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7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37화
137화 인간의 운명 (3)
보르도에서 스페인 국경까지는 하루가 조금 넘게 걸렸다.
알렉은 4시간에 한 번씩 정차했다.
행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을 피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길에서만 멈췄다.
그가 볼일을 보는 동안 나도 트럭에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몸을 풀었다. 겸사겸사 볼일도 보고.
누운 상태에서 볼일을 보려니 뭔가 많이 불편해서 말이지.
스페인 국경에 도달하기까지 검문은 총 3번 정도 있었다.
두 번은 말소리가 조금 들리고 바로 차가 출발할 걸로 볼 때 단순히 신분증과 통행증만 확인하고 그냥 보내준 듯싶었다.
하지만 한 번은 독일군이 군견을 대동한 채 직접 짐칸에 들어와 상자들의 문을 열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군견이 짖는 소리와 상자를 여닫는 소리를 들었을 땐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앞이 캄캄해졌다.
기적적으로, 독일군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숨은 상자가 맨 안쪽에 위치한 것도 있거니와 다른 상자들은 모두 위스키와 맥주가 실려 있었기에 독일군의 의심을 피했던 것이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을 땐 트럭에서 내려서 알렉이 건넨 빵을 먹었다.
근데 갑자기 뒤편에서 불빛이 보이면서 차량이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독일군이군. 얼른 숨으시오!"
나는 빵을 냅두고 황급히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퀴벨바겐에서 내린 헌병 셋이 알렉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알렉은 유창한 독일어로 그들을 상대했다.
독일어를 몰랐기에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알 방법이 없었지만,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선 심각한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잠시 후 독일군은 다시 길을 떠났고 불빛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알렉은 내게 나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런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뭐 하는 중이냐고 묻더군. 나는 잘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지. 그러자 본인들은 인근 마을에 여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하더구만."
그렇게 우리는 갓길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날이 밝아올 무렵, 알렉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어느새 스페인 국경까지 온 것이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트럭은 스페인 국경을 넘을 것이고, 나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된다.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떨렸다.
"Ausweis, bitte(신분증 주시오)."
"Hier sind Sie ja(여기 있소이다)."
"Was ist in dem LKW?(트럭 안에는 뭐가 있소?)"
"Alkohol(술)."
독일군 몇 명이 짐칸에 올라타는 것이 느껴졌다.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하는 소리도 들렸다.
알렉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독일군은 차량에서 내렸다.
차단기가 올라가고, 멈춰 있던 트럭의 바퀴가 다시 굴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스페인에 도착한 것이다.
***
"자, 이제 내려도 되오, 대위 양반."
줄곧 어두컴컴한 상자 안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몸이 찌뿌둥했다. 거기다 용변을 본 상자에서 올라온 냄새가 몸에 밴 탓에 며칠 동안 씻지 못한 노숙자처럼 몸에선 악취가 진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나를 이곳까지 무사히 데려와 준 은인과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악수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어요."
"알면 됐수다, 대위 양반. 영국에 가면 우리들 사정 좀 잘 얘기해주쇼. 나는 원래 거래 일 때문에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수다."
알렉은 마지막으로 내게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도노스티아에는 세계 각국의 배들이 정박해 있는데, 대부분 독일 배들이지만 드물게 영국이나 미국 배도 있다고 한다.
그들을 만나 도움을 청하면 나를 알아서 영국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알렉과 헤어진 후, 나는 도노스티아를 향해 걸었다.
지금은 아직 낮이니 열심히 걷는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도노스티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고 배도 고팠지만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처칠은 평소 자신이 즐겨 피우는 시가를 피우며 <더 타임스>를 읽고 있었다.
신문은 최근 영국 전역을 강타하기 시작한 독일의 신병기 V2 로켓에 대한 기사로 가득했다.
이 V2라는 놈은 이전의 V1보다 더 진보된 무기로, 대공포나 전투기로 요격이 가능한 V1과 차원이 다른 속도 때문에 요격이 불가능했다.
공군을 동원해 프랑스에 있는 V2 기지들을 집중적으로 폭격했지만, 지독한 독일 놈들은 악착같이 V2를 생산해 영국으로 날려 보내는 중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명중률이 그리 높지 않아 피해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것 정도였다.
그래도 녀석의 위험성을 무시할 수 없는바, 처칠은 해리스 대장에게 명령하여 V2 로켓 생산공장을 최우선 폭격 대상으로 지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육군에선 전차와 야포 생산공장을 폭격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입에 거품을 물며 난리 치겠지만, 후방의 국민들이 V2로 인해 입는 피해가 늘어나면 자연스레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질 테니 다소 비효율적이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문에는 동부전선 소식도 짤막하게나마 실려 있었다.
레닌그라드는 현재 포위당하기 일보 직전이고, 모스크바도 현재 소개령이 내려져 노약자와 아이들, 환자들은 도시 외곽으로 대피 중이었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에서 수집해서 보내온 정보들에 따르면 소련군은 이미 모스크바를 방어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독일군이 모스크바까지 밀고 들어온다고 해도, 이를 돌파하려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뒤따를 것이라고 하니 하켄크로이츠가 크렘린궁에 걸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소련이 밉기는 하지만 그치들이 나치에게 무너지면 곤란해지는 것은 이쪽이니 말이지.
신문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처칠은 한 기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디에프의 비극, 피할 수 없는 재난이었나 아니면 무능이 만들어낸 재앙이었나'.
빌어 처먹을, 언론에 입단속 시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디에프 얘기라니. 환장하겠구만.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디에프 상륙전의 처참한 실패 소식은 영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언론은 이번에도 정부가 무능해서 애꿎은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고, 시민들은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이번 작전으로 독일군의 방어체계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는 정부의 발표를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처칠을 열렬히 추종하던 사람들조차도 정부의 발표가 새빨간 거짓말이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반응이 하도 거세자, 처칠은 시간이 흐르면 잠잠해진다는 생각으로 당분간은 몸을 사렸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아직도 신문을 펼치면 그놈의 디에프 얘기가 나오다니. 질리지도 않나?
"이러다가 디에프의 디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겠군."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십자말풀이를 하려던 처칠은 요란한 노크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각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관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오른 것을 본 처칠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아니,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그것부터 말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하. 일단은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이라는 말에 처칠은 반색하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길래? 설마 히틀러가 죽기라도 했나?"
"어...... 그 정도로 큰일은 아닙니다. 다소 사소한 소식입니다만."
"그래? 그럼 내가 알 필요가 있을까?"
사소한 소식이라는 말에 처칠은 김이 팍 식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린 소식은 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서 그레이 대위가 살아서 탈주에 성공했습니다. 현재 그는 스페인의 도노스티아에 있다고 합니다."
***
알렉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도노스티아에 도착한 나는 영국이나 미국 배가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안고 무작정 항구로 향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영국인 선원들과 만날 수 있었다.
도노스티아에는 영국 국적의 배가 없었고 스웨덴 국적의 화물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런데 그 배의 선원 중에 영국인들이 있었고, 그들과 만난 나는 본국에 내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그 뒤론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본국에 내 소식을 전달하고 이틀 뒤, 마드리드에 있는 영국 대사관에서 직접 나를 위해 차를 보내왔다.
"가끔씩 재수 없이 스페인 군경에게 체포된 포로들이 도로 송환되는 일이 있거든요."
날 데리러 온 대사관의 대위가 한 말이었다.
역사에서도 많은 연합군 포로들과 레지스탕스들이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도주했지만, 스페인군과 경찰에 체포된 몇몇은 독일의 송환 요구에 따라 도로 독일군에게 인계되기도 했다.
"지금 영국은 난리가 났습니다. 대위님 소식으로요. 자, 갈 길이 머니 얼른 타시죠!"
먼저 마드리드의 영국 대사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대사관의 모든 직원이 나와 나를 열렬하게 환영해줬다.
나더러 불명의 영웅이다나?
"정말 대단한 일이야! 기어코 스페인까지 탈출해오다니,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구만!"
다음날 나는 배편으로 영국에 보내졌다.
플리머스에 도착했을 때, 낯익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 대위!"
"초, 총리 각하!"
처칠이 직접 항구에 마중을 나왔다.
내가 배에서 내리자, 처칠은 성큼성큼 다가가 두 팔을 벌려 꽉 안아주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주 세게.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네! 자네는 신의 가호를 받는 것이 틀림없어!"
"과찬이십니다."
기자들은 내가 처칠과 포옹하는 장면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굳이 나를 항구까지 마중 나온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겠지.
원래 이 양반이 쇼맨십으로 유명한 양반이라 이젠 별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처칠답다고 할까.
"아서 그레이 대위님? 질문 좀 해도 될까요?"
"<데일리 미러>의 존 커트입니다! 어떻게 탈출에 성공하셨나요?"
"현재 심정은 어떠십니까?"
"자, 자. 바쁜 몸이니 질문은 나중에 받도록 하죠."
먹이를 발견한 하이어나 떼처럼 몰려드는 기자들을 군인들과 경호원들이 제지하는 가운데, 처칠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차로 데려갔다.
문이 닫히자 처칠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자네가 스페인으로 탈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놀랐네.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갑군.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각하."
"그렇잖아도 자네와 할 얘기가 많다네. 우선 배부터 먼저 채우도록 하지.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각하와 함께하는 식사라면 뭐든지 다 괜찮습니다."
내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처칠은 입꼬리를 좌우로 당겼다.
"젊은 친구가 예의도 바르구만. 기자들도 자네의 반만 닮으면 좋으려만. 자, 얼른 가자고. 적지에서 돌아온 영웅이 굶어야 하겠나!"
솔직하게 말해서 배는 고프지 않다.
되려 그 반대로, 지금 배가 몹~시 부르다.
오는 길에 배에서 머핀이니 샌드위치, 계란, 햄 같은 것들을 잔뜩 줘서 말이지.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먹을걸.
***
"몸은 좀 어때요, 여보?"
"멀쩡해. 그러니 걱정 마, 리나."
그 말대로 하이드리히의 건강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다.
이제는 그 누구의 부축 없이 걸어다닐 수 있었고, 혼자서 밤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충분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들의 권고로 자택에서 요양 중이었다.
가끔 파편이 박힌 곳이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 통증은 무시할 만했다.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직후, 하이드리히는 체코 전역에서 대대적인 보복을 자행했다.
수감 중이던 정치범들은 모두 총살되었고, 체코 각지에서 불심검문과 체포, 처형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체포되었으며 점령 당국에 협조를 거부하거나 협력을 꺼리는 이들 또한 뒤통수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번 암살 시도는 오히려 하이드리히의 권위만 더욱 올려준 셈이었다.
체코인들은 하이드리히의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 납작 엎드렸고, 독일군의 보복을 피하려고 서로를 밀고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암살 시도에서 살아난 것도, 총통이 그를 프랑스 파리로 보내 프랑스인들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도 그를 기쁘게 해주지 못했다.
사실, 하이드리히는 최근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당신은 아이들과 함께 놀아줘. 나는 이 일만 다 처리하고 갈게."
"알겠어요."
아내 리나가 떠나자 하이드리히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책상 위에 놓인 지구본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벽에 걸린 세계지도에서 현재 독일군의 위치를 짚어봤다.
방송에서 독일군이 진격 중이라며, 내일이라도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 있을 것처럼 큰소리치고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소련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의 진격은 점점 둔화하는 중이었고, 북아프리카 전황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낙엽이 지기 전까지 아프리카는 완전히 연합군의 차지가 될 것이다.
공습은 또 어떤가?
날마다 독일의 수많은 도시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타오르고, 언론과 당에서 떠들어대는 V1, V2 로켓은 냉정하게 말해서 영국에게 그리 큰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전쟁, 정말로 이길 수 있을까?
총통은 절대로 1918년을 되풀이하지 않겠노라고 공언했지만, 전황이 돌아가는 꼴은 지난 대전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금방이라도 점령할 줄 알았던 파리, 뜻밖의 반격과 지루한 소모전, 민중의 봉기, 동맹국들의 이탈과 항복, 그리고 패전.
독일이 이전과 같은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면, 그 고리를 중간에 끊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고리를 끊는 것은 누가 되어야 할까?
하이드리히는 시선을 돌려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 비친 그는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