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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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44화
144화 이탈리아의 운명 (1)
이미 이탈리아군은 아군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시러큐스 시내로 진입하자마자 우리는 이탈리아군이 쏘아대는 성대한 축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피격당했다! 탈출해라!"
"위생병!"
"지원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괴멸한 줄로만 알았던 이탈리아군 포병의 포격에 선발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뒤이어 도착한 부대들도 잇달아 적의 포격에 타격을 입었다.
시내로 통하는 길목은 전차들의 잔해와 전사자들로 가득했다.
"맙소사, 이렇게나 많이 당했다고?"
격파된 전차들의 잔해만 10대가 넘었다.
수습되지 못하고 방치된 아군의 시체는 그 몇 배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이 정신을 사납게 했다.
-적의 저항이 거세 아군의 피해가 무척 크다고 한다. 모두 단단히 주의하고 전투에 임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무어 소령의 목소리도 떨렸다. 독일군도 아니고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이렇게나 피해가 클 것이라곤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이다.
"여기는 얼룩말 1, 각 차량에 전파한다. 절대로, 절대로 혼자서 다니지 말고 무조건 보병들과 함께 움직여라, 이상."
지상전의 꽃이라 불릴 만큼 전차는 매우 강력한 병기지만, 시가전에서는 그 위력이 급감하는 것을 넘어 매우 취약해진다.
사방에 위치한 건물들 때문에 기동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할뿐더러, 전차의 특성상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기에 적의 접근을 제때 눈치채기 어렵다.
체첸 전쟁에서도 러시아군이 보병들 없이 달랑 전차들만 시가지로 보냈다가 문자 그대로 학살을 당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전에선 보병들과의 협력이 가히 필수였다.
나는 이 점을 휘하 전차장들에게 몇 번이나 주의시켰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시러큐스 내부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 어떤 주의와 당부, 마음가짐도 코앞에 닥친 재난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
-얼룩말 3이 당했다!
시러큐스 시내로 진입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아군 전차가 당했다는 소식이 무전기를 타고 들렸다.
우측에 매복하고 있던 적의 대전차포 공격에 당한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맞은 부위가 탄약고라서 그만 유폭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승무원들은 탈출할 틈도 없이 그대로 화염에 휩싸여 녹아내리고 말았다.
뒤늦게 보병들이 수류탄을 던져 숨어있던 대전차포를 제압했지만 이미 소대에 전차 한 대라는 결원이 발생한 뒤였다.
심란한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곧바로 적의 다음 공격이 가해졌다.
"우왁!"
건물 옥상에 자리 잡은 적이 기관총을 발사하자, 주변에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적이 영점을 잘못 잡았기에 망정이지 나를 표적으로 삼았다면 벌집이 되었을 터였다.
"해치 닫으십쇼, 대위님! 위험합니다!"
게이츠 원사의 고함 섞인 충고에 나는 서둘러 해치를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관측창에 의존해서 주위를 관찰해야 하는데, 시야에 사각이 많아 위험했다.
그렇다고 해치를 열자니 곧바로 총알이 쏟아지는 판국이라 보병들이 사주경계를 잘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원사, 11시 방향에 적입니다. 벽돌집 위, 조준할 수 있겠어요?"
조준경을 들여다보던 게이츠 원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 위치에선 힘듭니다. 5m 정도 뒤로 가야겠는데요."
나는 관측창을 들여다봤다.
다행히 뒤에 아군 보병들은 없었다.
"보리스, 뒤로 후진해. 내가 멈추라면 멈춰."
"알겠습니다."
전차를 후진시키자 목표물을 조준할 수 있게 된 게이츠 원사가 탄성을 질렀다.
"정지. 조준!"
"조준 끝!"
"쏴!"
적의 기관총좌를 유탄으로 날려버리자 총탄을 피해 좌우로 산개했던 보병들이 기어 나와 전진을 재개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또 장애물에 막히고 말았다.
"정면에 바리케이드입니다."
모래주머니와 콘크리트 덩어리 등 잡다한 쓰레기들을 쌓아서 만든 바리케이드가 길을 막고 있었다.
유탄을 쏘아 겨우 전차가 지나갈 만한 통로를 만들어내자, 이번에는 전차가 나타나 방해를 했다.
"주의, 정면에 적 전차!"
미처 반응할 섀도 없이 적이 먼저 불을 뿜었지만, 천만다행히도 장갑이 버텨주었다.
적이 허접한 M14/41이었기에 망정이지, 3호 전차나 4호 전차였더라면 되려 이쪽이 당했을 것이다.
"닉, 철갑탄 장전!"
"장전!"
공격에 실패한 M14/41이 후진했지만, 놈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기 전에 게이츠 원사가 전면에 철갑탄을 박아넣었다. 격파.
"좋~아, 다음!"
탈출하는 적 전차병들을 기관총으로 쓸어버리는데, 좌측에서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화염병이 포탑 측면을 맞추자 불이 팍 터지면서 전차를 호위하던 보병들이 물러섰다.
보병들이 서둘러 스텐을 발사했지만 이미 화염병을 던진 당사자는 잔해 뒤로 몸을 숨긴 뒤였다.
화염병에 이어 대전차 수류탄이 날아들었고, 보병 5명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이 개새끼들이!"
제레미가 이를 갈며 기관총을 쏘아댔지만, 곧바로 반대편에서 적군이 나타나 공격을 가했다.
살아남은 보병들은 황급히 전차 뒤로 피신했다.
"닉, 유탄 장전!"
유탄 몇 발과 기관총 사격으로 적들을 간신히 쫓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얼룩말 2의 전차장이 저격으로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수류탄 공격으로 인해 주포까지 망가졌다고 한다.
나는 임시 전차장으로 임명된 얼룩말 2의 포수에게 퇴각하여 정비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지시를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나 역시 퇴각해야만 했다.
-여기는 당나귀, 얼룩말은 나와라.
"얼룩말 1 수신. 무슨 일인가?"
-얼룩말은 지금 즉시 보병들과 함께 현 위치에서 물러서라. 아군 함대의 포격이 있을 예정이다.
"수신."
보병들을 데리고 물러서자마자 아군 함대의 함포 공격이 시내를 강타했다.
육중한 함포 탄이 떨어질 때마다 땅이 흔들거렸고, 헤드셋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귀가 얼얼할 정도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
함대의 지원이 끝난 직후, 다시 전진 명령이 떨어졌다.
멀쩡하던 건물들도 함포 사격이 지나간 뒤에는 거의 형체만 겨우 남아있는 정도가 됐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쓰레기 매립지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함포 공격에도 불구하고 시내에는 여전히 이탈리아군 잔당들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가공할 포격으로 인해, 적들은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아군의 공격이 재개되자, 적들은 그대로 밀려났다.
시내 중심부까지 진격한 후에야 휴식이 허가되었다.
"마치 공동묘지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군."
전차에서 내려 바라본 주변의 모습은 딱 공동묘지 그 자체였다.
격렬한 전투로 인해 몇 채의 건물들을 제외하면 멀쩡한 건물이 하나도 없는 데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도처에 널린 잔해들 때문에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하게 풍겼다.
"지옥이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군인인 게이츠 원사조차 이토록 참혹한 광경은 처음 보는지 혀를 내둘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싸우는 상대가 독일군이 아니라 이탈리아군이라는 점이죠. 솔직히 저는 이놈들이 이렇게나 격렬하게 저항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요."
"동감입니다, 대위님. 저도 파스타 녀석들이 제리들처럼 싸우리라곤 몰랐어요. 제리 녀석들한테 수혈이라도 받았나."
오랫동안 전선에서 싸워온 우리들조차 충격인데, 실전이 처음인 신병들이 느꼈을 충격은 어느 정도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역시나, 하나같이 얼굴이 퀭한 게 마치 악몽이라도 꾼 듯한 모습들이다.
"다들 어때? 첫 전투는. 생각보다 할 만한 것 같냐?"
분위기를 좀 풀어보려고 가볍게 농담을 건넸지만 역효과였다.
제레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집에 가고 싶습니다."
전투 전에 이탈리아군은 별거 아니니 긴장 풀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괜히 내가 민망할 지경이다.
그 이탈리아군이 이렇게나 격렬하게 싸우리라곤 누가 예상이나 했겠냐만은.
"너희들, 배고프냐?"
셋 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게이츠 원사는 단호했다.
"배 안 고파도 일단은 뭘 좀 먹어라. 나중에 가면 기운이 없어서 싸우질 못하니까. 하다못해 차라도 마셔."
지금 당장은 배가 고프지 않아도, 나중에 가면은 기력이 없어져 곤란해진다는 사실을 게이츠 원사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 비스킷이라도 좀 먹어라. 전투 중에 배고파서 쓰러지는 일은 피해야 하니까."
나까지 나서서 게이츠 원사를 거들자, 셋 다 식량 꾸러미를 꺼내 비스킷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그냥 꾸역꾸역 먹는 모습들이지만, 억지로라도 먹어서 원기를 보충하는 편이 굶는 것보다 훨씬 좋다.
"원래 첫 전투는 다 힘든 법이야. 나도 그랬으니까. 내 동기는 너무 무서워서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까지 했는데, 너희는 그나마 양반이야. 적어도 바지에 오줌은 안 쌌잖아."
경험이 풍부한 게이츠 원사는 어떤 말을 해야 신병들의 긴장을 풀 수 있는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대위님도 얘기해주십쇼. 그러고 보니 대위님은 프랑스가 첫 실전 아니셨습니까?"
"아~ 그렇죠. 그땐 소위였는데, 어찌나 떨리던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
"시러큐스에 진입한 영국군의 피해가 예상외로 크다고 하오."
"미군도 진격에 어려움을 겪는 중이라고 합니다."
"흠, 아군이 예상보다 훨씬 더 잘 싸워주는군."
약체로 평가받으며 사실상의 동네북으로 인식되던 이탈리아군이 예상외의 분투를 펼쳐 적군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전황은 여전히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 상실에, 이제는 이탈리아 본토까지 적군의 침입을 허용하고 말았다.
당연히 국민의 사기는 최악이고, 그동안 지하로 숨었던 공산주의자들과 반전주의자들까지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더욱 최악은 그들의 목소리에 동조하는 국민의 수가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두체는 요즘 어떻소이까?"
"여전히 모르핀과 브랜디에 빠져 계십니다."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외무장관인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장인은 반쯤 정신이 나간 허풍선이가 되어 있었다.
치아노의 아내이자 딸인 에다가 눈물을 흘리며 그만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쳐도 무솔리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체는 이제 끝인 것 같구려."
"그렇소이다."
무솔리니는 이제 끝났다.
한때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탈리아를 휘어잡았던 지도자는 온데간데없고, 얼빠진 중늙은이만 있을 뿐.
그런 작자에게 더 이상 이 나라의 운명을 맞길 수 없는 노릇이다.
"영국과 미국의 반응은 어떤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나?"
"몇 가지 사항에선 난항을 겪긴 했지만,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하기야 본인들도 이곳 로마까지 오려면은 여간 골치가 아픈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죠."
"아무려면 좋네. 저들의 요구가 우려되긴 하지만, 이탈리아 전역이 폐허가 되는 것보다 낫지."
치아노를 비롯한 이탈리아 수뇌부는 무솔리니는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연합국과 강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미 스위스에서 영국과 미국의 첩자들과 접촉하고, 국왕한테서 동의까지 받아낸 상황.
이제 남은 일은 실행뿐이었다.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독일군의 수가 많아지기 전에 서둘러 거사를 실행해야 합니다. 더는 꾸물거리다간 늦을 겁니다."
"맞는 말이오. 지금까지 들어온 독일군은 죄다 남부로 보내버리고, 기회를 봐서 무장 해제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연합군에게 선물로 떠넘기면, 처칠과 루스벨트가 기뻐할 거요."
덩달아 이탈리아가 짊어질 대가들도 조금은 가벼워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