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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4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6화

106화 고난을 넘어서 (7)

 

 

"우욱!"

 

강렬한 진동이 전차를 뒤흔들고, 얼굴에 와닿는 뜨거운 불길이 느껴졌다.

 

처음에 포탄을 발사할 때 발생하는 포구 화염인 줄 알았다. 그러나 불길은 금방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전차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6파운더에 정면을 관통당한 4호 전차는 활짝 열린 해치로 불을 내뿜고 있었다.

 

벌써 석탄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팔들이 해치 밖에 삐쭉 튀어나와 있었는데, 탈출을 시도하다가 유폭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대로 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호랑이 1 피격! 탈출하겠다!"

 

나는 무전으로 피격 사실을 중대에 알린 뒤, 포탑 구석에 고이 모셔둔 스텐을 챙겼다.

 

"모두 탈출해!"

 

전차에 불이 붙은 이상, 가망이 없다.

 

나는 지체 없이 부하들에게 탈출을 명하곤 전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것도 이젠 숙달이 돼서인지 엉덩방아를 찍지 않고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대신 오른발의 통증은 피할 수 없었지만.

 

"X발, 아직 몇 번 타보지도 못했는데......."

 

전차 밖으로 나온 잭슨이 타들어 가는 전차를 보며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녀석의 말대로, 이 녀석을 타고 실전에 나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이 꼴이 됐다.

 

비록 내 소유의 물건은 아니지만, 화염에 휩싸인 전차를 보니 괜히 허탈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었다.

 

이곳은 전쟁터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어이! 여기야, 여기!"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20m쯤 떨어진 구덩이에서 한 병사가 나와 팔을 흔들었다.

 

"이쪽으로 와! 서두르라고!"

 

구덩이 안에는 두 명의 병사가 있었다.

 

처음엔 아군인 줄 알았다. 허나 억양이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미군이었다.

 

"아까 전 싸움을 지켜봤는데, 대단하더군! 마치 영화를 보는 줄 알았어!"

 

구덩이 속 키가 작은 병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우리를 치켜세웠다.

 

동맹군으로부터 뜻밖의 칭찬을 받자 괜히 어깨가 들썩거렸지만, 그보단 상황 파악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곧 차분해졌다.

 

"칭찬 고맙네, 미국 친구들. 나는 아서 그레이 대위라고 하네. 여기 이 친구들은 내 소대원들이고."

"아, 실례했습니다, 대위님!"

 

이름과 계급을 밝히자 두 미군은 화들짝 놀라더니 서둘러 경례를 올렸다.

 

내가 장교인 줄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계급 떼고 얼굴만 보면 같은 병사라고 생각할만했다.

 

계급에 비해 나이는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됐어. 자네들은? 이름이 뭐지?"

"일병 지미 봅입니다!"

"일병 도널드 모리슨입니다, 대위님!"

 

키가 작은 병사가 지미였고, 키 크고 턱이 사각형인 친구가 도널드였다.

 

나는 우릴 발견하고 소리쳤던 지미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 지미. 장교나 다른 병사들은? 어디에 있지?"

"죄다 죽었을 겁니다. 저희가 중대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중대장과 소대장 모두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제리들 포탄 맞고 죽었습니다."

 

그다지 희망적인 소식은 아니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일단 이 주변에 아군이 있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구덩이에 가만히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전투가 만약 독일군의 승리로 끝난다면 우린 도망칠 기회를 잃고 그대로 적진에 남겨져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안전한 구덩이에서 나와 아군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딱히 현명한 선택 같진 않았다.

지금처럼 적과 아군이 뒤엉킨 곳에선 어디서 적군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소대장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잠깐 기다려봐. 생각 중이야."

 

가만히 있자니 미아가 될 것 같아 두렵고,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자니 총 맞을 것 같아 두렵고.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맥도날드가 좋아, 버거킹이 좋아? 보다 더 어려운 고민에 머리를 감싸고 있는데, 좌측에서 무한궤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군 전차인가 싶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불행히도 독일군이었다.

 

"이런 썅. 모두 대가리 숙여. 제리들이다."

 

나타난 독일군 차량의 정체는 Sd.Kfz 251/9. 흔히 '하노마크'라 불리는 하프트랙에 초기형 3호 돌격포와 4호 전차에 달리던 75mm 24구경장 포신을 장착한 녀석이다.

 

독일군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선 모르는 눈치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저들도 알아서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독일군은 조용히 지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장갑차가 멈춰서더니, 보병들이 일제히 하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어대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슬쩍 들자, 장갑차 앞에 모여 뭔가를 살피고 있는 적들이 보였다.

 

장교로 추정되는 자가 바퀴를 가리키며 뭐라고 외치는 걸로 봐선 바퀴에 문제가 생겨 수리 중인 것 같았다.

 

병사들이 장갑차를 고치는 동안, 두 명의 병사가 구덩이를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다가온다면, 우리의 존재를 적들에게 들키게 될 터였다.

 

아씨, 이제 어쩌지?

 

소대원들을 뒤돌아보자 모두들 긴장한 채 숨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우리는 나 포함해서 일곱, 적들도 숫자가 딱히 많진 않았다.

게다가 수리 중인 병사들은 이쪽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지금 기습을 가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너희들 내 말 잘 들어. 내가 신호하면, 즉시 일어서서 쏘는 거다."

"지, 진심이십니까?"

 

겁에 질린 애덤이 제정신이냐는 듯이 물었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면 안 되냐고 묻고 싶은 눈치다.

 

네 맘 이해한다. 그런데 어쩌냐? 저놈들이 이쪽으로 알아서 오고 있는데.

 

들킨 후에 싸우기 시작하면 이쪽만 더 힘들어진다고.

 

"그래, 인마. 지금이라면 충분히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지미, 도널드, 너희 둘은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 두 놈을 쏴라. 나머지는 나와 함께 장갑차에 달라붙어 있는 놈들을 쏘고."

 

내가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자, 다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두 독일군은 구덩이에서 10m 거리까지 와 있었다.

 

"지금이다! 쏴!"

 

불시에 일어서서 스텐을 갈기자 요란한 총성과 함께 적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장갑차 바퀴를 고치느라 등을 이쪽으로 향한 채 쭈그리고 앉아 있던 독일군들이 걸레짝이 되어 쓰러지고, 담배를 입에 물던 장교도 관자놀이에 총을 맞아 고꾸라졌다.

 

"으아아아!"

 

겁에 질렸던 애덤도 이를 악물고 일어서서 스텐을 마구잡이로 난사했다.

지미와 도널드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독일군 두 명을 저격했다.

 

총을 맞고 쓰러진 두 명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부들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됐다.

 

현장에 있던 독일군은 전멸한 반면, 이쪽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

 

"이야, 해냈다!"

"맛이 어떠냐, 이 더러운 소시지 새끼들아!"

 

새끼들, 방금까지 벌벌 떨 땐 언제고 지금은 아주 역전의 용사가 됐구만.

 

그래도 내 말에 토 달지 않고 잘 따라줬으니, 승리를 만끽할 자격이 없진 않았다.

 

"자식들아, 그만 기뻐하고 무기나 수거해. 주변 경계 철저히 하고."

"옙."

 

가필드와 애덤이 경계를 서는 사이, 나는 병사들을 데리고 쓰러진 독일군에게 다가가 그들의 소지품을 살폈다.

 

지난번 이탈리아 장교에게서 지도판을 발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비슷한 수확이 있진 않을까 싶어 장교의 시체를 뒤졌지만. 나온 것은 걸레짝이 된 지도였다.

 

"쳇. 이건 못 쓰겠구만."

 

하필이면 총탄에 난사 당한 탓에 군데군데 구멍이 난 데다 피까지 묻어 도저히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신 새끈한 상태의 발터 P38과 예비 탄창들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에서 송강호가 들고 다니던 그 권총. 상하이 조가 심영을 고자로 만든 총이기도 하다.

 

"어이, 소총은 그냥 놔두더라도, 기관단총은 모두 챙겨. 제리들 무기는 우리 기술자들이 만든 것보다 성능이 더 좋으니까."

"알겠습니다아~."

 

호신용 무기로 지급받은 스텐보다 독일군이 들고 다니는 MP40이 훨씬 더 다루기 쉽고 성능이 뛰어났다.

 

무기를 여러 개 들고 다니기엔 거추장스럽고 무겁기만 하니까 스텐은 버리고 MP40만 들고 갈까 생각하다가, 무기를 그냥 버렸다고 질책을 받을 수도 있어 그냥 들고 있기로 했다.

 

그렇게 신나게 파밍 중인데, 이번엔 뒤쪽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우리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적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슴을 졸이는데, 크롬웰 전차 한 대가 다가왔다.

 

"아군이다!"

"여기야, 여기!"

 

아군의 등장에 부하들은 반색하며 일어섰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환영 인사가 아닌 총알이었다.

 

"뭐, 뭐야?!"

 

난데없이 아군으로부터 총알 세례를 당하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아군인 우릴 향해 총을 쏘는 거지?

 

설마 독일군이 노획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사격이 멎었다.

 

큰소리로 누군가를 욕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이 목소리는......!

 

"중대장님!"

 

***

 

"이런, 그레이 대위. 내 허락도 없이 보병으로 전속한 건가?"

"다시 기갑으로 전속할 생각입니다. 역시 땅개 생활은 제 체질이 아니라서요."

 

나타난 전차는 독일군에게 노획된 것이 아니라 무어 소령의 전차였다.

 

조금 전 우릴 향해 기관총을 난사한 이유는 초짜 이등병의 짓이었다.

 

그나마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독일군 때려잡던 베테랑들이 아군의 총에 맞아 죽다니. 이보다 더 허무하고 황당한 죽음이 또 있을까.

 

"그렇잖아도 자네가 어디 있는지 찾고 있었네, 대위. 전투는 이제 막 끝난 참이라네."

"우리가 이겼습니까?"

"그래, 우리가 이겼지."

 

정작 소령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기긴 이겼는데, 이걸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야. 현재 중대에 살아남은 전차는 겨우 3대뿐일세."

"겨우 3대......."

 

미군의 지원을 위해 출격할 때, 중대에는 9대의 전차가 있었다.

그랬던 게 지금은 3대로 줄어들었으니, 자그마치 3분의 2가 당한 것이다.

 

일반 보병부대에선 부대원의 20%가 전투 불능이 되면 전멸로 간주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 피해는 전멸을 넘어 괴멸 수준이었다.

 

"아무튼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군. 자네가 죽었다간 충격받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야. 제리들과 파스타들은 기뻐하겠지만."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가 봅니다."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그것들은 뭔가? 제리들한테 선물로 받았나?"

 

무어 소령은 우리가 들고 있는 독일제 무기들을 가리켰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건진 몇 안 되는 이득이었다.

 

"주웠습니다. 이걸 쓰던 친구들에겐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서 말이죠."

"그렇군. 물건은 함부로 버리면 안 되지."

 

슬슬 잡담을 마무리 짓고 전차에 올라타는데, 뒤쪽에서 한 무리의 전차들이 나타났다.

뒤늦게 도착한 미군의 지원 병력이었다.

 

그들은 사방에 즐비한 전차와 전사자들의 잔해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몇몇은 처참한 광경에 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양키 녀석들, 참 빨리도 오는구만. 이미 파티는 끝났는데 말이지."

 

무어 소령이 끌끌 혀를 차며 담뱃갑을 꺼냈다.

 

지평선에서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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