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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7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1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7화

97화 엇갈린 운명 (3)

 

 

"......압니다."

 

오랜 침묵 끝에 몰로토프는 겨우 입술을 뗐다.

 

"하지만, 그 사건이 이 자리에서 논할 문제인지 의문이 드는군요."

 

몰로토프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회담을 하러 영국에 올 때, 틀림없이 이 사건이 나오리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래도 직접 눈앞에서 들으니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만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든도 이 정도 반응쯤은 예상했는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예. 저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만,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내각에서 이번 회담 때 이 사건의 해명을 요구하라는 강력한 주문이 있었거든요. 그러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크흠."

"총리께서도 다른 이들과 같은 의견이십니다. 이번 사건의 해명을 듣지 않고서는, 귀국과의 세밀한 협력이 힘들다고요. 물론 이 사건이 몰로토프 장관의 지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희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몰로토프는 고민했다.

 

업무에 잔뼈가 굵은 관료이자 숙련된 외교관인 그였지만, 이번 사건만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스탈린이 그에게 영국에게 끌려다니지 말고 강력하게 나오라고 주문했으니, 당장은 뻗대기로 결심했다.

 

"당연히 저는 잘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NKVD 일은 제 소관이 아니니 말이죠.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생각 외로 순순히 넘어가자, 몰로토프는 당장의 위기를 피한 것이라 생각하고 속으로 안도했다.

 

"귀국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까?"

 

이든은 몰로토프로부터 건네받은 서류철을 들어 보였다.

 

몰로토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명단은 당장 필요한 것들만 추려낸 것입니다."

 

그 말인즉, 앞으로 더 요구할 게 있다는 것이다. 순 날강도들 같으니라고.

 

"내각에서 검토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식량 지원 문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유보트들이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저희도 식량 문제는 미국에 의존하는 상황이거든요."

"그렇군요."

 

이 정도는 예상했었다.

 

애초에 자기 식구들 먹을 양식도 없는데, 이웃한테 밀을 퍼주는 가장은 없는 법이다.

 

역시 식량은 미국에 요구해야겠군.

 

"이제 저희 차례인 것 같으니 묻겠습니다. 저희가 귀국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지원하는 대가로, 귀국이 저희에게 지불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어야 하는 법.

거래란 그런 법이다.

 

그러나 눈앞의 몰로토프는 이 당연한 이치조차 모르는 듯 눈을 끔뻑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저희 소련에서 나는 광물과 목재로 값을 치를 겁니다."

"그렇습니까? 허나 목재는 저희도 캐나다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급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까?"

"......고려해보겠습니다."

"총리께선 저희가 지원하는 물량만큼 귀국으로부터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히 상응하진 않더라도, 우리만 손해 봐선 안 된다, 이 말씀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독일과 전쟁 중이라 사정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저희도 독일과 전쟁 중입니다. 그것도 귀국보다 훨씬 먼저 전쟁 중이었죠. 그렇다면 변제는 언제 이루어질 예정입니까?"

"전쟁이 끝난 뒤로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내각에서 반대할 겁니다. 저희가 귀국의 말 하나만 믿고 귀중한 물자를 지원할 수 없다고요. 전쟁이 끝나고 귀국이 말을 바꾸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소비에트 연방은 그런 치졸한 짓을 하지 않......."

"저희의 입장이 정반대였다면, 귀국도 같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제 말이 틀렸나요?"

 

정곡을 찌르는 일침에 몰로토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영국이 이렇게 단호하게 나올 줄 예상 못 했던 그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은 전쟁 중이지 않습니까? 같은 적을 두고 싸우는 동지로서 너무 계산적으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이래서야 같이 파시스트들을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저희는 귀국이 공격당하기 전부터 독일과 싸워왔고, 귀국의 도움 없이 우리 본연의 힘만으로 독일을 꺾을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귀국은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갈라 먹고, 핀란드를 침략했으며, 발트 3국을 합병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몰아치는 강펀치에 몰로토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가 케임브리지 사건을 입에 담은 것도 귀하께 국내 상황을 숨김없이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내각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조차 귀국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만약 저희가 귀국의 요청대로 물자를 보냈다간 곧장 국민이 들고 일어설 겁니다."

"......."

"저희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귀국을 도울 순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같은 적을 둔 사실상의 동맹이긴 합니다만, 저희만 손해를 보기엔 사정이 너무나 빠듯합니다. 따라서 귀국의 요구를 당장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다 합리적인 대가를 제시한다면, 그때 귀하가 요청하신 지원을 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상의 문제는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군요."

 

이든의, 정확히는 이든을 앞세운 처칠의 완강한 입장에 몰로토프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너무 우려하진 마십시오. 저희는 언제든지 귀국과 협력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귀국이 요청하신 물품 중에서 의약품만큼은 제가 총리를 잘 설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관."

 

모스크바에서 런던까지 온 그가 이번 회담에서 겨우 건진 것은 의약품 일부가 다였다.

 

아예 소득이 없다곤 할 수 없지만, 본래 목표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몰로토프는 자신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을 서기장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영국은 힘들다.

그렇다면, 미국에 손을 내미는 수밖에.

 

그나마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소련에 우호적이라고 하니, 말이 통하지 않겠는가.

 

***

 

몰로토프와의 회담이 있던 날 저녁, 처칠은 이든과 만났다.

 

"고생했소이다, 장관. 정말 수고 많았소."

"아닙니다, 총리."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처칠에게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총리, 저는 걱정됩니다."

"응? 무엇이 걱정된단 말이오?"

"저희가 너무 철벽을 치면, 소련이 역으로 독일과 협상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이든은 영국이 소련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여 분노한 스탈린이 역으로 독일과 강화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이미 스탈린은 2년 전, 영-프와의 동맹이 결렬되자 역으로 나치와 손을 잡았다.

 

그런 전과가 있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든이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소련이 독일과 강화하는 것을 넘어 다시 독일과 손을 잡고 중동과 인도로 밀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처칠도 우려하는 것이었지만, 당장은 그럴 일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직 남아있는 패가 있는 한 소련이 독일과 강화하려 들지는 않을 거요. 그래서 내가 회담 때 협상의 여지는 남겨두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건 그렇지만......."

"이보시오, 장관. 상황이 급한 건 저들이지 우리가 아니외다. 원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하지 않소."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국제적 상황과 그 안에서 자국의 상황을 제시하며 처칠이 지적했다.

 

"게다가 저놈들은 우리 내부에 간첩들까지 심어놓지 않았소. 그걸 알면서도 우리가 놈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놈들은 아예 우리를 호구로 볼 거요. 뒤통수를 처맞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물자만 퍼주는 병신들이라고. 천하의 대영제국이 한낱 빨갱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처칠은 말을 멈추곤 시가 케이스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던 비서가 라이터를 꺼내 시가에 불을 붙였다.

 

"장관도 한 대 피우시겠소이까?"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도록 하지요."

"아무튼, 우리가 저 빨갱이들 비위를 맞춰줄 필요는 없소. 애초에 놈들도 우리한테서 얻어먹을 게 많지 않다고 생각 정도는 하고 있을 거요. 우리가 놈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도, 저놈들에겐 다 계산 안에 포함된 일이겠지."

 

처칠은 시가 연기를 뿜어내며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말했다.

 

"아마도 놈들은 이제 미국에 손을 뻗으려고 할 거요. 틀림없이. 하지만 놈들 마음대로 되지 않게 내가 손을 써놨지."

"어떻게 말입니까?"

 

이든이 놀라서 묻자, 처칠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의 친구 FDR에게 충고를 좀 해뒀소. 소련의 요구대로 다 들어주지 말라고. 우리에게 간첩을 심어놨던 것처럼, 미국에도 같은 수작질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처칠이 내뱉은 시가 연기는 오래도록 방안에 머물렀다.

 

***

 

"몰로토프, 이 무능한 머저리 같으니라고."

 

영국의 몰로토프로부터 회담의 결과를 전보로 보고받은 스탈린은 혀를 차며 자신의 부하를 욕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회담이 사실상 결렬될 이유가 몰로토프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몰로토프를 욕한 이유는, 그저 그가 싫어서였을 뿐.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 스탈린은 모르지 않았다.

 

케임브리지 간첩단 사건이 터진 뒤로 영국에선 소련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에도, 영국인들의 소련을 향한 경계심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 이 정도인데, 정치인들은 오죽할까?

 

케임브리지 간첩단 사건만 아니었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스탈린은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 그 원인 제공자는 그의 시야가 미치는 곳에 있었고.

 

"베리야!"

"예, 옙! 서기장 동지!"

 

자신의 이름이 불린 베리야는 화들짝 놀라 차렷 자세를 취했다.

 

"이 무능한 놈!"

 

스탈린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베리야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뺨을 재떨이로 후려쳤다. 대리석으로 된 재떨이였다.

 

순식간에 뺨을 강타당한 베리야는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스탈린의 손에 들린 재떨이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이 병신 같은 놈! 쓸모없는 머저리 새끼야!"

 

스탈린은 쓰러져 부들거리고 있는 베리야를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며 방이 꺼지도록 고함을 쳤다.

 

"네놈이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지? 영국에 첩자들을 심어뒀으니, 이제 영국은 우리 손바닥 안에 있다고. 그 결과가 이건가? 어?"

"죄, 죄송합니다! 서기장 동지! 제발!"

 

베리야의 울부짖음에도 스탈린의 구타는 계속되었다.

 

힘에 부쳐 겨우 구타를 끝낸 스탈린은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소매로 대충 문질렀다.

간만에 화를 내서 그런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몇 분 전까지 말끔한 제복을 입고 있던 베리야는 쓰레기통에 내던져진 걸레 쪼가리 신세가 되어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도 일어설 힘이 남았냐며 코웃음 쳤다.

 

"썩 꺼져.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내 지켜볼 테니 처신 잘하라고."

 

베리야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퇴장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무래도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기엔 힘들 것 같소."

 

스탈린의 말에 그의 측근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전, 베리야가 복날 개처럼 두들겨 맞는 광경을 직접 봐서 그런지 숨 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들 중 베리야와 친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베리야를 싫어했고, 동시에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토록 증오하던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두들겨 맞을 때 그들이 느낌 감정은 희열이 아니라 공포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들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감.

 

스탈린은 측근들이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보드카를 꺼냈다.

 

속을 달래기 위해선 보드카가 필요했다.

특히 지금처럼 열불이 나는 상황에선 반드시.

 

"역시 미국에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군. 이의 있소?"

 

이의 없음. 인정.

 

평소 자본주의는 병이자 악이며,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떠벌리던 자들도 지금만큼은 스탈린의 말에 딴지를 걸지 못했다.

 

스탈린에게 겁을 먹은 것도 있지만, 그게 또 사실이었으니까.

 

미국은 이미 자국의 모든 생산력을 총동원하여 물자를 '찍어내고' 있다.

 

막대한 생산력을 보여주고 있는 미국이라면, 특히 처칠과 달리 소련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루스벨트라면 틀림없이 소련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받는다면, 모든 산업역량을 온전히 무기 생산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산한 무기들을 앞세워 침략자들을 무찌르고, 나아가 베를린까지 진격한다!

 

두고 보라지, 처칠 놈.

네놈과 영국이 없어도 미국이 있으니까.

 

스탈린은 루스벨트에게 전할 친서의 첫 문장을 뭐라고 쓸지 고민하며 보드카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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