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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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7화
107화 1941년의 크리스마스
전선을 돌파해 미군과 영국군을 포위 섬멸하려던 롬멜의 야심 찬 계획은 끝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일선부대들의 분투와 전투에 어설픈 미군의 어이없는 실책이 겹쳐 독일군은 잠시나마 연합군을 위기에 몰아넣기까지 했지만, 그뿐이었다.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한 영국군은 곧바로 미군 전선으로 달려가 전선에 난 구멍들을 메꾸었고, 독일군 후속부대가 도착했을 무렵엔 전선은 수선을 끝낸 뒤였다.
다시 한 번 기적을 바라며 돌격을 감행한 독일군이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합군 포병대의 무지막지한 포격과 공중폭격이었다.
결국, 반격에 동원된 이탈리아군 보병사단이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퇴각하면서 추축군의 대열은 그대로 붕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이번 전투로 독일군이 거둔 이득이 아주 없다곤 할 수 없었다.
영국군은 휘하 사단들의 태반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군보다 전투력이 낮은 미군의 경우 최일선 사단들 몇몇은 괴멸되어 사실상 해체되었다.
수만에 달하는 사상자들과 동맹군인 영국군의 불신은 덤이었고.
그러나 독일군이 입은 피해는 이득을 까마득히 초월할 정도였다.
이번 공세를 위해 몇 대 없는 귀하디 귀한 장포신 4호 전차들을 총동원했는데도, 공세는 실패했으며 귀중한 4호 전차들까지 대거 상실하고 말았다. 다른 전차들은 말할 필요가 없었고.
기갑부대들은 대다수 장비를 잃어 이름만 기갑부대인 보병부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번 전투로 소모된 연료와 탄약, 장비, 물자로 인해 앞으로의 방어 계획까지 불투명해질 정도였다.
***
"반격 작전은 실패......."
씁쓸한 얼굴로 지도판에서 말판을 옮기던 루크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작전이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난 직후, 독일군 사령부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잇몸을 내보이는 것조차 중죄로 취급될 정도였으며, 나름대로 짬 좀 먹었다고 자부하던 고참 군인들조차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이번에는 말이지."
모두가 침묵에 잠겨있을 때, 이제까지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롬멜이 입을 열었다.
"성공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어. 아무래도 내가 적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것 같네."
롬멜은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는 눈빛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에는 독일군의 최대 진출선이 아직도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전진했더라면, 조금만 더 영국군에게 피해를 입히고, 영국군이 미군을 지원할 수 없게 만들었더라면 작전은 성공했을 텐데.......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노릇이거늘.
롬멜은 쓰게 웃었다.
사실 진짜 문제는 영국군도, 미군도 아닌 베를린이었다.
튀니지의 연합군부터 먼저 처리하는 게 급선무라며 총통의 이집트 공세 명령을 거절해왔는데.
막상 연합군 섬멸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튀니지까지 위태롭게 되었으니 이제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그나마 평소 히틀러의 신뢰가 굳은 롬멜이었기에 명령을 뭉개고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지, 다른 장군 같았다면 명령을 거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임감이었다.
"지금 병력으론 현 전선을 감당하기 힘드네. 방어선을 뒤로 물릴 수밖에."
"각하, 그러면 이집트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알렉산드리아를 포기하고 전선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어. 하지만 이탈리아, 특히 두체가 반대하겠지. 총통의 의견도 두체랑 별반 다르지 않을 테고."
튀니지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한데, 이집트 전선까지 생각하려니 두통이 일었다.
이탈리아군 장성 중에서도 유일하게 롬멜이 인정하는 가리볼디는 롬멜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를 포기하고 방어선을 뒤로 물리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했지만, 로마로부터 내려온 명령들은 한결같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렉산드리아를 사수하라! 후퇴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롬멜에겐 전달된 가리볼디의 전보에는 답답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프리카의 추축군에겐 두 개의 적이 있었다.
하나는 연합군, 다른 하나는 무솔리니.
***
그러나 롬멜의 예상과 달리 영국군은 곧바로 반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일선 부대들에 크나큰 타격을 입은 탓에 반격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신중한 성격이었던 몽고메리는 섣불리 공세에 나섰다가 독일군 방어선에 막혀 역으로 당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몽고메리는 독일군이 떠난 엘케프를 접수하는 것으로 진격을 멈추고, 영국 본토의 지원을 기다렸다.
병력과 물자가 다시 충분히 쌓인 후 대규모 공세를 가해 튀니지를 완전히 빼앗는다.
이것이 몽고메리의 계획이었다.
이러한 몽고메리의 계획 덕분에, 일선 부대들은 전투 대신 휴식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군도 피해 수습과 방어선 강화에 집중하는 중이라 최전선에선 작은 교전을 제외하면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1939년에서 194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있었던 기묘한 평화가 아프리카에서 다시 반복된 것이다.
"참 묘한 기분이란 말이지."
"엥? 뭐가 말입니까?"
열심히 트리 꾸미기에 집중하던 잭슨이 트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이틀 뒤면 서방 최대의 명절인 크리스마스다.
한국과 일본 등 극동에선 그냥 휴일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유럽과 미국 등지에선 크리스마스는 단순한 휴일을 넘어 축제의 날이다.
이 공식은 최전선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비록 안전한 후방이 아닌, 언제라도 폭탄의 비가 하늘에서 쏟아질지 모르는 최전선이긴 하나 지금은 양 진영 모두 전투를 피하고 대치 중인 상태.
언제까지고 이런 대치 상태가 이어지지 않겠지만, 못해도 크리스마스까지는 평화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이 저렇게 신나서 트리를 꾸미고 있는 중이고.
"전투 안 하고 쉴 수 있어서 좋긴 좋다만, 우리가 여기서 시간만 끌수록 제리들의 방어도 더욱 단단해지지 않겠냐?"
"뭐어,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가 만약 높으신 분이라면, 지금쯤 공격했을 거야. 적 방어선이 더 굳어지기 전에."
"높은 분들도 다 생각이 있으셔서 공격을 안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야 맘 편히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으니 좋긴 하지만."
트리에 빨간 양말을 걸던 애덤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소대장님. 너무 오랫동안 전장에 계셔서 머리에 전쟁 생각밖에 안 드신 것 같습니다."
"이 자식이. 누가 들으면 전쟁광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내가 김정은이냐?"
"킴...... 죄송하지만 뭐라고 하셨습니까? 발음하기 어렵습니다."
"아, 마지막 말은 무시해. 별 뜻 아니니까."
머리에 전쟁 생각밖에 안 들었냐는 애덤의 말도 나름 무시하기 힘들었다.
녀석의 말대로, 최근 드는 생각은 오직 전쟁, 전쟁 생각뿐이었으니까.
신문을 읽거나 뉴스를 들을 때도 전쟁 소식부터 찾았다.
독일군이 스몰렌스크와 키예프를 점령했다는 어제 자 뉴스, 그리고 나흘 전에는 미드웨이에서 미 태평양 함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이 세계에선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나 하는 호기심에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애덤 말대로 오랫동안 전장에서 있어서 전쟁 생각밖에 안 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심각한 문제라곤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냥 흘러 넘기기도 조금 애매하다.
"그건 그렇고, 트리가 그게 뭐냐? 내가 아는 크리스마스트리와는 많이 다른데?"
애덤과 잭슨, 토마스가 달라붙어 꾸미고 있는 트리는 흔히 아는 크리스마스트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빼빼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에 유니언 잭 몇 개와 양말, 빨간 실 몇 개를 감아둔 것이 전부였으니까.
"여긴 영국이 아니라 튀니지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선방한 거 아닙니까?"
"애들이 만들어도 니들보단 훨씬 더 잘 만들 것 같은데?"
"하, 소대장님은 도와주지도 않으시면서 어떻게 꼬투리만 잡으려고 하십니까?"
"맞아. 아무리 총리께 눈도장 좀 찍었다고 해도 부하들 생각 좀 해주십쇼."
"이 새끼들이? 나처럼 니들 생각하는 소대장 없어, 새끼들아."
이 녀석들처럼 전쟁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현실을 좀 즐길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
아프리카에서 연합군과 추축군 사이의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을 무렵.
머나먼 동토에선 새하얗게 쌓인 눈이 온 세상을 백색으로 물들인 가운데 피 튀기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머니 러시아를 위해! 돌격!"
"우라!"
정치장교가 허공을 향해 총을 연거푸 쏘며 휘슬을 불자, 얼어붙은 참호에서 숨죽인 채 대기하던 수백 명의 소련군이 일제히 우라를 외치며 돌격했다.
그들의 목표는 독일군이 점령한 마을을 탈환하는 것.
별 볼 일 없는 작고 단순한 마을이지만, 저 마을을 탈환해야 아군 사단이 적 전선의 뒤를 파고들 틈이 생긴다.
공격 전날, 대대장이 휘하 대대원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열심히 작전을 설명했다.
하지만 글자도 읽지 못하는 많은 병사의 머리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명령이 떨어지면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다는 사실도.
"침략자 파시스트 돼지들을 죽여라!"
"우라!"
세상이 떠나갈 듯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소련군들을 향해 독일군의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다.
피와 복수에 굶주린 소련 손님들을 위해 독일 웨이터가 내놓은 추천 메뉴는 MG34와 독일군이 MG37이라고 부르는 체코제 중기관총 ZB-53의 일제 사격.
새하얀 눈밭에 시뻘건 피가 흩뿌려졌다.
"돌격! 돌격!"
"멈추지 마라!"
총탄에 맞아 쓰러진 병사들로 순식간에 작은 벽이 쌓여도, 소련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장교들은 연신 권총을 쏘아대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소련군이 자랑하는 걸작 전차 T-34도 보병들의 지원을 위해 76mm 주포에 불을 당겼다.
"제기랄, T-34다!"
"대전차포!"
PaK 38이 T-34를 잡기 위해 철갑탄을 발사했지만, 포탄은 T-34의 전면장갑에 약간의 흠집만 내고 고스란히 도탄 되었다.
"그리고리, 전진해! 파시스트들을 짓밟아버려!"
"알겠습니다, 동지!"
T-34는 포탄을 쏘는 대신 그대로 전진하여 대전차포를 덮쳤다.
무한궤도에 짓눌린 대전차포는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대전차포가 당했습니다!"
"젠장,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전차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잃은 독일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대로 가면 전멸은 시간문제일 터.
항복한다고 해도 복수심에 눈이 돌아간 소련군이 제대로 된 포로 대우를 해줄 리 없었다.
하물며 평범한 국방군도 아닌 SS인 그들이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 살아남을 가능성은 0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모두가 죽음을 직감한 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기 빛처럼 구원자가 나타났다.
"2시 방향에 T-34, 거리 300!"
"장전 완료!"
"발사!"
3호 돌격포의 75mm 주포가 불을 토하자 철옹성 같던 T-34의 포탑에서 섬광이 일었다.
하필이면 장갑이 얇은 포탑 측면에 포탄이 명중하는 바람에 강철 괴수는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명중! 격파입니다!"
"좋았어!"
3호 돌격포를 선두로 한 독일군의 반격이 가해지자 소련군은 그대로 패주하고 말았다.
전투가 끝나고 보병 중대 지휘관으로부터 칭찬과 감사 인사를 받은 돌격포 차장은 부대로 돌아와 따뜻한 막사에 몸을 던졌다.
"지친다, 지쳐."
전투를 끝내고 돌아올 때마다 몸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그렇게 힘든 하루를 마감하고 잠이 들려는 찰나, 부하의 손에 들린 오래전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하인츠, 그거 좀 줘봐."
부하로부터 신문을 넘겨받은 돌격포 차장은 신문 속 어느 남자의 사진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인데.
"야, 이 녀석 이름이 뭐지? 어디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 그 녀석 말입니까? 아서 그레이라고, 토미들이 엄청 띄워주고 있는 놈이잖습니까."
"그래, 생각났다. 아서 그레이라고 했었지."
신문에는 아서 그레이라는 영국군 장교가 지휘하는 영국군 전차 소대가 일본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일본군 장교를 생포했다는 짤막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영국에서처럼 유명하진 않았지만, 독일에도 조금 이름이 알려진 친구였다.
이탈리아 장군 조반니 메세를 죽인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선 아서 그레이라면 아주 이를 벅벅 갈고 있었다.
"여기 있다. 그럼, 나 좀 잔다. 나중에 당직사관 오면 깨워."
"알겠습니다, 비트만 SS 중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