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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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58화
158화 호랑이들 (1)
몽텔리마흐에는 다행히 적들이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들뜨게 만든 것은, 바로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이었다.
시내로 진입하기 전부터, 주민들은 도시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큼지막한 프랑스 국기와 유니언 잭을 들고서.
"프랑스 만세! 자유 만세!"
"환영합니다!"
지금까지 프랑스인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들에게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도, 게이츠 원사도, 무어 소령도 모두들 생각하지 못한 주민들의 반응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우릴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저도 신기합니다."
반면, 우리와 동행한 캐나다군 중에서 퀘백 출신 병사들은 주민들과 포옹을 하며 힘껏 찬송가를 불렀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창문 밖으로 색종이와 꽃을 뿌려댔고, 악기를 든 사람들이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해댔다.
"설마 우릴 자유 프랑스군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어쩌면 이들이 우릴 드골의 프랑스군이라 착각해서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그런 거라면, 우리가 영국군(+캐나다군)인 게 밝혀졌을 때 아주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텐데......
"아, 저기 좀 보십쇼, 대위님."
게이츠 원사가 반색하며 가리킨 곳에는 유니언 잭이 걸려 있었다. 배가 나온 중년의 남성이 유니언 잭과 프랑스 삼색기를 양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릴 프랑스군으로 착각해서 환영하는 것은 아닌 것 같군요."
휴, 다행이군. 일생 최고로 민망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환영합니다, 영국 신사 나리들. 반갑소!"
"멀리서 오느라 수고 많았소이다!"
"아, 예! 고맙습니다!"
주민들의 환영에 들뜬 병사들이 주민들과 어울려 그들이 내미는 음료수를 받아마시고, 몇몇 주민들은 전차나 장갑차 위에 올라서기도 했다.
내 전차에도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청년이 올라타 동생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를 안고서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를 연호했다.
2시간 뒤 도착한 본대도 주민들의 환영행사에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받아본 적도 없고,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성대한 행사로군. 마치 축제라도 열린 것 같구만."
"저들에겐 축제나 다름없으니까요."
주민들의 환호성과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 퍼지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작전 회의가 열렸다. 상부의 명령은 이제까지처럼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연료와 탄약을 보충하고 발랑스로 진격할 것.
"또 전진 명령입니까. 아무래도 상부에서는 정말로 한 달 안에 파리를 점령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것 같군요."
무어 소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오늘 있었던 전투를 상기시키며, 독일군이 어디까지 내려와 있는지 자세히 모르는 이상 무분별한 진격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일리 있는 말이군. 하지만 상부는 아직 남부로 진입한 독일군이 소수일 때, 최대한 멀리까지 진격하자는 주의일세."
브랜슨 대령이 말하길, 군사분계선 너머의 독일군이 이동을 시작했지만 공습과 레지스탕스들의 활약으로 철로와 다리가 대부분 박살 난 탓에, 현재까지 남프랑스로 진입한 독일군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마저도 통행에 지장이 생겨 이동이 현저히 느린 상황이고.
적들의 움직임이 굼뜰 때, 최대한 멀리까지 진격해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상부의 계획이었다.
***
몽텔리마흐에서 발랑스까지 가는데 딱 이틀이 걸렸다.
이틀 동안, 우리는 독일군과 총 두 번 마주쳤다. 하지만 전투는 없었다. 적과 만났는데 전투가 없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믿기지 않겠지만, 놀랍게도 사실이다.
첫 번째로 마주친 독일군은 이미 우리와 마주치기 전에 아군의 융단폭격을 맞아 괴멸당한 상태였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겨우 불지옥에서 빠져나온 생존자들은 불길에 휩싸인 차량들과 동료들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우리가 나타나자 지체 없이 항복했다.
두 번째로 마주친 독일군도 앞의 독일군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나타나자 도주했는데, 전차들이 추격을 시작하자 얼마 못 가 항복했다.
이번에 잡은 포로들은 전원이 항복한 소련군 포로들로 이루어진 동방부대(Osttruppen)였다. 장교와 하사관들만 독일인이고, 병사들은 대부분 러시아, 우크라이나인들이었는데 드물게 키르기스인과 타지크인들도 섞여 있었다.
"작년 모스크바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가 수용소에서 굶어 죽을 것 같으니까 전향했다고 하더군요. 내 참, 러시아인 독일군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독일군 중에 러시아인이 섞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게이츠 원사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혀를 내둘렀다. 나야 미래의 지식 덕분에 딱히 놀라진 않았지만, 러시아인이 독일군일 줄은 생각도 못 한 병사들은 진심으로 충격을 먹은 듯했다.
"제리 녀석들도 갈 데까지 갔구만. 얼마나 병사가 모자르면 러시아인한테까지 총을 쥐어주는 거야?"
"지켜야 할 곳은 많은데, 병사는 적으니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원래부터 히틀러와 독일에 충성심이 그닥이었던 친구들이라 그런지, 포로가 된 것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듯 무덤덤한 표정들이었다. 얌전히 무기를 반납하고 트럭에 오르는 포로들을 보니, 문득 전쟁이 끝난 직후 저들의 운명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원 역사에서 소련은 미국과 영국에 소련인 포로들의 송환을 요구했고, 이 때문에 많은 동방부대 인원들이 죽거나 고초를 겪었다.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포로가 되는 즉시 반역자가 되는 소련의 이해할 수 없는 방침 때문에 포로들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차피 조국에선 반역자 취급이니, 살기 위해선 전향할 수밖에.
하지만 여기서는 얘기가 조금 달라졌다. 영소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하고, 처칠은 지금도 미국의 대소지원에 부정적이다. 따라서 소련이 송환을 요구한다고 해도, 그걸 정부가 승인할까? 미국은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지만.
발랑스 주민들도 우리를 반겨주었다. 비록 몽텔리마흐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고 도시 광장에는 프랑스 삼색기와 성조기, 유니언 잭이 나란히 계양되었다.
시장이 말하길, 이틀 전까지 독일군은 이곳에 주둔했었지만 모두 떠났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이 앞서 포로가 되었던 독일군인듯했다.
발랑스에 무혈입성하자,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독일군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적들은 이미 사기를 잃고 패주하느라 여념이 없다.
상부는 물론이고, 말단 병사들까지 모두가 이어지는 승리에 잔뜩 고무되어 한마음으로 외치고 있었다.
"이대로 파리까지 가자!"
"이번 크리스마스는 베를린에서!"
하지만, 우리의 희망회로는 다음날 아주 무참하게 박살 났다.
***
발랑스에 입성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무시무시한 폭음이 도시를 덮쳤다.
첫 포탄이 떨어지기 전, 나는 부하들과 함께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포탄이 터지고 땅이 흔들거리자, 나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곧바로 잠에서 깼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조금 전의 폭음과 진동이 적의 포격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게이츠 원사도 나와 동시에 기상해, 내가 뭐라 명령을 내리기 전에 승무원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적의 포격이다! 모두 기상!"
독일군의 첫 포탄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착탄해서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포탄부터는 시내 중심부에 낙하하기 시작했다.
"포격이다!"
"엎드려!"
포격은 약 5분 동안 이어졌다. 뒤늦게 아군의 지원 요청을 받고 나타난 허리케인 편대가 적 포병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공격한 후에야 포격은 멈췄다.
겨우 5분 사이에, 발랑스 일대는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멋들어진 건물들과 오래된 유서 있는 건축물들은 포탄에 맞아 흉물스럽게 변했고, 잠을 자던 주민들은 방공호로 가지도 못하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깔려 으스러졌다.
그나마 아군의 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무어 소령도, 브랜슨 대령도 모두 무사했다.
"시 외곽의 아군으로부터 보고! 적 전차대 출현, 현재 시내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브랜슨 대령은 즉시 휘하 중대에 출전 명령을 내렸고, 준비가 끝나는 중대부터 우선적으로 출발하라고 지시했다.
연료와 탄약은 어제 보충했기에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소대로 돌아왔을 때, 이미 소대원 전원이 전차에 탑승하여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소대원들에게 무전으로 상황을 설명한 뒤, 무어 소령에게 준비 완료를 보고했다. 곧이어 다른 소대들의 보고가 무전을 통해 들려왔다.
-중대, 전진!
무어 소령의 구령에 맞춰 전차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중대, 정지.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열을 맞춰 움직이던 전차들이 일제히 정지했다.
중대장은 각 소대별로 나뉘어 보병들과 함께 세 방향에서 진격해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이후의 전투에 대해선 각 소대의 판단에 따라 맡기겠다는 말과 함께.
비트만의 소대는 하노마크 장갑차에 나눠탄 보병 1개 중대와 함께 진격해 들어갔다. 목적지인 발랑스까지 앞으로 3km.
"조종수, 정지."
비트만은 해치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쌍안경을 꺼내 들었다. 예상대로 영국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병 수십 명에 대전차포는 하나, 둘, 셋......총 다섯 대. 그리고 저 뒤에 있는 물체는...... 아무리 봐도 전차였다.
"저놈이 영국군의 신형 전차인 코멧인가 보군."
차체는 크롬웰과 비슷하지만 포탑 형성에서 살짝 차이가 있었다. 그래 봤자 티거 앞에서는 거기서 거기겠지만.
"오렌지 2는 탄종을 유탄에서 철갑탄으로 바꿔라. 적 전차들부터 처리한다. 오렌지 3과 4는 적 대전차포를 노려라."
-수신.
"볼, 준비됐냐?"
"명령만 내리십쇼. 이미 준비는 다 끝냈습니다."
"그럼, 가자."
강철 호랑이들은 사냥을 시작했다.
***
"보리스, 정지."
정차하기 무섭게 캐나다병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전방의 고지를 가리켰다.
"적 전차가 저기서 목격되었습니다!"
"기종은? 수는 어떻게 되지?"
"기종은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3대 이상은 보였습니다! 장갑차도 몇 대 봤고요!"
적은 최소 소대 단위 이상이라는 말이다. 기종을 모른다는 것이 애매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대에 전한다. 모두 좌우로 산개하고 적의 공격에 주의하라. 적 전차가 보이는 즉시 발포해도 좋다, 이상."
좌우로 정렬한 전차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순간, 고지 부근에서 섬광이 반짝였다.
그리고 폭음.
-뭐야, 시발!
-뻐꾸기 4가 당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대 전차 한 대가 포탑이 날아간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유폭, 완파. 생존자 없음.
"보, 보리스! 전차 잔해 뒤로 숨어!"
뒤이어 날아온 2탄에 대비해 잔해 뒤로 몸을 피하자마자 또 다른 방향에서 공격이 가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불명중이었다.
뻐꾸기 2와 3이 포탄이 날아온 방향으로 발포했지만,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인즉 포탄 두 발 다 빗나갔다는 소리다.
"대위님! 적입니다!"
"어디요?"
"제가 보고 있는, 아니, 2시 방향! 움직입니다!"
게이츠 원사와 다른 방향을 응시하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즉시 고개를 돌렸다. 고지 언저리에서 움직이고 있는 적 전차가 보였다.
책 여러 개를 쌓은 듯한 투박하게 생긴 외형에, 척 보기에도 강력해 보이는 전차포.
"타이거다!"
히틀러의 호랑이, 티거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