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5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5화
115화 거인과 대위 (4)
"깨어났다는 소릴 듣고 내 한달음에 달려왔지. 무사한 듯 보여서 다행이구만."
드골은 바퀴를 밀며 내 침상으로 다가왔다.
휠체어에 앉았는데도 불구하고 특유의 키는 숨길 수가 없었다. 마치 전봇대와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날 구하러 온 사람이 정작 본인이 죽을 뻔했다는 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린가."
"그, 그러게 말입니다."
드골은 시종일관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영어로 말했다.
그가 영어로 말하는 게 나를 배려해서인지, 아니면 통역해줄 부관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영어를 해서 놀랐는가 보지?"
그는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본인이 먼저 말했다.
나야 본래 그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미래의 지식을 통해서였기에 그냥 그렇다고 말했다.
"예. 조금 놀랐습니다."
"명색이 한 나라의 수장인데 적어도 2개 국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한 나라의 수장이라. 드골은 벌써부터 본인이 대통령이 된 것인양 말하고 있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시대 사람들의 인식을 생각하면 다소 어이없는 말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국과 영국은 자유 프랑스를 듣보잡 취급했고, 비시 프랑스가 정통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런 분께서 저 같은 일개 대위를 다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나. 자네야말로 내 생명의 은인인데. 자네가 제때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하느님 앞에 있었을 걸세. 내 시체는 독일 놈들에게 조리돌림당하고 있었을 테고.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프랑스가 해방되면, 내가 직접 자네 목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겠네.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자네가 원한다면 각서까지 쓰겠네."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어허, 사양하지 말게! 내 목숨을 구했는데 이 정도도 못 해서야 되겠나?"
드골은 내가 자기 목숨을 구해줘서인지 과도할 정도의 친절을 베풀었다.
싫진 않았지만, 그보다는 몸이 너무 피곤해서 조용히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드골은 그냥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마침 자네 병과가 기갑 아닌가. 나도 병과가 기갑인데, 우린 아주 잘 맞을 수 있겠어, 허허."
드골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2년 전 프랑스에서 거둔 전공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다.
그는 특히, 자신이 지휘하던 제4기갑사단이 독일군의 후방을 역습해 적 사령부 코앞까지 갔던 것에 대해 열변을 늘어놓았다.
"공격 도중에 사로잡은 독일군 포로로부터, 적 사령부가 겨우 몇 km 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가슴이 너무 뛰어서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네. 전황은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독일 놈들은 만만치 않았지. 놈들은 길에 지뢰를 묻고, 곳곳에 전차와 대전차포를 배치했더군. 결국 공세는 실패하고 말았어.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아까워서 미칠 것만 같다네.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 말이야."
드골이 한 말에는 다소 과장이 섞여 있었지만, 놀랍게도 기본 뼈대 자체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드골이 지휘하는 제4기갑사단은 앞만 보고 달리느라 측면 방어에 다소 소홀했던 독일군의 약점을 정확히 캐치하여 측면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고, 그 유명한 하인츠 구데리안의 사령부로부터 불과 2km 지점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독일군은 공병들을 동원해 지뢰를 매설하고, 대전차포와 전차를 싹싹 긁어모아 전선에 배치하여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만약 드골의 공세가 성공하여 구데리안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면, 그의 말대로 전쟁의 전개 자체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도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장군님. 그때 독일군의 대처가 유연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전쟁은 끝났을 텐데 말이죠."
"그렇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 통탄스러운 일이야! 내 반격이 성공했다면, 우린 이미 1940년 크리스마스를 베를린에서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적당히 맞장구를 치자 드골은 껌뻑 죽으며 비열한 독일군과 무능하고 썩어빠진 프랑스군 수뇌부에 대해 토로했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독일 놈들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부패한 똥별들이였네. 시대는 변했는데, 그 작자들은 아직도 인식이 1차대전 시기에 머물러 있었어. 전차는 보병지원용으로 써야 한다, 무전기보단 전령이 더 필요하다, 마지노선만 있으면 된다 등등,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이러니까 독일 놈들에게 질 수밖에!"
드골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리곤 탁자에 놓인 물통을 집어 들어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나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저 컵, 내가 실수로 땅에 떨어뜨린 건데 그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참. 자네 얘기도 들은 적 있네. 전차 한 대로 적 후방에 침입해서 독일군을 쓸어버리고 포로들까지 구출했다며?"
"예, 뭐......."
"정말 훌륭해. 보통의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자네 같은 군인들이 우리 프랑스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군."
"과찬이십니다."
드골은 내가 일부러 적 후방에 잠입하여 깽판을 친 줄 알고 있었다.
사실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적과 마주친 것인데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굳이 나서서 그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필요까진 없는 듯했다.
쓸모없는 짓을 해서 상대방의 기분을 침울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 법이다. 암, 그렇고 말고.
"모든 면에서 견주어 봤을 때, 자네들 영국군은 분명 1940년의 프랑스군보다 뛰어났네. 장군들은 비교적 깨어있었고, 병사들은 용감했었으니까. 다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네."
갑자기?
"그 단점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바로 전차일세."
"전차 말입니까?"
"그래. 당시 자네들이 사용하던 전차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문제가 있었지. 어떤 전차는 기관총만 달려 있어서 전차전이 불가능했고, 제대로 된 주포가 달린 마틸다조차도 철갑탄밖에 없어서 대보병전에선 극도로 불리했지. 명색이 보병전차인데, 유탄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영국군 전차들이 문제투성이였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다. 영국군인 내가 봐도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프랑스도 분명 문제가 많았을 텐데?
2차대전 전장 한복판에 낡을 대로 낡은 르노 FT-17을 수백 대나 굴리질 않나(보조전력이긴 했지만), 기껏 완성도 높은 전차를 만들어 두고 정작 가장 중요한 무전기를 빼먹어서 수기로 지휘를 하질 않나.
따지고 보면 영국보다 문제가 많은 건 프랑스였다.
적어도 영국은 포탄이 문제였지, 프랑스처럼 무전기가 없어서 수기로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까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장군님, 프랑스 전차들엔 무전기가 없어서 서로 소통이 잘 안 되지 않았습니까?"
내가 조용히 딴죽을 걸자, 드골은 한 방 먹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의외로 그는 내가 지적한 문제에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그건 맞지. 그놈의 무전기만 있었어도......!"
드골은 이어 변명하듯 자신은 상부에 전차들에 무전기를 설치해줄 걸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무능한 상부가 자신의 제안을 모두 무시하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고 항변했다.
이 역시 사실이다. 실제로 드골은 전차에 무전기를 장착할 것을 요구했으나 프랑스군 수뇌부는 비용 문제로 이를 거절했다.
덕분에 프랑스는 전차 자체의 성능으론 독일군의 전차보다 훨씬 우수한 전차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도, 서로 소통이 잘되지 않아 각개격파 되는 망신을 당했다.
전차를 잘 만들면 뭘 하냐, 무전기가 없어서 소통이 안 되는데.
내 반격에 할 말을 잃어서일까, 그는 또 화제를 바꿨다.
다음 질문은 일개 대위에게 하는 질문이라곤 할 수 없는 문제의 것이었다.
"자네,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나?"
방금까지 전차 얘기를 하다 이번엔 전쟁이 얼마나 갈지 묻는다니.
대화의 급전환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빠르면 2년, 늦어도 3년 안에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1942년 봄이다.
역사에서 독일은 1945년 5월에, 일본은 8월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개같이 멸망했다.
비록 여러 부분에서 달라진 점이 있지만, 기본적인 전쟁의 전개 자체는 원 역사와 비슷하게 흐르고 있으니 전쟁은 늦어도 1945년에는 끝날 터였다.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장군께서도 아시겠지만 독일은 현재 영국과 미국, 소련을 상대로 전쟁 중입니다."
"'프랑스'와도 전쟁 중이지."
"아, 실례했습니다. 흠, 아무튼 이 4개국과 독일은 전쟁 중입니다. 그것도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대서양에서도요."
"그렇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주변의 모든 국가와 싸워서입니다. 당장 어느 한쪽에 전력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그들은 양면에서 전쟁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독일도 이전 정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고요. 독일이 강력한 나라이긴 하나, 그 체급은 어디까지나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체급은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적들만 늘렸으니 버틸 수 있겠습니까?"
"정론이군. 그래, 무식하게 적만 많이 만들어놨으니, 절대로 이길 수가 없지. 그러면, 앞으로의 전쟁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나?"
"음, 제 보잘것없는 지식으로 상상을 하자면, 올해나 내년 여름 전에 독일을 아프리카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에, 아마도 이탈리아에 상륙해서 이탈리아의 항복을 받아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왜 이탈리아지? 프랑스가 아니라?"
그는 프랑스인 줄 알았다가 이탈리아가 나오자 조금 빈정이 상한 듯했다.
아씨, 난 그냥 내가 아는 역사대로 말한 것밖에 없는데.
"전쟁을 빨리 끝내려면 프랑스에 곧바로 상륙해서 독일로 진격해야지, 뭣 하러 이탈리아에 간단 말인가? 이탈리아에서 베를린까지 직진하려면 거리도 거리거니와 알프스산맥도 넘어야 하는데, 족히 4년은 걸릴 걸세!"
"그, 그야 이탈리아가 독일보다 약하니까......?"
당황해서 그냥 내뱉은 말이었는데, 의외로 드골 귀엔 그럴듯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그는 갑자기 이마를 치며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시늉을 했다.
"아, 그럼 인정이지. 이탈리아가 독일보다 많이 약한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인가?"
"무, 물론 아닙니다. 이탈리아에 상륙하면, 프랑스 상륙이 그만큼 늦어지겠지만 대신 여러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흐음? 무슨 이득 말인가?"
"우선, 이탈리아를 장악함으로써 지중해 전역의 통제권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탈리아를 추축 동맹 대열에서 이탈시키면, 추축국 내부에 적잖은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가 전투력이 형편없기는 해도 엄연한 열강이니 말이죠. 이탈리아의 전선 이탈은 분명 헝가리나 루마니아 같은 독일 동맹국들에게 많은 충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동시에 독일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동맹국들의 전선 이탈을 막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할애해야 할 테고, 자연스레 프랑스 주둔 병력의 수도 감소하게 됩니다."
"호오? 계속해보게."
"예. 그렇게 독일군의 전력을 약화한 후, 프랑스에 상륙하는 겁니다. 프랑스를 수복하고, 독일 본토로 진격해 베를린을 점령,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는 겁니다."
정적.
내 말이 끝난 후에도 드골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맙소사, 예측치고는 너무 자세하군. 마치 미래를 직접 보고 와서 하는 말 같네."
그야 당연하죠. 내가 미래에서 왔으니까.
"처칠 총리가 자네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 친구라고 하더군. 과연 사실이야. 아직도 자네가 대위인 게 안타까운 일이야. 이 정도 식견이면 적어도 소령, 아니 중령은 달아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과찬이 지나치십니다. 이 나이에 대위를 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합니다."
"겸손은 그만 떨게. 자네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군의관이 들어와 진료를 봐야 한다고 말하자 드골은 겨우 물러났다.
그는 떠나기 전, 나와 악수하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슬슬 헤어져야 할 것 같군. 유쾌한 시간이었어."
"감사합니다, 장군님."
"암만 생각해도 자네는 우리 프랑스에 꼭 필요한 인재란 말이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프랑스로 오게. 내가 힘을 써서 자네가 있을 자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주겠네."
그렇게 나는 의도치 않게 프랑스의 차기 대통령이라는 어마어마한 인맥을 만들어 놓게 되었다.
남들이라면 흥분에 겨워 펄쩍 뛸 일이겠지만, 나는 그냥 조용히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