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5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53화
153화 아침이 오기 전에 (2)
처음 하이드리히가 먼저 접촉을 시도해왔을 때, 카나리스는 의심부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드리히가 누구인가. 금발의 짐승, SS의 브레인, 속을 알 수 없는 야심가.
장검의 밤과 수정의 밤, 소련에서의 공작, 폴란드 침공의 명분이 된 통조림 작전,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책까지 모두 하이드리히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눈부신 전과들 덕분에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신임을 받는데 성공했고, 지금은 프랑스의 총독이자 SS의 2인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를 SS로 끌어들였던 힘러조차도 하이드리히를 견제하고 있는 형편이니......
그런 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올 줄이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카나리스는 하이드리히가 자신에게 동맹을 제안해올 때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자네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독일의 안녕이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물론입니다. 아무튼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저는 제 진심을 보여드렸고, 남은 것은 각하의 선택뿐입니다."
놀랍게도, 하이드리히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러 나온 말이었다.
하이드리히가 SS에 가입하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SS에 가입한 뒤로, 하이드리히는 확실히 승승장구했다. 퇴역 중위였던 자신이 대장 계급까지 달고, 심지어 총독 직함까지 달게 되리라곤 누가 알았으리라.
하지만, 좋았던 날들도 이젠 끝이었다.
독일은 지금 멸망해가고 있다.
괴벨스는 여전히 전황이 독일에 유리하다고 국민에게 선전하고 있지만, 암만 생각이 없는 자가 봐도 지금의 상황은 도저히 유리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공습으로 수도 베를린조차 불바다가 되고, 미군과 영국군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데다, 그동안 허수아비 군대라고 깔봤던 소련군도 반격을 개시해 독일군을 밀어내고 있지 않은가.
시기의 문제일 뿐, 독일의 패망은 이미 확실시된 지 오래다. 침몰해가는 배에 끝까지 남아있을 이유가 그에겐 없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배를 바꿔 타는 법뿐. 마침 검은 오케스트라라는 아주 근사해 보이는 구명정이 있지 않은가.
어차피 저들도 말로만 독일의 미래를 위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댈 뿐, 실상은 자신들의 알량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반역을 꾸미고 있다. 그런데 자신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나?
출세를 위해 나치에 몸담았던 그가, 이제는 생존을 위해 검은 오케스트라와 손을 잡았다.
"물론 제가 히틀러와 나치스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을 위해 일해왔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독일을 멸망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어찌 계속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독일인입니다. 독일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배신자가 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베크는 능수능란한 하이드리히의 말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곤 옆자리에 앉은 카나리스를 흘끗 쳐다봤다. 하이드리히와 접촉해,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가 바로 카나리스였다.
베크의 시선을 눈치챈 카나리스가 귓속말로 말했다.
"저자와 함께한다면, 거사를 일으키기 더욱 수월해질 것입니다. SS를 통제하려면 저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고요."
"흐음, 알겠네. 자네의 판단을 믿어보지."
베크는 하이드리히가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거사를 일으키는 데 있어 하이드리히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히틀러를 암살한 후 신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독일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SS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매우 곤란해진다.
하지만, SS의 2인자인 하이드리히가 있다면? SS의 반란을 사전에 억제하거나 진압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하이드리히 외에도 여러 SS 인사들이 검은 오케스트라와 손을 잡았다. 하이드리히의 오른팔인 아르투어 네베 SS 중장과 발터 셸렌베르크 SS 대령, 베를린 경찰청장이자 SS 대장인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 백작까지.
평소 SS를 히틀러의 신임만 믿고 설치는 애송이들이라 깔보던 베크였지만, 고사리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에 SS라는 이유로 이들을 거부할 순 없었다.
일단 지금은 함께 할 수밖에.
"카나리스, 스톡홀름에서의 일은 어떻게 되었나?"
베크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군에서 퇴역한 전 육군 원수 에르빈 폰 비츨레벤이 물었다. 한 달 전 스톡홀름에서 카나리스가 수장으로 있는 아프베어(Abwehr, 방첩국) 요원들이 연합국의 밀사들과 만나 회담을 가진 일이 있었다.
"저들의 반응은 어땠나?"
카나리스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거사에 대해선 긍정적이었지만, 전후 영토 문제에 관해선 우리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카나리스의 말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히틀러와 나치스를 몰아내고 신정부를 수립하는 검은 오케스트라의 구상에 관해서 연합국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합병 인정 및 1914년의 국경 유지를 조건으로 내세운 검은 오케스트라의 주장에 관해선 절대 수용 불가라는 입장이었다. 연합국이 인정하는 독일 국경은 오직 1937년의 국경이었다.
"빌어먹을 녀석들 같으니라고. 체코와 폴란드, 러시아 영토들까지 모두 포기했는데, 이제는 프로이센의 정당한 강역까지 포기하라니......"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처칠, 그 빌어처먹을 노친네의 수작이 분명합니다!"
"진정들 하게. 아직 확실하게 결정 난 것이 아니니."
베크도 연합국의 요구가 못마땅하긴 했으나, 아쉬운 입장은 그들이지 연합국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는 히틀러를 어떻게 죽이냐는 것이니까.
"조금이라도 협상의 여지가 남아있을 때, 거사를 성공시켜야 하네. 그래야 추후 협상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이 하나라도 남아있을 테니까. 지금은 히틀러를 죽이는 방법에 관해서만 논의하도록 하세."
베크의 중재에 격양되었던 분위기는 점차 사그라들고 냉정함만이 남았다. 베크의 말대로, 조금이라도 유리한 협상을 위해선 하루빨리 히틀러를 죽이고 전쟁을 멈춰야 한다.
"하이드리히, 자네의 계획에 대해서 얘기해주게."
"알겠습니다. 자, 다들 집중해주십시오. 제 구상은 대략적으로......"
하이드리히가 자신이 직접 구상한 작전에 대해 이야기하자, 참석자들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 계획에 독일의 운명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도.
***
여름에 있을 유럽 본토 진공을 위해, 우리는 대대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조준, 쏴!"
육중한 전차포 여섯 문이 동시에 불을 뿜자, 정확히 1km 거리에 위치한 과녁판에 구멍이 뚫렸다. 소대 전 차량 모두 명중이다(뿌듯).
"명중, 다음 코스로!"
사격 다음은 바로 장애물 코스다. 곳곳에 설치된 장애물들을 피해 전차를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코스인데, 조금만 경로를 이탈해도 훈련용 지뢰가 터져 기동불능 상태에 빠지기 마련이기에 조종수들에겐 어지간히 까다로운 코스가 아닐 수 없다.
역시나, 장애물 코스로 접어들자마자 소대 전차 2대가 경로를 이탈해 지뢰를 밟고 기동불능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보리스는 능숙하게 전차를 조종해서 남들보다 빨리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잘했다, 보리스! 과연 자칭 중대 최고의 조종수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구만?"
"이 정도야 껌 아니겠습니까."
해가 진 후에도 훈련은 계속되었다. 조명탄이 어둠에 잠긴 하늘을 밝게 비추자, 보병들과 전차들이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돌격이 시작되기 무섭게 잘 위장된 진지에서 예광탄 사격이 시작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잠 잘 시간인데, 자지도 못하고......"
"쉿. 너만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해. 온다!"
좀 전의 투덜거림이 무색하게, 모의 전투가 시작되자 닉은 열심히 포탄을 장전했다. 자세며 속도며 확실히 전과 비교해서 장족의 발전을 거둔 것이 보인다.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
여름에 있을 대규모 작전에 대해 언질을 들은 터라, 다들 훈련에 임하는 자세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훈련, 보다 많은 훈련만이 실전에서 자신들을 구해주리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미 실전을 경험했으니, 훈련은 불필요하다는 의견도 분명 있겠지만 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학생이라고 해도,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한다면? 주식시장 그래프마냥 성적이 수직 낙하하기 마련. 군인들도 훈련 없이 빈둥거리기만 한다면 모처럼 몸에 익은 감들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다.
물론 병사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어쩌겠냐. 다 니들 좋으라고 하는 거니까 조금 참아야지. 그래도 아직까진 큰 불평불만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대위님, 저것 좀 보십쇼. 저게 뭡니까?"
훈련 중 쉬는 시간에, 게이츠 원사의 손가락 끝이 무언가를 가리켰다.
"아, 저거요? 아군의 신형장비 아니겠습니까?"
"신형장비인 건 알겠는데, 대관절 어디에다 써먹는 용도인지 모르겠군요. 파티에 쓰일 카펫을 까는 데 쓰이는 겁니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놀랄 겁니까?"
"농담하지 마십쇼."
"농담이 아니라 진짜인데? 물론 그 파티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샴페인과 훈제연어가 나오는 파티가 아니라 총알이 오가고 핏물이 튀는 파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요."
"?"
게이츠 원사는 생전 처음 보겠지만, 나는 자그마치 미래인 버프를 받은 덕분에 저게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단번에 알아맞힐 수 있었다.
게이츠 원사의 시선을 사로잡은 놈의 정체는 보빈전차(Bobbin tank)였다. 처칠 전차를 개조한 놈으로, 자갈밭이나 무른 진흙밭 등 전차가 기동하기 어려운 곳에 카펫을 깔아 진격이 원활해지도록 돕는 장비다.
전차가 기동하기 어려운 지형이 나타날 때마다 보빈전차로 카펫을 깔고, 후속 차량들은 카펫을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끝. 어때요, 참 쉽죠?
"저기 욕조처럼 생긴 놈은 뭐지?"
"훈련에 지친 병사들을 위한 간이 수영장이 아닐까?"
"발상은 참신한데, 틀렸어. 저놈은 니들을 위한 간이 수영장 따위가 아니라 수륙양용전차란다."
일명 DD 전차라고 불리는 수륙양용전차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전차 차체에 장착된 튜브처럼 보이는 틀은 사실 전차를 물에 뜰 수 있게 하는 부항 스크린으로, 스크린을 쫙 펼치면 욕조처럼 보여서 욕조 전차라고 불리기도 한다.
의외로 이놈을 처음으로 개발한 사람은 영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헝가리인 기술자라고 한다. 헝가리인이 만든 물건이, 헝가리의 동맹국들을 파괴하기 위해 쓰일 예정이라니, 세상일 한 번 기똥차게 돌아가는구만.
원래 세계에서도 그렇듯이, 이 세계에서도 미군들은 이 기똥찬 물건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겨우 지뢰제거전차와 DD 전차만 채용하곤, 나머지 퍼니전차들은 쓸모가 없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애들 장난감처럼 생긴 것들이 전장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소?"
"어차피 이런 것들 없어도, 제리들 때려잡는 데 아무 문제 없소."
실제로 만난 미군 장교들이 퍼니전차들을 보고서 남긴 말들이다. 나중에 피똥 싸려고 벌써부터 떡밥 뿌리는 것 좀 봐라.
멍청한 양키들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