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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2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4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2화

112화 거인과 대위 (1)

 

 

"모두 차렷!"

 

구령과 함께 촤라락 소리를 내며 일렬로 늘어선 병사들이 정렬했다.

 

그 앞을 영국군 장성들과 자유 프랑스 인사들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기자들과 사진사들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댔다.

 

저런 높은 양반들이 위험천만한 최전선까지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군.

 

이 시대엔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을 시찰하는 사진만큼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VIP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을 한 명 뽑으라면 단연 드골이었다.

 

일단, 키가 무척 커서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성인 남성들의 평균적인 키가 160 중후반이던 시절에 혼자 196cm나 되는 장신의 소유자였으니,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다.

 

"저기, 저 키 큰 꺽다리가 드골인가 뭔가 하는 양반입니까?"

 

사열을 위해 해치 밖으로 나온 토마스가 내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 키 크다는 소린 많이 들었는데, 실물로 보니까 장난 아니네."

 

21세기에도 키가 196cm나 되는 사람은 드문데, 20세기에는 오죽할까.

현대로 치환하면 키가 2m 20cm는 되지 않을까.

 

드골은 병사 아무에게나 말을 걸며 길을 걸어갔다. 이윽고 우리 차례가 되자, 우린 차렷 자세를 취했다.

 

드골의 양옆에는 쟁쟁한 인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맨 좌측에는 얼마 전에도 뵈었던 몽고메리가, 그리고 우측에는 필리프 르클레르 준장이 있었다(르클레르 전차의 그 르클레르 맞다).

 

2차대전 영국과 프랑스의 유명 인사 3인방이 코앞에 있다니.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만.

 

"호, 자네가 그 아서 그레이 대위군. 만나서 반갑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드골은 불어로 말했고 옆의 부관이 영어로 통역했다.

 

내가 알기로 드골은 영어를 할 줄 알지만, 본인이 프랑스인이라는 자각 때문인지 대화를 할 땐 불어를 고집했다고 한다.

 

"대위 아서 그레이!"

 

드골은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건넸다.

나도 그의 손을 잡았는데, 큰 키만큼이나 손도 크고 무척 억셌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하던데, 아주 훌륭해. 마치 젊었을 적의 나를 보는 것 같단 말이지."

"......하하하."

"자네 같은 훌륭한 군인들이 있으니 영국이 나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겠지! 그럼, 수고하게나."

 

드골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곧바로 다음 병사에게로 갔다. 그렇게 나와 드골의 짧았던 만남은 끝이 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와 다시 만날 일이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우린 생각보다 빨리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주 빨리 말이다.

 

***

 

"아주 훌륭한 병사들이군요. 기강이 잘 잡혀 있는 정예부대입니다. 이런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군이 부러울 지경입니다."

"원래 영국군은 모두가 정예부대입니다, 하하핫!"

 

드골은 자신을 사령부에 초청하며 환대해준 몽고메리를 위해 열심히 영국군을 칭찬했고, 몽고메리도 드골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칭찬을 즐겼다.

동시에 사진기자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그들의 사진은 신문에 실려 악화할 대로 악화한 영국인들의 반프랑스 감정을 무마시킬 예정이었다.

 

다음 일정은 정찰기를 타고 전선 인근을 정찰하는 것이었다.

 

참모들이 위험하다고 극구 반대했지만, 한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한 드골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기껏 기자들까지 다 불러놨는데, 바람이 심하다는 이유로 취소를 한다?

사람들 눈엔 어떻게 보이겠는가!

가히 전쟁터에 와서 보는 시늉만 한 거로 보이지 않는가.

 

오늘따라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드골은 먼지가 눈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매서운 바람에 르클레르가 불안한 말투로 말했다.

 

"장군, 기어코 강행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물론이지. 안 될 거 있나?"

"바람이 너무 강합니다. 게다가 최전선이라 위험하기도 하고요."

"맞습니다. 혹시 모르니 정찰 일정은 취소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옆에 있던 몽고메리도 르클레르를 거들었다.

 

비행기가 못 뜰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게다가 이곳은 다름 아니라 최전선이다.

언제 독일기가 날아와 굶주린 상어처럼 달려들지 모르는 곳이다.

 

하지만 드골이 누군가.

무수한 만류에도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무엇보다도, 기껏 위험한 최전선을 방문해 동맹군 병사들을 격려하는 이미지를 보여줬는데 여기서 한 발 빼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

 

"남자는 원래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않는 법입니다. 베르됭에서도 살아남은 접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죽을 리 없죠."

"뭐, 본인이 그러시다면야......."

 

몽고메리도 드골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서자, 르클레르도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드골을 태운 정찰기가 이륙하는 광경을 기자들은 열심히 셔터를 눌러 필름에 담았다.

 

그들과 거리를 두고 정찰기를 지켜보던 몽고메리는 기자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자들 앞에서 허세 부리기는."

 

드골이 떠나자 몽고메리는 이전의 표정을 잊어먹기라도 한 듯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드골이 이 날씨에도 굳이 정찰기를 타고 위험한 일정을 강행한 이유가 기자들의 시선과 카메라 때문이란 사실을 백전노장인 그는 이미 간파한 지 오래였다.

 

"안 그래도 바람도 강한데, 금방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거 아닙니까?"

 

비아냥이 담긴 부관의 말에 몽고메리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떠났던 드골이 멋쩍은 얼굴이 되어 돌아오는 광경을 생각하곤 혼자 피식 웃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볼만하겠군.

가뜩이나 기자들도 함께 있으니 참 재미나겠어.

 

"음, 그럴지도 모르겠군. 이 주변만 빙빙 돌다가 금방 오겠지. 그때까지 우린 차나 마시고 있자고."

 

연파랑색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보던 몽고메리가 한 마디 덧붙였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나?"

 

***

 

바람이 강하게 부는 탓에 기체의 진동이 심하긴 했지만, 드골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이와 반대로, 조종간을 붙잡은 조종사의 얼굴은 엉망 그 자체였다.

 

하필이면 이런 날씨에 최전선 시찰이라는 임무를 맡기다니.

그것도 저 거만한 프랑스 놈들까지 데리고.

 

드골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바람도, 이곳이 최전선이라는 사실도 아니었다. 드골의 체구에 비해 좁기 짝이 없는 정찰기의 내부였다.

 

"음, 확실히 좁긴 좁구만. 정말 좁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큰 키가 이럴 때는 크나큰 단점으로 작용했다.

 

부관이 몸을 한껏 움츠렸지만, 드골의 체격 때문에 정찰기 내부는 꽉 찬 상태였다.

몸을 반쯤 접은 상태로 있으려니 자연스레 허리가 쑤셨다.

 

"어떻게 합니까. 다시 기수를 돌릴까요?"

 

조종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드골은 잠시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기수를 돌리라고 명령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5분, 5분만 더 버티기로 하자.

 

"아니. 일단 더 가자고."

 

잠시 후, 그들은 독일군 전선 코앞까지 도달했다.

 

조종사가 여기서부턴 독일군 전선이라고 말하자, 부관은 서둘러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이제 됐네. 돌아가자고."

"알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기수를 돌린 정찰기가 영국군 전선으로 향할 때, 사격이 시작되었다.

 

별안간 기체 주변에서 폭발이 일자 기체가 심각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제리들의 대공포입니다!"

 

하필이면 이제 돌아가려는 찰나에 독일군이 공격을 가해왔다.

 

대공포 터지는 소리를 들은 드골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식은땀 한 줄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고!"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조종사는 속도를 올렸지만, 바람 탓에 기체에 좀처럼 속도가 붙질 못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기체를 뒤로 밀어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아래선 독일군이 열심히 대공포를 쏘아대는 중이고. 참 뭣 같은 순간이었다. 이래서는 완전히 함정에 빠진 꼴이나 마찬가지다.

 

겨우 바람이 그쳐 속도가 붙기 시작했을 때, 대공포탄 한 발이 우측 날개를 맞추었다.

 

날개가 떨어지진 않았지만, 큰 손상을 입은 탓에 기체가 균형을 잃고 말았다.

 

"젠장! 이 X발!"

 

조종사가 이를 악물고 조종간을 당겼지만, 이미 기체는 말을 듣지 않았다.

 

기체의 고도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낮아지고 있었다.

 

그나마 대공포의 사정권에선 벗어났지만, 기체의 추락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추락합니다! 꽉 잡으십쇼!"

 

곧 엄청난 충격이 기체 전체에 가해졌다.

 

***

 

"에휴, 프랑스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소란이래."

 

사열식 때문에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던 잭슨은 사열식이 끝나자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왠 전봇대 같은 놈이 와선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가고. 겨우 이것 때문에 잠도 설치고. 이게 뭐냐고, 진짜."

 

녀석들에겐 역사적 인물의 방문보단 잠자는 시간 1분이 더 중요했다.

 

나는 웃으며 잭슨에게 가볍게 핀잔을 줬다.

 

"잭슨, 너는 우리가 역사의 현장에 있다는 걸 너무 경시하는 것 같군."

"역사의 현장이고 나발이고 저는 관심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놈이 뭐가 잘났다고 꺼드럭거리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지가 우리 상관이라도 되나?"

 

나는 드골은 자유 프랑스군이고, 우리가 여태껏 싸워왔던 프랑스군은 비시 프랑스군이라고 설명했지만, 녀석들에겐 둘 다 똑같은 프랑스놈이었다.

 

좋은 프랑스인은 죽은 프랑스인이다, 이건가.

 

"소대장님! 소대장님!"

 

귀찮은 일도 다 지나갔으니 조용히 낮잠이나 잘까 생각하는데 토마스가 팔을 흔들며 부리나케 뛰어왔다.

 

벌써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대대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아, X발.

 

***

 

"......네? 잘 못 들었습니다?"

 

또 무슨 일로 불렀나 싶어 투덜거리면서 가는데, 초대형 뉴스를 접하게 됐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드골이 탄 정찰기가 전선에 추락? 그것도 방금?!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나도 방금 전달받은 거라 당황스럽네."

 

브랜슨 대령도 뜻밖의 소식에 여간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드골의 추락 소식보다 더욱 그를 당혹게 한 것은 사령부의 지시 사항이었다.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왔네. 지금 당장 현장으로 출동해서 생존자들을 구조할 것."

"저, 저희가 말입니까?"

 

대령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필이면 우리가 현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하더군. 제리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생존자들을 구조해야 하네. 반, 드, 시! 생존자가 없어도, 하다못해 시체라도 가지고 와야 하네. 시체가 독일군에게 넘어가면 히틀러가 기뻐하며 선전에 이용할 테니 말이야. 적어도 그런 일은 피해야 하지 않겠나?"

 

그는 담배를 피우며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째려봤다.

 

"뭣들 하고 있냐? 당장 튀어 나가! 우리 군 생활이 걸려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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