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8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8화
118화 여우, 사자를 물다 (1)
"음? 제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예, 각하. 현재 정찰기가 찍은 사진을 분석한 결과, 독일군 진영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때우던 몽고메리에게 부관이 심각한 얼굴로 몇 장의 사진과 보고서를 내밀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몽고메리는 이내 더 읽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보고서를 내려놨다.
"각하?"
"흥, 아무래도 이전에 제리들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 때문에 다들 겁에 질려 있구만."
몽고메리는 웃기지도 않는 듯 코웃음을 쳤다.
"독일군은 누가 봐도 열세야. 지금 방어에도 급급한 놈들이 역습을 가해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각하, 독일군은 이전에도 역습을 시도했습니다만......."
"그러니까 놈들이 역습을 해올 일이 없다는 걸세."
"......?"
"자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게나. 지금보다 더 여유가 있던 시절에도 공격을 가했다가 무참히 실패했는데, 그때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지금 다시 공격을 가한다고? 사관후보생도 그런 멍청하고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아! 상대는 독일군, 그것도 그 유명한 롬멜이지. 그 작자가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겠나?"
몽고메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병력이 더 많고, 장비도 많을 적에 가한 공격도 격퇴당했는데, 그보다 약화한 전력으로 기습을 시도한다?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어서 공격을 늦추려는 놈들의 얄팍한 술수에 불과해. 우린 놈들의 장난 따윈 무시하고, 우리 할 일만 하면 돼."
"예, 알겠습니다."
사흘 뒤, 영국군은 남부의 미군과 동시에 대공세를 가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튀니스까지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독일군의 기만책에 속아 예정된 공세를 취소한다면, 오히려 독일군만 도와주는 꼴이 된다.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지.
몽고메리는 이미 자신이 롬멜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간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롬멜보다 더 유리한 고지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롬멜이 몽고메리의 계산대로 행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
"크라우츠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 같다고?"
"그렇습니다, 각하."
전선 시찰을 끝내고 늦은 점심을 먹던 패튼은 부관이 건넨 사진과 보고서를 냉큼 챙겨다가 요리조리 뜯고 맛보기 시작했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기세로 보고서를 읽던 패튼이 내린 결론은, 그의 라이벌이 내린 결론과는 사뭇 달랐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크라우츠들이 정말로 수작질을 할 것 같나?"
"확신할 순 없습니다만, 이제까지 독일군은 여러 면에서 기존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따라서 마냥 무시할 순 없는 징후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 독일 놈들은 늘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지. 마치 우리를 비웃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난 아냐."
손에서 보고서를 내려놓은 패튼은 두툼하게 썬 베이컨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영국 놈들은? 뭐라고 생각하는 것 같든?"
"각하, 외람되지만 단어 선택에 조금 주의를 기울이시는 편이......."
"시끄럽고, 영국 신사 나리들은 어떻게 판단하는 것 같냐고."
부관의 주의를 가뿐하게 무시하며 패튼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영국군은...... 독일군의 기만이라고 판단했답니다."
"이유는?"
"예전에도 기습을 시도했다 처참하게 실패한 독일군이, 더 열악한 상태로 공격을 가할 리가 없다는 이유랍니다."
"신사 나리들답구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니까 됭케르크에서 그런 일이 터졌지."
패튼은 동맹군의 안일한 인식을 비웃었다.
사실 그도 영국군이 딱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영국군은 이제까지 많은 승리를 거둬서인지 너무 자만하고 있었다.
자만심 하나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패튼이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되려 남들보다 더욱 면밀하고 자세히 관찰했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독일군 장성이었다면, 패튼도 이를 기만책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 유명한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평범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그런 작자가 평범하게 기만책을 쓴다고? 사막의 여우라는 이름이 울겠다.
롬멜이 쓴 책을 몇 번이나 정독한 패튼은 롬멜에 대해서 완벽하진 않지만 대강을 알고 있었다.
그가 방어보단 공격을 더 선호한다는 것과 지금 같은 상황에선 방어전으로 일관하지 않으리란 것을.
"롬멜, 그 새끼는 틀림없이 공격해올 거야. 애초에 방어 대신 공격으로 전공을 세운 놈이 가만히 앉아만 있을 리가 없지."
패튼은 불에 잘 익도록 칼집을 낸 소시지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누런 이가 소시지를 물어뜯어 조각을 내자 잇몸 사이로 누런 육즙이 흘러내렸다.
"음, 잘 구워졌군. 자네도 좀 들겠나?"
"감사합니다만, 아직 업무가 남아있어서 힘들 것 같습니다."
"좋은 자세로군."
패튼은 소시지를 씹어 목구멍으로 넘긴 뒤, 와인으로 입안을 헹구었다.
"전군에 경계령 때려. 오늘 밤에라도 제리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거야."
"알겠습니다."
***
"잘 못 들었습니다......?"
"왜 이래 이거. 아까 전까지 멀쩡하다니, 갑자기 못 들은 척?"
"휴가......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양반아. 휴가라고."
중령 계급의 군의관 입에서 휴가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려고 노력했다.
군의관들의 진심 어린 치료 덕분에 내 몸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이제는 고형물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뻣뻣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팔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다.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어 원대로 복귀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웬걸.
난데없이 내게 휴가를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자그마치 3주씩이나!
알고 보니 중상을 입었다가 회복된 병사는 사기 진작 차원에서 휴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치명상이어야 한다는 심히 빡빡한 기준이 문제지만, 마침 내가 그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된 덕분에 내겐 예정에도 없던 3주간의 휴가가 생겼다. 만세!
"어이구?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하는구만? 하긴, 저승문을 두드리고도 살아남았으니 이해하네."
"가, 감사합니다, 중령님."
"다만 잊지 말게. 이번 휴가는 꽁으로 주는 게 아니라 부상 회복을 위해 주는 것이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하는 거 보니 벌써 다 나은 것 같은데."
"허헛."
중대원들에게 조금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으니 이 정도 호사는 누릴 자격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다.
군의관의 말대로라면 이틀 뒤에 출발이라고 한다.
"원대에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부상이 악화하면 바로 취소니까 그동안 주의하게. 휴가 간다고 들떠서 날뛰다가 상처가 도로 덧나서 취소된 놈들을 숱하게 봐서 말이지. 알겠나?"
"옙!"
***
"모든 준비는 다 끝났나?"
"예, 각하."
어둠이 짙게 드리운 저녁,
사막의 여우들은 싸울 준비를 마쳤다.
얼마 남지 않은 연료와 포탄들은 모두 배분되었고, 기갑차량은 총동원되었다.
병사들도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이 이번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이번 공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영국군과 미군에게 최대한 출혈을 강요해 그들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
아무리 일이 잘 풀린다고 한들, 적들은 금방 피해를 회복할 것이고 튀니지에서 쫓겨나는 쪽은 자신들이 되리란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롬멜은 적들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더 많은 피해를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훗날, 미래의 역사가들이 한때 무적으로 알려졌던 DAK가 무력하게 쫓겨났다고 기록하는 것보다, 과거의 명성에 걸맞게 장렬하게 싸워 최후를 맞이했다고 기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독일을 위해서도, 여기에 있는 모든 개개인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자, 그럼 가볼까?"
***
"휴가......말입니까."
"옙.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슴다."
나를 면회 온 게이츠 원사에게 휴가를 가게 되었다고 알려주니 예상대로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상하게 대위님은 휴가가 잦으신 것 같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도 갔다 온 것 같은데?"
"크흐흠, 그러게나 말입니다."
게이츠 원사의 말대로, 내가 다른 이들보다 휴가가 조금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나도 할 말이 있다.
지금까지 세운 전공으로 높으신 분들을 만나러 갔다 온 거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휴가가 아니라고!
"하하하, 농담입니다. 아무튼 이거 엄청 부럽군요. 저도 집에 간 지 꽤 돼서 말입니다."
가만, 그 말대로 다른 인원이 휴가를 가는 것은 몇 번 본 적 있어도, 게이츠 원사가 휴가를 가는 장면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자기 보직상 업무가 많아서 휴가를 갈 틈이 없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원사를 보니 괜히 내가 미안해졌다.
"뭐, 일단은 알겠습니다. 대대장님과 중대장님께도 전하겠습니다. 필요한 절차랑 서류는 준비해드리고요."
"역시 게이츠 원사밖에 없습니다."
"알면 됐습니다. 이만 저는 가볼 테니, 몸 관리 잘하십쇼."
게이츠 원사가 텐트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제까지 이곳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들렸다.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였다.
"공습이다! 공습!"
"모두 대피호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도 적기가 나타나 폭탄을 떨구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공습당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여러 번 경험해본 나조차 일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합니까, 대위님?! 빨리 뛰십쇼!"
"아, 네!"
부상을 입은 것은 목과 어깨뿐이라 다리는 멀쩡했다.
서둘러 도착한 대피호에는 부상병들과 군의관, 간호사들로 가득했다.
대피호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어린 간호사는 공습을 경험하기는 이번이 처음인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기도문을 읊고 있었다.
"적기다, 쏴!"
"발사해!"
대공포병들이 적기를 향해 대공포를 쏘아대는 동안, 우리는 잠자코 방공호 안에 머물렀다.
대공포의 방사음과 적기가 투하하는 폭탄의 굉음이 울릴 때마다 고막이 쩌렁쩌렁 울렸다.
주변의 소음 때문에 나와 게이츠 원사는 서로 대화하기 위해 소리를 질러야 했다.
"아무래도 제리들이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지상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붓던 Bf109 한 대가 아군 대공포에 맞아 날개가 부러졌다.
날개가 부서진 Bf109는 곧바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만세!"
"한 놈 잡았다!"
지면에 처박힌 Bf109가 섬광과 함께 재가 된 후에도 공습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녀석들은 나타날 때처럼 갑자기 공격을 중단하고 기수를 돌렸다.
악에 받친 대공포병들이 퇴각하는 적기를 향해 열심히 대공포를 쏘아댔지만, 안타깝게도 한 대의 적기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공습이 끝난 후에도, 굉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소리는 전선 쪽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