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7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7화
117화 독수리와 용 (2)
"이걸로 얼마나 다행입니까. 자비로운 합중국이 중국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데 말입니다."
스틸웰은 장제스를 열받게 하려고 일부러 능청을 떨었다.
요즘 그는 장제스의 기분을 망치는 일에 한참 재미를 붙인 참이었다.
"그렇소. 참 다행이 아니겠소."
장제스는 이죽거리는 양키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욕망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가 분노를 억누를수록 스틸웰은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이 모든 게 다 중국인들의 복입니다. 합중국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 저로서는 참 알 수가 없군요. 안 그렇습니까?"
"미국이 없었더라도 우리는 계속 일본과 싸우고 있었을 거요. 방금 그 말은 중국 민중에 대한 모욕으로 들린다만."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오해하진 마십쇼. 그럴 뜻은 전혀 없었으니."
스틸웰은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이 웃었다.
장제스는 지금 자신에게 총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있었다면 자기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을 테니까.
장제스와 스틸웰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단순히 관계가 나쁜 것을 넘어, 거의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장제스는 미국에 군대의 고문이 되어줄 지휘관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미국은 퇴역을 앞두고 있던 육군 중장 조지프 스틸웰을 중국에 보냈다.
미 정부가 장제스에게 스틸웰을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스틸웰은 예전에 중국에 장기간 체류한 적이 있었고, 미군 장성들 중 거의 유일하게 중국어를 능통하게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커다란 실수이자 장제스에겐 불행의 시작이었다.
스틸웰은 미 육군의 몇 안 되는 중국통이었지만, 정작 그는 중국인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중국 고문으로 임명되었을 때조차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군인이었고, 명령에 따라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왔다.
둘의 관계는 시작부터 삐꺽거렸다.
스틸웰은 자신의 직함-주중 미군 총사령관, 대중원조 물자 관리통제관, 중국 전구 연합참모장 등등-과 미국 빽만 믿고 장제스에게 사사건건 간섭했고, 장제스도 오만한 스틸웰의 태도에 극도의 반감을 가졌다.
특히 스틸웰이 버마 방위에 동원한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뜯어낸 중국 정예군 10만 명을 버마에서 홀라당 날려먹자 장제스는 격노했다.
그러나 스틸웰은 반성은커녕, 중국군의 무능으로 전투에서 패했다고 언론에 떠벌이고 다니자 둘의 관계는 더더욱 악화했다.
만약 스틸웰이 중국인이었다면 장제스는 틀림없이 그를 총살대로 보냈을 터였다.
허나 장제스에겐 안타깝게도 스틸웰은 미국인이었고, 미 정부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미 정부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하는 말은 믿지 않지만 스틸웰이 하는 말은 철석같이 믿었다.
장제스는 스틸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아는 스틸웰은 더욱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드는군요."
"무슨 걱정 말이오?"
"합중국 시민들의 세금과 아량으로 마련된 귀중한 물품들이 헛되이 낭비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각하께서 아시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합중국이 중국을 위해 보내온 지원품 상당수가 중간에 빼돌려져 암시장에서 매매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부패한 장교들과 관리들이 중간에 물자를 횡령해 암시장에 내다 파는 일이 성행하고 있었다.
장제스도 몇 번 보고를 들어서 아는 일이라, 그는 물자를 횡령할 경우 무조건 총살형에 처한다고 발표까지 했고, 실제로 몇 명의 고위급 장교들과 관료들을 처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뿌리를 깊게 내린 부정부패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린 부정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소이다. 조만간 그런 일들은 모두 옛말이 될 거요."
"그렇습니까? 그보다 이 전쟁이 끝나는 게 더 빠르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새끼가?
예의라곤 쥐뿔도 찾을 수 없는 스틸웰의 말에 장제스는 그만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이곳 파티장에는 수많은 외국 귀빈들과 거물급 기자들이 있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목소리를 높일 순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당신이 걱정할 문제는 아니오. 당신은 당신 일이나 열심히 하시구려."
장제스는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조용히 대답했다.
"저는 여전히 걱정이 됩니다."
스틸웰은 장제스의 말을 비꼬듯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장제스는 이 작자가 자신을 분노케 하려고 작정한 모양이라고 확신했다.
"그럼, 걱정 잔뜩 하시구려. 나는 마음 편하게 있을 테니 말이오."
장제스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표시로 등을 돌렸다.
파티는 계속되었다.
괜히 기분을 잡친 장제스를 위해 측근들이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지만, 장제스는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했다.
반면, 스틸웰은 귀빈들과 즐겁게 인사를 나누며 파티를 즐겼다.
"아, 부인. 오랜만입니다. 그간 건강하셨는지요?"
"중장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요즘 신수가 훤해지신 것 같네요?"
"하하하, 그럴 리가요. 요즘 얼마나 힘든데요. 말은 못 하지만 누구 때문에 아주 죽을 맛입니다."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스틸웰은 거나하게 취했다.
장제스를 약 올렸다는 것에 만족한 나머지 평소보다 과음한 것이었다.
"각하,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몸 건강을 생각하셔서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스틸웰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본 부관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스틸웰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지 뭐. 내, 내가 생각해도 취한 것 같군."
"미리 밖에 차와 당번병을 대기시켜놨습니다."
파티장 밖으로 나간 스틸웰에게 부관이 부축을 위해 다가왔다.
하지만 스틸웰은 한사코 사양했다.
"이 사, 사람 왜 이래? 나, 나 혼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이서."
"하지만 각하, 조심하심이......."
"거 괜찮데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틸웰은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잔뜩 취한데다 균형까지 잃은 그는 중력에 의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가, 각하!"
***
"이 무슨 소란이야?"
술로 잡친 기분을 달래고 있던 장제스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다급한 발자국 소리를 듣곤 고개를 돌렸다.
"총통 각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설마 왜놈들의 공습이 시작된 건가?"
큰일이라는 말에 장제스는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멈추었다.
하지만 큰일은 그가 생각한 큰일이 아니었다.
"스틸웰 장군께서 방금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라고? 무슨 사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셨다고 합니다."
장제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긴 침묵 끝에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샴페인."
"예?"
"샴페인 가져와. 외부인 눈에 안 띄게 조심하고."
장제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환희와 기쁨을 누렸다.
오늘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
"이런 X발."
소식을 전해 들은 마셜은 평소 그답지 않게 쌍욕을 내뱉으며 머리를 감쌌다.
전쟁이 한창인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나다니.
전투로 인해 부상 당한 것도 아니고 술에 취해 발을 헛디뎌서라고? 환장하겠구만.
"부관."
"예."
"현재 스틸웰의 상태는 어떤가?"
"그리 좋지 않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뇌진탕이 생겼고, 갈비뼈 3개가 부러졌으며 오른팔도 골절되었습니다."
마셜의 물음에 부관 앨버트 웨드마이어 대령은 칼같이 대답했다.
"......의식은 있나?"
"왔다 갔다 한답니다."
"불쌍한 친구 같으니."
스틸웰은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마셜은 혀를 찼다.
그렇게나 성실했던 친구가 갑자기 이런 사고를 당하다니.
이제 이를 어쩐담?
"몸 상태가 그 꼴이니 업무는커녕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겠구만."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군. 스틸웰을 불러들이고, 대신 그 자리에 드럼을 집어넣을 수밖에."
휴 드럼.
본래라면 스틸웰을 대신해 주중 미군 총사령관직에 부임했을 남자였다.
하지만 드럼은 중국에 대규모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중국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고 그 결과 스틸웰이 중국으로 보내졌다.
현재 드럼은 동부 방위사령부 사령관이라는 겉보기엔 그럴싸한 한직에 있었다.
마침 대통령도 중국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로 했으니, 불만은 없으리라.
파티장에서 일어난 '작은 사고'가 훗날 중국과 아시아의 역사를 뒤바꿔놓게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영국군은 현재 엘 파스를, 미군은 캐루안을 노리고 있으며 엊그제에는 스키라와 가베스가 함락되었네."
사령부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롬멜이 담담하게 전황에 관해 설명할수록, 참석자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짙어졌다.
"이로써 튀니지의 아군은 남북으로 절단되고 말았네."
롬멜은 남부의 병력에 총력을 다해 스키라와 가베스 탈환을 지시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임무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적들에게서 도시를 탈환할 여력이 있다면 애초에 빼앗기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탈환을 명령한 것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적군의 발을 묶어놔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한 줌도 안 되는 전차들과 기력을 잃은 병사들뿐이지. 반면, 적들은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네. 병력은 물론, 야포, 전차, 항공기, 보급 등 모든 면에서."
롬멜의 구중에 남은 병력은 다 쓰러져 가는 이탈리아군과 독일군 보병들, 그리고 쥐꼬리보다 작은 양의 보급과 손에 꼽을 정도의 기갑차량들이 전부.
그런데 적들은?
펄펄 뛰는 보병 수십 만에 끝이 보이지 않는 밀가루와 고기 통조림들, 그리고 모든 병사를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트럭과 전차를 가지고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여기서의 전쟁은 졌다는 것을.
그들이 아무리 오래 버틴다고 한들, 튀니지에서 물러나는 것은 연합군이 아니라 추축군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리비아가 되겠지.
롬멜은 히틀러에게 튀니지 전역에서의 철수를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롬멜의 요청을 거칠게 끊어내며 최후까지 튀니지를 사수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으로는 전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즉시 몰타로 떠나라는 비밀 지령도 함께 내렸다.
이미 전쟁영웅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그가 포로가 되는 일은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런 히틀러의 배려조차 롬멜에게 힘을 북돋아 주진 못했다. 그저 냉혹한 현실만이 있을 뿐.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방어, 그리고 공격. 사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걸세. 단지 참호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과 들판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의 차이만 있을 뿐."
방어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한들 파도처럼 몰려오는 연합군의 대열을 막을 수 없다. 공격에 나선다고 한들 적들을 튀니지에서 몰아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느 쪽을 택해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멸뿐.
그러나 같은 종착역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에도 의견이 나뉘었다.
"방어가 옳습니다. 현 상태로는 공격은 어림도 없습니다.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을 때도 공격을 시도했다가 끝내 실패를 맛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전력으로 방어해도 끝내 적에게 돌파를 허용해 이곳까지 밀리지 않았소이까."
"그러니 더욱 방어를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시종일관 공격으로 나섰다면 우린 이미 이곳에 없었을 겁니다. 방어 태세를 굳혀 적들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하는 거야말로 조국을 하루라도 더 지키는 길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씀이오만, 그렇게 된다면 장병들의 고통만 더 커질 뿐이오. 물량이 한정된 우리로선 방어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비참하게 말라 죽을 거요. 차라리 연료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지금이야말로 전력을 휘몰아쳐 공격에 나선다면 적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거요."
"그건 너무 낙관적인 전망입니다! 공격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참호를 팔 힘조차 없는 병사들에게 어떻게 적의 기관총을 향해 전진하라고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순 없지 않소! 서서 죽으나, 앉아서 죽으나 매한가지라면 장렬하게 싸우다 죽는 것이 병사들을 위한 길이오!"
"그만! 그만!"
말다툼이 과열될 기미를 보이자 롬멜이 끼어들어 중재했다.
"어느 한쪽이 옳고, 어느 한쪽이 틀렸다고 할 수 없는 문제일세."
롬멜은 다시 침묵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상념과 고민이 휘몰아치며 맹렬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방어를 택한다고 한들, 이미 벼랑 끝까지 몰린 지금으로썬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공격에 나선다면, 적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보다 더 많은 타격을 입힐 수 있겠지만 한 줌 남은 여력까지 모두 소요되고 만다.......
과연 무엇을 택해야 할까?
롬멜이 침묵하는 동안에도, 참모들 사이에선 첨예한 의견의 대립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롬멜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자 주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졌다.
"지금 남은 병력과 물자로는 오래 버틸 수 없네. 전차를 파묻어 토치카로 쓴다고 해도, 겨우 며칠 더 전투를 끌 뿐이야. 우리에게 남은 모든 패를 방어에 올인하다고 한들, 우리보다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적들을 상대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또 얼마나 타격을 입힐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네. 방어에 올인하여 적군의 발을 묶는 것보다 공격을 가하는 것이 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당연히 공격을 택해야 하지 않겠나."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온 롬멜답게, 그가 내린 결론은 공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