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4화
114화 거인과 대위 (3)
"여기는 호랑이, 방금 정체불명의 신호탄을 발견했다. 현재 신호탄이 발사된 지점으로 이동 중!"
서둘러 무어 소령에게 보고한 뒤, 애덤에게 속도를 더 올리라고 지시했다.
"이미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좋아, 계속 유지해!"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조금 전의 신호탄은 정찰기의 생존자가 쏘아올린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독일군이 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낮았다.
뭣하러 신호탄을 쏴서 쓸데없이 어그로를 끌겠냐? 그냥 잡아서 끌고 가면 끝인데.
"소대장님, 유탄으로 할까요, 철갑탄으로 할까요?"
"일단 유탄으로."
독일군에겐 전차가 없을 확률이 높았다.
왜냐면 전차가 부족하니까.
정찰기에 누가 탔는지도 모르는데, 뭐하러 굳이 귀중한 전차를 동원하겠는가. 기껏해야 장갑차가 전부겠지.
토마스가 신호탄을 발견한 지 10분이 지났을 무렵이다.
가도 가도 같은 광경만 보일 뿐, 정찰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한지 슬슬 불안해졌다.
부하들도 같은 생각인지 내게 자꾸 질문을 해댔다.
"저기 소대장님? 지금 저희가 바른길로 가고 있는 거 맞습니까?"
"어...... 아마도?"
분명 신호탄이 보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향이 틀어진 거라면 어쩌지?
게다가 슬슬 독일군 전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도 계산해야 했다.
조금만 더 찾아보겠다고 더 진격하다가 독일군 진영에 들어서기라도 한다면──.
"아, 저기!"
지금까지의 불안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저 멀리서 정찰기가 보였다.
꼬리에 그려진 원형 표식은 틀림없는 RAF 마크였다!
***
통증과 싸우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드골은 전차의 엔진 소리를 들었다.
그가 쏜 신호탄을 보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이 엔진 소리가 영국군의 것인지, 독일군의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몸을 움직여 창가에 다가가고자 했지만, 다리의 통증이 심해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일단 움직이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그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권총을 꺼냈다.
독일군이 나타나면 가차 없이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길 생각이었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엔진음이 점점 더 커졌다.
소리가 커질 때마다 드골의 심장도 덩달아 힘차게 뛰었다.
하늘이시여, 부디 이 어린 양을 굽어살피소서.
"모두 내려! 서둘러라!"
밖에서 들린 말소리를 들은 드골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의 귀에 닿은 소리는 영어가 분명했다.
잠시 후, 구멍으로 몇 명의 병사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이 쓴 철모는 틀림없이 영국군의 그것이었다.
"맙소사, 살아계십니까?"
"Oui(그래)."
한 병사의 질문에 드골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지금까지 들은 질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질문이었다.
***
동승한 조종사와 부관은 불행히도 목숨을 잃었지만, 드골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엉망인 된 정찰기의 상태를 볼 때, 그가 살아남은 것은 가히 천운이었다.
다만, 생존의 대가로 두 다리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리의 꺾인 각도를 보건데, 그가 아직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서둘러라! 언제 제리들이 올 줄 몰라!"
"끌어올려!"
"끼아아아아아아악─!"
병사들은 서둘러 정찰기의 잔해 안에 있던 드골을 끌어올렸다.
다리가 망가진 탓에, 드골의 입에서 자연스레 괴성이 터져 나왔다.
유감스럽게도 급하게 편성된 탓에 수색대에 위생병은 없었다.
전차 안에 구급키트가 있긴 했지만, 붕대와 연고만 달랑 있을 뿐 진통제는 한 개도 없어서 있으나 마나였다.
아무튼 드골을 구출했으니, 이제 진지로 복귀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탕!
"커흑!"
별안간 총소리가 나더니, 드골을 부축해 트럭으로 데려가던 병사 한 명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덩달아 드골도 함께 쓰러지면서 그의 입에서 또 한 번의 괴성이 튀어나왔다.
"아아아아아─!"
그는 이어 불어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지만, 불어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관계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들어도 딱히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닌 게 분명했다.
"제리들이다!"
"모두 엎드려!"
총알이 날아왔다는 것은, 근처에 독일군이 있다는 증거였다.
곧이어 총격이 가해져 2명의 병사가 고꾸라졌다.
"잭슨, 3시 방향이다! 포탑 돌려!"
총탄은 3시 방향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트럭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독일 병사들이 그다음이었다.
놈들은 엎드려 쏴 자세로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잭슨, 어때? 찾았냐?"
"잠깐만 기다려주십쇼...... 아, 찾았습니다!"
잭슨이 공축 기관총을 발사하자, 독일군의 총격이 잠시 멎었다.
나는 애덤에게 드골을 보호하기 위해 전진할 것을 지시했다.
"애덤, 앞으로 3m 전진해! 우리가 방패가 되어야 한다!"
"옙!"
전차가 방패가 되어 독일군의 총알을 죄다 튕겨내는 사이, 병사들은 서둘러 드골을 트럭에 실었다.
상황이 워낙 급하다 보니, 정상스레 태우진 못하고 냅다 던지듯이 하며 뒷칸에 실었는데. 이때도 드골은 비명을 질렀다.
"X발! 차라리 그냥 죽여!"
본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이번에는 영어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본래 임무를 완수한 병사들이 서둘러 트럭에 올랐다.
여전히 총탄은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잭슨, 쏴버려!"
미리 장전해둔 유탄을 발사해 독일군의 트럭을 날려버리자 총격이 칼로 뚝 잘라낸 것처럼 끊어졌다.
57mm 유탄을 정통으로 맞은 트럭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독일군은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하, 맛이 어떠냐! 소시지 새끼들아!"
잭슨은 불타오르는 트럭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공축 기관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록 아군 3명이 희생되었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복수한 셈이었다.
"좋아, 이제 돌아가자. 빨리 복귀해서 쉬─."
그때였다.
푸슉 소리와 함께 갑자기 왼쪽 어깨에서 불에 덴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눈을 슬쩍 돌리자, 어느새 붉게 물들어가는 군복이 보였다.
어? 뭐야? 설마 총에 맞은 건가? 내가?
아프다는 생각도 컸지만, 그보다는 황당함이 더 컸다.
다른 사람이 총에 맞는 것은 봤어도, 내가 총에 맞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번에는 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작고 날카로운 물체가 목을 파고들어 반대편으로 뚫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
유겐은 운이 좋았다.
크롬웰 전차가 쏜 포탄이 트럭에 명중하기 직전에, 그는 전우들을 지원하라는 소대장의 명령으로 트럭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엎드렸다.
그가 바닥에 엎드려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트럭이 포탄에 맞아 폭발했다.
날카로운 파편과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파편과 불똥을 뒤집어쓴 병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기관총을 맞고 도로 쓰러졌다.
"아아아─!"
"도와줘!"
순식간에 지옥이 도래했다.
파편을 맞고 피를 흘리거나,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몸을 뒹구는 병사들은 모두 유겐과 한솥밥을 먹던 전우들이었다.
전우들이 처참한 꼴이 되어 울부짖는 광경을 본 유겐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분노에 휩싸인 그는 침착하게 적을 조준했다.
그의 목표는 조금 전 포탄을 쏜 전차의 전차병이었다. 놈은 해치 밖으로 당당하게 상체를 내밀고 있었다.
조준선 안에 적 전차병이 들어오는 순간 유겐은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맞았다!"
그가 쏜 총알은 적의 왼쪽 어깨를 맞췄다.
그럼에도 적은 자세가 살짝 흐트러졌을 뿐,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유겐은 서둘러 노리쇠를 당겨 탄피를 빼냈다. 그리고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화염이 일면서 짧고 굵은 총성이 일었다.
***
어깨에 이어 이번에는 목이었다.
총알이 목을 뚫고 지나간 것이 분명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목덜미로 가져가자 바람이 통하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총에 맞았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카드로 지은 집이 바람에 흩날리듯이, 내 몸은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소대장님? 어?!"
철푸덕 소리를 듣곤 고개를 돌리던 잭슨이 목에서 피를 내뿜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눈이 접시만큼 커졌다.
어찌나 큰지, 저러다 눈알이 빠져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맙소사, 소대장님!"
"빠, 빨리 응급키트 꺼내!"
잭슨과 토마스는 나를 부축해 포탑 벽에 기대어 놓은 뒤, 서둘러 목에 난 상처를 지혈했다.
녀석들이 뭐라고 내게 말을 걸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겐 이제 대답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님! 정신......!"
"빨리......!"
이제는 귀까지 문제가 생겼는지, 녀석들이 하는 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어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빛도 없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하겠다.
일단, 나는 죽지 않았다. 아주 놀랍게도 말이지.
눈을 떴을 때, 나는 욕조만 한 크기의 석고 캐스트에 있었다.
머리와 손, 발을 제외한 모든 신체가 캐스트 안에 갇혀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군의관이 내게 정중한 태도로 정신이 드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어 내가 어제 눈을 떠서 말까지 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말이지.
"당신은 운이 좋았습니다. 목에 관통상을 입긴 했지만, 척추와 식도 같은 중요 부위는 모두 비켜나갔으니 말이에요. 총알이 좌우로 1cm만 더 비켜 맞았으면 그대로 끝이었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겨우 1cm 차이로 죽음을 비켜나갔다니. 그거 참 힘이 되는 소식인걸.
곰곰히 생각해 보니 티거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 영감님이 겪었던 일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카리우스 옹도 소련군의 매복에 걸려 몸에 총알이 여러 발 박혔지만 모두 기적적으로 중요 부위를 피해 나가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 일화를 책으로 읽을 땐 이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비슷한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기묘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던 것은,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내가 깨어난 지 벌써 3일이나 지났다는 소식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날 그대로 석고 캐스트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다음날에서야 겨우 몸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석고 캐스트에서 해방되어 병실로 돌아오자, 브랜슨 대령과 무어 소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친절한 아저씨들은 나를 보자 안도했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레이, 이 멋진 녀석! 우리 둘 다 자네가 죽은 줄 알았네."
"하여간 자네는 신의 사랑을 톡톡히 받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음, 애초에 신의 사랑을 받았다면 총에 맞을 일 자체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니, 이곳에 오지조차 않았겠지.
아무튼 두 사람은 나의 생존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나는 아직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데다, 혹시 모르니 말수를 최대한 줄이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최대한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중대장님."
이후 병실 침대에 누워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지금 누워있는 병실은 최전선에서 제법 먼 후방에 위치한 곳으로, 전쟁영웅이라고 특별대우를 받아 넓은 텐트 안에 환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누워서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내 병문안을 왔다.
"여어, 그레이 대위."
"......장군님?!"
병문안을 온 사람은 드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