡합니다. 비록 애마는 죽었지만요."
"그렇군. 먼저 갈 테니 보병들과 함께 따라서 오게."
할 말을 끝낸 무어 소령은 냉큼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우리는 뒤따르는 보병들의 도움으로 하프트랙을 타고 그 뒤를 따랐다.
앞에는 사기를 잃은 독일군들이 양팔을 위로 올린 채 우릴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미 이어지는 전투와 퇴각으로 만신창이가 된 독일군은 끝끝내 아군에게 돌파를 허용하고 말았다.
후방에 있던 아군이 바통을 넘겨받아 진군하는 동안, 대대는 잠시 현장에 머무르며 전사자들을 수습하고 적군 포로들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뜻밖의 인물과 만났다.
"그레이 대위님? 혹시 그레이 대위님이십니까?"
"어, 맞는데......요?"
나보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콧수염 중위 한 명이 다가와 나를 찾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고 하니,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재밌는(?)' 녀석을 하나 알아냈다는 것이다.
"포로로 잡은 적 장교들 중에 타이거 전차장이 있습니다."
"타이거 전차장이라면...... 혹시 내 전차를 잡은 놈 말인가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이미 부상자랑 사망자 명부 작성은 끝난 터라,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내 전차를 격파한, 동시에 내가 격파한 전차의 전차장과 만난다는 것이 궁금해서 한번 만나 보기로 했다.
그렇게 중위를 따라간 곳에는, 독일군 장교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제복을 보니 SS 소속이었고, 계급은 SS 소위였다.
그 순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중위에게 물었다.
"이 친구 이름이 뭐죠?"
"잠시만요. 들었던 것 같은데......"
중위는 생각이 안 나는지 포로에게 독일어로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포로가 대답했다.
"비트만."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비트만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맙소사, 오늘 전투에서 나를 죽이려고 들었던 그 티거의 전차장이 바로 미하엘 비트만이었다니.
역사대로라면 세계 최고의 전차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을 양반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포로가 된 채로.
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이번에는 비트만이 뭐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관계로 중위가 대신 통역을 해주었다.
"혹시 오늘 자기 전차를 격파한 전차장이냐고 묻습니다만."
"아...... 그렇다고 해주세요."
이어 비트만은 내게 이름을 물었고, 내가 아서 그레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씩 웃으며 말했다.
"비록 자기도 당했지만, 그쪽한테도 한방 먹여줬으니 나름 만족한다고 합니다. 라디오에서 듣던 이름의 주인을 실제로 보게 돼서 신기하다는데요."
그는 이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려는 모양인가? 비트만이 내민 손을 본 중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는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냉큼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만나서 영광이었다고 전해줘요. 지금까지 상대해본 적들 중에 가장 위험한 상대였다고."
내 말을 통역해서 들은 비트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우리 둘의 예기치 못한 만남은 끝났다.
하지만, 뒤에 일어날 일들에 비하면 오늘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행운의 여신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선물을 준비 중이었다.
아주 어마어마한 선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