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0화
100화 고난을 넘어서 (1)
"어서 오십시오, 대통령 각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저보다 총리가 더 고생하셨을 것 같은데요."
미국과 영국을 이끌어가는 두 거인은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회담을 가졌다.
대서양 한복판에 있어 미국과 영국의 회담 장소로 선택된 아이슬란드는 본래 덴마크의 식민지였지만, 덴마크 본토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영국은 아이슬란드를 점령하여 북대서양에서 활동하는 유보트들을 감시하는 기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레이캬비크 최고-이자 사실상 유일한-호텔에서 만난 둘은 앞으로의 전략과 여러 협의 사안에 대해 논의했다.
'일부 몇몇 사안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문제에 대해 두 나라 모두 의견 일치를 보였기에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일본도 일본이지만 독일을 먼저 끝내는 게 중요합니다. 워싱턴과 도쿄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런던과 베를린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까요. 따라서 히틀러를 먼저 교수대에 매달고, 그다음 도조의 골통을 부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통령 각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저 역시 총리의 의견에 적극 찬성합니다."
루스벨트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미 정부 고위층과 장성들도 독일을 먼저 쳐부수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
미국에 먼저 선빵을 날린 것은 일본이지만, 가장 위험한 적을 뽑으라면 단연코 독일이었다.
비록 해군은 일본이 독일보다 우위에 있지만, 그 외 모든 분야에선 독일이 일본보다 몇 배나 우위에 있다.
게다가 일본이 미 본토를 공격하려면 그 넓은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데, 독일은 도버 해협만 건너면 바로 영국을 칠 수 있다.
영국이 무너지고, 영국의 해군력을 흡수한 독일이 아이슬란드나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를 발판 삼아 북미 대륙을 침공하는 것은 미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일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독일에겐 그럴 힘이 없지만, 지난해 독일이 보여준 전무후무한 전과는 미국과 영국 정부가 독일 자체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 전선 말입니다, 미 육군의 전선 투입은 언제쯤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까?"
"음, 그 문제에 관해서 우선 총리의 입장을 먼저 듣고 싶군요. 언제가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까?"
"저희야 미 지상군의 투입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늦어도 11월 안으로 영국과 아프리카로 육군 병력을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안건입니다. 소련에 대한 지원 문제 말입니다만."
소련 얘기가 나오자 두 정상의 눈빛이 달라졌다.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미합중국이 소련에 식량, 의약품, 농기계, 원자재 등등 비전투물자만 지원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소련이 미 정부에 계속 전투물자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다고 하더군요."
"사실입니다."
루스벨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께선 저들의 요구에 뭐라 답하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저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루스벨트는 처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한 발을 빼는 쪽을 택했다.
"총리께서 우려하시는 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루스벨트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총리, 우리는 보다 더 넓게 세상을 봐야 합니다. 당장 눈앞의 것만 보다가는 더 큰 그림을 볼 수가 없어요. 소련이 무너지거나 저들이 독일과 강화를 했다간,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대통령, 그렇다고 해도 소련을 우습게 봐선 안 됩니다. 물론 나치를 꺾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다음의 일도 생각해야 합니다. 소련이 강력해질수록 독일군도 더 많이 죽겠지만, 그 힘이 전쟁 이후에도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처칠은 루즈벨트를 설득하기 위해 묵은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폴란드와 핀란드를 침략하고, 더 과거엔 나치와 손까지 잡았던 놈들이 어찌 전쟁이 끝난 후엔 얌전히 있을 거라 여기십니까? 스탈린, 그 작자는 결코 평화를 좋아하지 않아요! 놈은 전 지구를 빨간색으로 물들이려면 수십 번의 전쟁도 감당할 작자란 말입니다."
추가로 최근 있었던 사건도 꺼냈다.
"저들이 우리 영국을 염탐하기 위해 간첩을 심어놨다가 발각당했다는 사실을 대통령께선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우리의 뒤통수를 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놈들인데, 몸집이 더 커지면 어떤 짓까지 저지를지 몰라요!"
처칠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가는 것을 깨닫곤 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흠흠,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결례를 범한 것 같군요."
"하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잖아도 요즘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가는 귀가 먹었거든요."
루스벨트는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어색해질 뻔한 상황을 재빨리 무마했다.
"그래도 총리, 당장 승리하기 위해선 소련을 지원해야 합니다. 먼 미래를 걱정하며 행동을 꺼리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소련을 너무 안일한 눈으로 바라보는 일도 피해야 합니다. 저도 소련이 망하는 일은 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지원하는 걸 걱정할 뿐입니다. 이미 소련은 자체적으로 독일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어요."
소국 핀란드를 상대로 추태를 보인 군대와 같은 군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소련군은 독일군을 그럭저럭 막아내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스탈린의 항복을 받아낼 것이란 독일 측의 예상과 달리, 현재 독일군은 스몰렌스크와 키예프에서 고전 중이었다.
비록 전투 자체는 독일군이 우위에 있다고 하나, 소련군의 저항 역시 만만찮았다.
"허나 가지고 있는 물자가 다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스탈린 서기장의 친필편지에 따르면, 현재 소련군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내부로는 상황이 꽤 심각하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 왔던 연락을 떠올리며 루즈벨트는 침착하게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전쟁터가 되는 바람에 식량 수급에 큰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지원이 없으면 전 소련인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 배를 쫄쫄 굶게 된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식량 지원을 더 늘리는 일만큼은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무기 지원은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총리께서 우려하시는 일이 없도록 무한정으로 지원을 퍼붓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 약조하리다."
결국, 길고 긴 줄다리기 끝에 처칠은 루스벨트로부터 소련에 전투물자는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회담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간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한 약속대로 11월 미 육군을 대서양 너머로 보냈다.
본격적인 반격의 시작을 위해서.
***
세상에서 가장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은 군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군대에서의 시간은 사회에서보다 더럽게 늦게 흐른다.
하지만, 이 말도 전시라는 특별한 상황에선 조금 달라진다.
전선에서의 시간은 1초가 1분처럼, 1분이 10분처럼, 10분이 1시간처럼, 하루가 열흘처럼 느리게 느껴진다.
죽음이 코앞에 있어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전선과 멀리 떨어진 안전한 후방에서도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영국에 도착한 뒤로, 우리는 교육과 훈련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눈을 떠보면 이틀이 지나 있고, 뒤돌아서면 일주일이 지나간 달력을 보고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를 수 있다며 놀라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잔고장이 속출해 교관들과 전차병들의 복장을 터지게 만들었던 크롬웰이었지만. 기술자들이 달려들어 열심히 개량한 결과, 10이었던 고장이 3~4로 줄어들게 되었다.
여전히 개선해야 할 점이 많지만, 빈번했던 고장이 줄어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입장에선 감지덕지였다.
못해도 마틸다보단 훨씬 나으니까.
희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여러 문제로 물자 지원만 하던 미국이 드디어 전투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미 육군항공대 소속 인원들이 영국에 주둔해 독일 본토 공습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지상전을 치룰 육군 병력은 여전히 미 본토에만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 육군 병력도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아프리카에 상륙했다.
이에 맞춰, 부대에도 곧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부대의 행선지를 두고 여러 추측이 나왔는데, 브랜슨 대령의 말 한마디가 모든 추측을 잠재웠다.
"우린 알제리로 간다."
알제리를 통해 튀니지를 장악하고, 리비아와 이집트의 추축군을 포위, 괴멸시킨다는 대전제는 여전히 유효했다.
12월, 부대는 다시 수송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1년 전과 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이다.
***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이곳에 왔군."
눈을 돌려도 오직 모래와 바위뿐.
땅과 대비되는 구름 한 점 없는 선명한 푸른빛의 하늘까지.
1년 전에 봤던 광경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다.
우리는 지금 알제리의 동쪽 끝자락에 있다.
여기서 몇십 km만 더 가면, 튀니지다.
"하아, 이젠 지긋지긋해서 죽을 것 같습니다."
또 모래바람을 마시러 오게 된 소대원들은 벌써부터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들이었다.
나 역시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어쩌랴?
전장이 아프리카와 버마, 둘 중 하나뿐인데.
애초에 여기가 아니면 이집트거나 벌레가 우글거리는 버마로 가야 한다.
그나마 영국이랑 가까운 알제리로 온 걸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그래도 상황은 작년보다 확연히 나은 편이다.
느려터진 마틸다 대신 빠르고 화력도 강한 크롬웰을 타게 된 데다, 추가로 미군까지 있다!
다만, 이 시기의 미군은 사람들이 흔히 아는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M1 철모가 아직 제식화 되지 않아서 아군의 브로디 철모를 본떠서 만든 M1917/A1 철모를 쓰고 있는 데다, 군복조차 사막색이다 보니 멀리서 보면 아군과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거기다 전차는 M3 스튜어트 경전차와 M3 리 중형전차, 이 둘 뿐.
M4 셔먼은 아직 개발 중이라, 내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서야 볼 수 있을 듯하다.
정작 셔먼보다 늦게 개발된 크롬웰은 지금 이곳에서 굴러다니고 있는데 말이지.
"장교들은 모두 집합!"
앞으로의 작전 계획과 미군과의 협의를 위해 회의가 열렸다.
소위 이상의 장교들은 모두 지휘 텐트에 모여 앞으로의 작전 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참고로 텐트 안에는 미군 장교들도 있었다.
그들은 돌아다니며 아군 장교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함께 브리핑을 들었다.
"먼저, 다들 여기 이 사진을 주목해주십시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대위가 가리킨 사진은 아군 정찰기가 적진 상공을 날아다니며 찍은 사진을 확대한 것이었다.
작은 점들은 분명 적 보병인 듯했고, 보병들 주위에 있는 물체들은 바위라고 하기엔 너무 반듯했다.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을 피하고자 위장막을 씌웠지만, 전체적인 윤곽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틀림없이 전차 혹은 대전차포 같은 중장비이리라.
"사진 속 적군은 독일군입니다. 보시다시피 적군은 여러 대의 전차와 대전차포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위는 이어 사진이 찍힌 곳의 대략적인 위치를 지도에서 찾아내 빨간색 마커로 표시했다.
"다음 사진입니다."
다음 사진은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을 찍은 것이었다.
위장은 독일군보다 더 허술해서 한눈에 봐도 저놈이 전차인지, 저 새끼는 대전차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허나, 1차대전의 서부전선을 연상케 하는 잘 짜인 참호선과 적절한 곳에 배치된 화포들을 보니 이탈리아군이 마냥 놀고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제법 촘촘하고 두터운 방어선이다.
상대가 제아무리 이탈리아군이라곤 하나 저 방어선을 뚫으려면 꽤나 고생 좀 할 것 같군.
대위는 이번에도 사진이 찍힌 위치를 지도에 표시한 다음, 마지막 사진을 보여줬다.
이번 사진은 독일군을 찍은 것이었는데, 앞의 두 사진과 달리 방비가 허술한 티가 팍팍 났다.
전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대전차포 몇 문이 듬성듬성 배치되어 있었다.
보병들의 숫자도 앞의 두 사진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다.
대신, 위치가 문제였다.
세 번째 사진이 찍힌 곳으로 가려면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가파른 경사로를 지나야 하는데, 주변에 바위가 많아 전차 같은 중장비들의 기동이 무척이나 힘들다.
거기다 측면에는 깎아내린 절벽이 있는데, 이 절벽 위에서 보면 길이 그대로 노출된다.
만약 아군이 이곳을 공격하려면 절벽에 위치한 독일군의 공격을 그대로 맞으면서 전진해야 한다.
독일군도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이곳에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배치한 것이리라.
결국 남은 선택지는 앞의 두 곳뿐.
이 두 곳 중 어느 곳을 누가 맡느냐를 두고 논의가 시작되려는 가운데,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어 예상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별로 고민할 것도 없군요. 저희 미군이 양쪽 모두 다 상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