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10화
110화 반격 (3)
실리아나 점령 자체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실리아나 주둔 병력은 독일군보다 약세인 이탈리아군으로 사기는 바닥에, 기갑장비라곤 L3 탱켓뿐인데다 대전차포는 딸랑 3문이 전부였다.
당연하지만, 이런 무기들로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당사자인 이탈리아군은 잘 알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10분도 되지 않아 아군은 실리아나 시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보병들 쪽에선 다소 피해가 발생했지만, 전차들의 피해는 한 대도 없었다.
아군이 실리아나 시내로 돌입하자 이탈리아군은 깔끔하게 전투를 포기하고 항복을 선언, 그렇게 전투는 종결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쉴 틈이 없었다.
별다른 피해 없이 목적지를 점령한 것을 축하할 틈도 없이 사령부로부터 엘 파스까지 전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제 겨우 전투가 끝났는데, 쉬지 말고 계속 움직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명령이란 말인가.
"난들 알겠냐. 높으신 분들께서 뭘 잘못 먹었거나, 갑자기 전공 욕심이 생기신 것이겠지."
브랜슨 대령도 사령부에서 내려온 명령서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명령서 끝줄에 기록된 버나드 로 몽고메리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듣자 하니 미군이 마크타르를 점령했다는데, 그 소식 듣고 괜히 조급해진 거 아닙니까?"
무어 소령이 지나가듯이 던진 한마디에 뭔가 생각나는 게 있었다.
"설마. 무슨 애새끼도 아니고, 겨우 그런 거 가지고 지체 높은 양반들이 그럴 리가 있겠나."
브랜슨 대령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조금 전 무어 소령의 말을 듣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미군 지휘관이 교체되었다고 들었는데 누군지 아십니까?"
"응? 갑자기 그건 왜 묻나?"
"아니...... 뭔가 기억이 날 만한 게 있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 자세한 이름은 모르지만, 패튼이라고 하던 거 같던데."
그럼 그렇지.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패튼, 희대의 명장이자 미 육군 최고의 또라이.
실력은 출중하지만 실력과 별개로 인성이 개차반 그 자체였던 남자로, 몽고메리와는 철천지원수였던 관계다.
문자 그대로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이다.
전투력이 형편없던 미군이 갑자기 그렇게 빨리 진격하게 된 것도 패튼이 지휘를 맡아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이 세계에선 패튼과 몽고메리가 서로 만났는지 알 수 없지만,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몽고메리가 한 단계 아래로 보던 미군보다 뒤처졌다는 소리를 듣고 괜히 열이 올라 무리한 진격을 주문하게 됐을 가능성이 컸다.
역사에서도 몽고메리는 자신의 부대가 패튼의 부대보다 빨리 진격하려고 억지로 계획을 변경해 작전에 차질을 줬을 정도니까.
자칭 두 천재의 자존심 대결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는 고스란히 병사들에게 돌아왔고.
"이봐, 그레이 대위. 갑자기 왜 그래? 낯빛이 어두워졌구만.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내가 말없이 표정이 어두워지자, 브랜슨 대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냥...... 왠지 앞으로 힘들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그렇습......."
"모두 차렷!"
등 뒤에서 누군가가 차렷 소리를 외쳤다.
고개를 돌리자, 다임러 딩고 경정찰장갑차에서 내리는 몽고메리가 보였다.
군단장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 우리는 모두 바짝 얼어붙어 차렷 자세를 취했다.
몽고메리는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곧장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런, 중요한 얘기 중인데 내가 방해를 했나 보구만.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각하!"
"무슨 얘기 중이었나?"
"앞으로의 작전 계획에 대해 논의 중이었습니다."
브랜슨 대령의 대답을 들은 몽고메리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으~래? 뭐, 그건 그렇고....... 나는 귀관들에게 엘 파스로 곧장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 느긋하게 쉬라고 명령한 적은 기억에 없는 것 같다만?"
몽고메리는 턱짓으로 전차 주변에 퍼질러 있다가 군단장의 방문으로 일어선 병사들을 가리켰다.
지금 당장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한가롭게 놀고 있다니.
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위험하다.......
이 패턴은 분명 꼬투리 잡혀서 털리기 직전인 분위기다.
여기서 자칫 잘못했다간 곧바로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다.
지금부턴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되므로 신중해야 한다.......
"각하, 외람되오나, 발언을 허락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용기를 내어 입을 열자, 몽고메리는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생각났다는 듯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누군가 했더니 아서 그레이 대위로구만. 전에 한 번 만났었지?"
"그렇습니다, 각하."
"좋아, 발언하게."
"예, 각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저희는 곧바로 엘 파스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다만,"
"다만?"
"전차를 움직이기 위해선 연료가 필요하고, 전투하려면 탄약이 필요합니다. 그간의 이동과 전투로 인해 소모된 연료와 탄약의 보충이 필요한데, 아직 보급이 도착하지 않아 그때까지 부하들에게 잠시 휴식하라고 명령한 것뿐입니다."
내 말을 들은 몽고메리는 그제야 얼굴을 풀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지만, 일단은 알겠으니 두고 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듣고 보니 그렇군. 하긴, 연료 없이 전차가 굴러갈 수 없으니. 하지만 연료와 탄약 보충이 끝나는 즉시 출발하도록. 나는 행동이 굼뜬 굼벵이들을 아주 싫어한다네. 알겠나?"
"알겠습니다, 각하."
"브랜슨 대령."
"예, 각하!"
"자네가 지휘하는 1대대가 거둔 전과가 상당히 많더군. 앞으로도 더 많은 활약을 기대하겠네."
"감사합니다, 각하!"
브랜슨 대령의 우렁찬 대답에 몽고메리는 그제야 기분이 좀 풀렸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부대도 이 부대만큼만 따라오면 좋을 텐데 말이지. 아무튼, 난 가보겠네. 고생들 하라고."
몽고메리를 태운 다임러 딩고가 떠난 후, 우린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사히 위기를 모면한 것에 안도했다.
진짜 이 세계에선 매 순간 긴장을 놓을 수 없단 말이지.
잠시 뒤 기다렸던 탄약과 연료가 도착했고, 전차마다 연료와 탄약을 가든 실은 후 대대는 실리아나를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엘 파스였다.
***
"저기 소대장님, 뭣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봐."
엘 파스로 향하는 길에서 평소 말수가 적던 가필드가 질문을 던졌다.
"아까 군단장님이 왔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누셨던 겁니까?"
"별거 아냐. 왜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냐고 뭐라 하길래 아가리 좀 털었지. 다행히 잘 해결됐어."
"키야~ 역시 남다르십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감히 말도 못 붙였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이 녀석들, 어째 갈수록 아부 실력이 느는 것 같은데.
그래도 주변에서 이렇게 띄워주니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고 생각할 무렵.
선두 전차가 별안간 정지하더니 뭔가를 발견했다고 보고해왔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시체였다.
전쟁터에 시체가 무슨 대수냐고 하겠지만, 발견된 시체는 좀 '특별'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우우욱!"
끔찍하지 않은 시체가 세상 어디에 있겠냐만은, 이번 시체는 너무나도 처참해서 차마 두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체의 주인은 30대로 추정되는 남자였는데, 특이하게도 인중에 히틀러를 연상케 하는 칫솔 모양의 콧수염이 붙어있었다.
남자는 알몸이었고, 온몸에 피멍이 푸르죽죽하게 든 것을 봐선 죽기 직전까지 구타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목에 난 상처를 보건데 직접적인 사인은 구타가 아니라 흉기에 의한 자상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어떤 물품도 없었기에 우리는 이 시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진격로 중간에 보란 듯이 버려진 것을 보면 아군일 확률이 높았다.
잠시 뒤, 우리의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가까운 곳에 날개가 부러진 스핏파이어 한 대가 땅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마침 스핏파이어의 조종실 계기판에는 사진이 한 장 붙어있었는데, 일가족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에 죽은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인중에 난 수염, 분명히 같은 남자였다.
"아무래도 사진 속 이 남자가 눈앞의 이 불쌍한 친구 같구만."
소식을 듣고 뛰어온 브랜슨 대령이 말했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떤 개새끼가 이딴 짓을 했을까?"
"제리...... 그 녀석들이 아니겠습니까?"
무어 소령을 비롯한 대다수 장교는 제리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솔직히 독일군 말고 이런 짓을 할 놈들이 없긴 했다.
하지만, 스핏파이어 동체 뒤에 쓰여진 문구를 발견하자 우리의 추측은 뒤집히고 말았다.
"어어? 이것 좀 보십쇼! 여기 왠 글이......!"
"뭐라고 쓰여 있는데?"
스핏파이어에는 하얀색 페인트로 '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란 글이 적혀 있었다.
아군 조종사를 처참하게 죽인 장본인들은 독일군이 아니라 프랑스군이었다. 정확히는 비시 프랑스군.
지금까지 독일, 이탈리아군하고만 싸워서 잊고 있었는데. 이곳 튀니지는 원래 프랑스 식민지다.
따라서 언제 비시 프랑스군과 마주쳐도 이상할 게 없긴 하다.
아직 프랑스인들이 우릴 싫어하는 사실쯤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우리가 발견한 아군 조종사와 격추된 스핏파이어에 적힌 프랑스 만세 문구는 즉시 상부에 보고되었다.
곧 영국 본토로 전달되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게 되었다.
***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처참하게 죽은 영국군 조종사의 사연이 공개되자 영국 전역은 들끓었다.
이제까지만 해도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영국인들을 향한 프랑스인들의 적개심보다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터지자, 영국에선 반프랑스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이런 찢어 죽을 놈들!"
"프랑스 새끼들도 나치랑 한패야!"
신문을 읽고 분노한 사람들이 프랑스의 야만성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고, 프랑스의 삼색기를 불태우는 광경은 세계 각국에 전해졌다.
일이 이렇게 전개되자, 바빠지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영국 런던에 둥지를 튼 프랑스 망명정부 인사들이었다.
그들 중의 대표격 인사인 샤를 드골은 황급히 처칠과의 만남 약속을 잡고 다우닝가로 달려갔다.
"프랑스 정부를 대표해 이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사과와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처칠과 만난 드골은 조심스레 운을 떼면서 처칠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일로 인해, 영국 국민의 반프랑스 감정이 악화하지 않을까 매우 우려되는 바입니다."
"그 건에 대해선 너무 우려하시지 마시지요. 영국 국민들은 사려분별이 아주 확실한 이들이니 말이오. 당장은 시끄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도 이성을 되찾을 거요."
"감사합니다, 총리 각하."
드골의 생각과 달리 처칠은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번 일을 저지른 당사자는 비시 프랑스군이지, 영국의 엉덩이에 매달려 연명하는 자유 프랑스 정부가 아니다.
그러니 처칠이 드골에게 화를 낼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처칠의 기분이 괜찮은 것을 확인한 드골은 안도하며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각하, 전에 말씀드린 사안에 대해선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드골은 전에 처칠과 만난 자리에서 자유 프랑스군의 수장을 자신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사실상 요구였지만-했다.
처칠은 당장 대답하기 어려운 답변이라며 뒤로 미뤘지만, 드골은 집요하게 처칠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요청을 관철하고자 했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
처칠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드골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영국의 지원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주제에 툭하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해대질 않나.
자존심은 더럽게 세서 영국 정부와 마찰을 일으킨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자유 프랑스 정부에는 드골만한 인사가 없었으니.
카리스마 있고,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드골이 자유 프랑스의 수장 노릇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드골을 좋아하지 않는 처칠도, 자유 프랑스 정부를 이끌어나갈 유일한 사람은 오직 드골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오만하고 밥맛 뚝뚝 떨어지지만, 적어도 대화는 통하는 데다 같은 적을 두고 싸우는 처지이니 동지로 대접해줘야지.
"대영제국 정부는 장군을 프랑스 정부의 수장으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총리 각하."
처칠로부터 원하는 답변을 받아낸 드골은 활짝 웃었다.
처칠과의 회담을 끝내고 돌아온 드골은 곧바로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를 했다.
왜 가냐는 부하들의 물음에 드골인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처럼 영국인들의 반프랑스 정서가 심화한 상황에선 뭔가 보여줘야 해. 예를 들어, 영국과 함께 싸우는 프랑스인들의 모습 말일세."
"그 말씀은......."
"북아프리카로 간다. 전선에 가서 뭐라도 하는 척 사진이라도 찍어서 영국인들에게 보여줘야지. 여러분, 여기 영국인들과 함께 나치와 싸우는 프랑스인이 있습니다 라고 말이야. 자연스레 영국인들의 반프랑스 감정은 누그러들 것이고, 동시에 내 입지는 더더욱 올라가겠지. 프랑스의 유일한 희망 정도로 말이야."
드골의 머릿속에는 다 계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