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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8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8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8화

 138화 인간의 운명 (4)

 식사가 마무리된 후.

 나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묻는 처칠의 질문에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순간부터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스페인 국경을 넘기까지의 일들을 모두.

 내 얘기를 들은 처칠은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어째서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지 난 이유를 대강 알고 있었다.

 "흐음. 다 좋은데 말이네, 대위."

 "예, 각하."

 "자네를 도왔다던 프랑스인들이 그...... <붉은 수탉>이라는 공산당 조직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적이 있나?"

 "각하가 처음입니다."

 "그렇군. 이건 조금 민감한 얘기긴 한데, 자네는 우리가 소련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지? 나치 녀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배를 타긴 했지만."

 "물론입니다."

 처칠이 내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간단했다.

 나 또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미 눈치를 챘고.

 "어디 가서 공산당 놈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말게. 겨우 국민이 소련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이 일로 그 기조가 흐트러져선 안 돼. 당연한 말이지만 전쟁은 우리 대영제국의 승리로 끝난 거야.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소련이 우리의 적이 되겠지. 그런데 국민이 소련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다?"

 벌써 처칠은 전쟁 이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모든 국민이 그렇지 않겠지만, 아직도 레닌과 스탈린을 숭배하는 덜떨어진 작자들이 있어서 말일세. 국민 사이에서도 그런 기류가 퍼지는 일만큼은 피해야지. 안 그랬다간 상상도 할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날 거야."

 그는 털어내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공연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네. 잘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나도 공산주의자들한테서 도움을 받았다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1도 없다.

 그들에게서 크나큰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을 하고 있는지도 똑똑히 봤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영국인이지만, 본래 나는 지극히 평범한 한국인이다.

 그런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런 얘기를 떠들고 다니겠어?

 "겨우겨우 고국에 돌아온 영웅에게 환대는 못 할망정 너무 부담을 준 것 같군. 이해해주게나."

 처칠은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곤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리들이 자네의 환심을 사려고 여러 무기를 보여줬다면서? 그중 처음 보는 장비가 있었나?"

 처칠은 행여 내가 독일군의 신형 장비를 보진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모두 전쟁터에서 봤던 것들 뿐이었습니다."

 "그런가. 하긴, 포로한테 그 귀중한 신병기를 보여줄 리가 없지."

 ......그걸 알면서 왜 물어봐?

 ***

 처칠과 만난 다음 날.

 나는 곧바로 케임브리지의 집으로 보내졌다.

 일주일간의 특별휴가증을 손에 쥐고서.

 그간 적지에서 고생한 나를 위한 작은 배려였다. 동시에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그전에 몸 좀 풀라는 상부의 은밀한 뜻이기도 했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차라리 가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케임브리지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집안의 분위기는 내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가족들은 나의 무사 귀환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곧 가족 얼굴에 진 근심을 알아차렸다. 필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기 전에, 아버지 찰스 그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이클이 죽었다."

 내가 프랑스에서 쇼생크 탈출을 찍는 동안, 마이클은 리비아 전장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이탈리아군과의 전투 중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전사 통지서와 함께 동봉된 부대 지휘관의 편지에는 마이클이 적 진지에 육탄공격을 가하다가 '영웅적'으로 전사했다고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마이클의 희생으로 나머지 중대원들이 무사 생환에 성공했다는 말도 함께.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마이클이 전혀 다른 형태로 죽었는데, 유족들을 위해 지휘관이 다른 말을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마이클이 죽었다는 것이다.

 가족들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겐 그들의 슬픔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물론, 나 역시 마이클의 죽음이 충격적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원래 내가 이들과 전혀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삶을 살던 사람이라서 가족이라는 생각보단 여전히 타인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서 그런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무수히 많은 죽음을 봐서 감정이 무뎌졌는지 모르겠다.

 마이클의 유해는 리비아 전장의 어딘가에 있었기에 텅 빈 관만 대신 땅에 매장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내가 도착한 날은 장례식을 치른 다음 날이었고.

 "아무튼 네가 무사히 살아 돌아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홍차를 마시며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원래도 나이가 제법 있는 분인데, 못 보던 사이 10년은 더 나이가 든 것처럼 보였다.

 분명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이겠지.

 "처음 네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앞이 어두컴컴해졌지. 저 독일 놈들이 네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네가 워낙 유명인이라서 말이다. 혹시 독일 놈들이 네게 무슨 짓을 하지 않던?"

 "아뇨.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냐. 알겠다. 피곤할 테니 들어가서 자렴."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을 말짱해서 눈을 감아도 부자연스러운 느낌만 들 뿐, 잠은 오지 않았다.

 잠들기 위해 몸을 뒤척거리다가 도저히 안 돼서 할 수 없이 책이나 읽으려고 의자에 앉았다.

 책장에 꽂힌 책 중에는 내가 아는 책들도 여럿 있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부터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전집,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등등.

 나는 코난 도일이 쓴 <잃어버린 세계>를 꺼냈다. 그런데 10여 페이지도 잃지 못하고 도중에 덮어버렸다.

 책이 지루해서 덮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막상 책을 읽으려니 졸음이 밀려와서랄까.

 그러다가 문득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빙의 이전의 아서 그레이와 마이클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마이클은 웃고 있었지만, 진짜 아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사진 속 아서가 내가 되고, 웃고 있던 마이클은 리비아의 흙이 되었으니.

 원래대로라면 나는 마이클과 생판 모르는 사이였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이곳에 떨어졌고, 그 결과 평생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냈을 마이클과 어쩌다 가족이 되었다.

 나는 문득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지 않은 원래의 역사에선 진짜 아서와 마이클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아서는 여전히 폐급 장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은?

 원래 역사에서도 리비아에서 죽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이클이 군에 입대한 것도 하루아침에 집안의 망나니에서 전쟁영웅이 된 나를 보고 감명을 받아서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내가 빙의하지 않아 진짜 아서가 계속 망나니로 남았더라면, 마이클이 입대해서 전장에서 죽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뭔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달라진 것으로 누군가의 운명도 함께 바뀌다니. 이게 바로 나비효과란 말인가.

 ***

 휴가가 끝나 복귀하기 전까지 나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덕분인지, 떠날 때에는 그나마 가족들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언제까지 슬픔에 잠겨 있을 수는 없는 법.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군에 복귀한 나는 그간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했다.

 "그레이 대위!"

 브랜슨 대령은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함께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는데 이로써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넨 정말 행운아야. 우리 모두 틀림없이 자네가 죽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또 며칠 뒤엔 탈출했다는 소리가 들리지 뭔가. 이쯤 되면 자네가 마술이라도 쓰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라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말을 통해 이들이 내 생환을 진심으로 반가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향에서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이런 환대를 받자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대대장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저는 중간에 포로가 되어서 나중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방법이 없었거든요. 제가 포로로 잡힌 다음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이고, 말도 말게나. 나도 하마터면 죽을뻔했으니까.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상륙하려고 하는데, 적 포대의 공격이 너무 거세서 이대로 가다간 상륙정이 침몰할 판이었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서 공군의 추가 지원을 기다리는데, 무전으로 현장 상황에 대해서 보고받았다네. 개판이 따로 없더군. 거기다 자네가 전사했다는 소식까지 들리면서 부대 분위기는 문자 그대로 곤두박질쳤고."

 당시 상황을 실감 나게 묘사하는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자네가 병사들 얼굴을 봤어야 했어. 모두들 산 송장들 같았다니까? 마침 상부에서 작전 중지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나도 다른 이들과 같은 꼴이 되었을걸세."

 무어 소령도 타고 있던 전차가 피격되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다행이었다.

 부상을 입은 탓에 그는 해변에서 대기하던 나룻배에 태워져 상륙정으로 후송될 수 있었으니까.

 "아, 게이츠 원사! 살아있었네요?"

 "예, 대위님. 저 멀쩡합니다. 대위님도 살아남으셨군요."

 게이츠 원사의 경우, 전차는 피격되지 않았지만 탄약이 바닥나고, 설상가상으로 장애물들 때문에 퇴각할 수 없어지자 하는 수 없이 전차를 자폭시켰다.

 해안으로 퇴각한 독일군이 쳐들어오자 그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악착같이 싸우다가 간발의 차이로 상륙정에 올랐다.

 이번 작전으로 대대는 보유 중인 전차 상당수를 상실하고 말았고 대대원의 8할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전멸을 넘어 괴멸에 가까운 피해 속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가히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현재 대대는 재편성 중일세. 새로 대대를 꾸릴 병사들과 장교들을 전부 새로 들여와야 해서 업무가 이만저만이 아냐. 물론 자네도 자네 나름대로 일이 많겠지만, 여튼 수고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부대 재편성으로 환성 대신 비명을 지르는 동안, 나는 내가 할 일을 했다.

 무슨 일이냐고?

 생각해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이쯤 돼서 눈치챘겠지만, 이번에도 나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거철 정치인들처럼 유세를 했다.

 신문과 라디오에선 온통 내 얘기뿐이었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전쟁영웅이 조국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런 진귀한 소재를 가만 놔두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전쟁에 지친 대중들은 늘 칙칙한 소식에서 벗어날 새로운 소식, 특히 전쟁영웅에 열광했다.

 정부도 마침 디에프 참사를 대중들의 기억에서 지우길 원해 나를 과도할 정도로 밀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번에도 전국 각지를 돌며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자들의 취재를 받았다.

 물론, 처칠의 신신당부대로 어쩌다 탈출에 성공했냐는 질문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도움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친절한 프랑스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만 얘기했을 뿐.

 내 탈출에 가장 큰 도움을 줬던 알렉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래 세상일은 냉정한 법이니까.

 정신없이 행사에 불려 다니다 보니 어느새 10월이 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서늘한 가을이 시작될 무렵, 연합군은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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