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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4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6화

96화 엇갈린 운명 (2)

 

 

카이로를 점령한 아군은 혹시 모를 적군의 역습에 대비해 방어태세를 굳히는 한편, 내부로는 집 안 정리에 들어갔다.

 

비록 추축군을 몰아내고 카이로를 탈환했다곤 하나, 여전히 시내에는 퇴각에 실패한 잔당들이 남아 항복을 거부하며 분탕질을 치고 있었고, 여기에 이집트 현지인들도 동조해 아군의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오밤중 몰래 경계근무 중인 병사들 뒤로 접근해 수류탄을 던지고 도망치거나, 순찰 중인 헌병들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도망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무기고가 습격당하거나, 주차해둔 전차를 탈취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둘 다 무위로 그치긴 했지만.

 

아무튼 전투 종료 후 일주일 동안 아군은 이런 방식으로 30명이 넘는 병사들을 잃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오킨렉은 경계태세를 더욱 강화하고 통금령을 내렸다.

 

병사도 경계근무나 지휘관의 특별 허가를 받지 않은 이상 해가 진 이후로 외출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는 장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규정을 무시하고 멋대로 외출을 나갔다 적발될 경우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이어 아군은 도시 곳곳에 전단을 붙여, 숨어있는 추축군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테러리스트'를 신고하는 이들에게 포상하겠다고 밝혔다.

 

전단이 붙고 하루 만에 3명의 독일군이 시내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 헌병대가 출동했다.

 

신고는 사실이었고, 독일군은 저항하였으나 지휘관 노릇을 하던 중사가 죽자 항복했다.

 

이 과정에서 아군 2명이 전사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거야 원. 모처럼 카이로까지 왔는데 구경조차 할 수 없다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불순분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까요. 또 어젯밤에 무단으로 외출한 중사가 골목길에서 뒤통수에 총을 맞은 채로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내 푸념에 게이츠 원사는 가볍게 대꾸하여 경계근무서에 사인을 기입했다.

 

계급이 낮지만 경험치 MAX인 부하의 말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하...... 그래도 전 우릴 이렇게나 싫어하는 이집트인들이 많으리라곤 잘 몰랐습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간 거죠, 뭐. 애초에 아랍놈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스로 생각할 줄도 모르는 우매한 녀석들이니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인종차별적인 말을 툭 내뱉는 게이츠 원사.

 

21세기였다면 아주 난리가 났겠지만, 지금은 시대가 시대인지라 저런 발언쯤은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전생이 동양인이었던 내 입장에선 조금 듣기 거북하군.

 

"그래도 그 우매한 이들이 과거에 피라미드를 만들 것을 보면 용하지 않습니까?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세울 때 우리 선조들은 아직 원시시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건 그렇죠. 지금은 정반대가 되었지만."

 

게이츠 원사도 이 말만큼은 반박할 수 없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무료함을 죽이기 위해 사흘 전의 신문을 펼쳤다.

 

아군이 어떤 전과를 거두었고 제리-또는 잽스-들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에 대한 기사를 지나고 나면 본토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기사가 쭉 이어졌다.

 

캔터베리의 한 농가에서 머리가 두 개인 송아지가 태어났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교통사고를 당한 소년을 응급조치로 살리다, 레스터에 사는 노부부가 일평생 모든 돈의 절반을 나라에 기부하다, 처칠 총리가 헤이스팅스의 군 기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다 등등.

 

나름 재미있거나 흥미 있는 소식들도 많았지만, 내가 찾는 것은 이런 시시콜콜한 뉴스가 아니었다.

 

페이지를 계속 넘겨 끝자락이 온 후에야 겨우 내가 찾던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소련군의 반격이 실패하면서 민스크가 함락되고, 12만 명이나 되는 소련군 병사들이 포로가 되었다라.......

 

요즘 잔일이 많아서 뉴스를 듣지 못했더니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기사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거둔 대승에 대해 언급하며 소련군이 연패를 거듭하고 있다고 썼지만, 원래 역사를 아는 내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실제 역사에선 독일군은 개전 8일 만에 민스크를 함락시켰고, 연이어 3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포로로 잡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여기선 개전 후 한 달이 훨씬 지난 후에야 민스크를 함락시켰고, 포로도 12만 명에 그쳤다(사실 이도 엄청난 수치이긴 하다만).

 

원 역사와 비교할 때 독일군의 진격이 무척 느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래서야 연말까지 모스크바 근처까지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아니, 르제프까지도 못 갈 가능성이 높겠는걸.

 

이렇게 되면, 내년에는 어떻게 되려나?

 

역사에서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처까지 갔지만 끝내 점령에 실패했고, 히틀러는 생각을 바꿔 이듬해인 1942년에 모스크바 대신 러시아 남부를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여기선 모스크바 근처까지도 가지 못했으니, 내년 여름 독일군의 목표가 모스크바 진공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목표가 바뀌어도 그 끝이 실패로 끝날 것이 뻔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더 유리한 조건에서도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했는데, 무슨 수로 이겨?

 

어쩌면 독일군의 동부전선 퇴출이 1, 2년 앞당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럴수록 독일의 패망은 더욱 빨라질 테고.

잘하면 1945년이 아니라 정말로 1944년 겨울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상병 애덤 키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들어와."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애덤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무슨 일이냐?"

"연대장님께서 장교들은 오후 7시 30분까지 지휘실로 모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연대장님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막사에는 전화가 없어 이렇게 병사를 통해 전달 사항이 전파되었다.

 

마침 지금 시간이 7시 20분이니까, 슬슬 일어나서 준비하면 되겠군.

 

그나저나 이번엔 무슨 새로 할 말이 있다고 모이라고 한 걸까?

 

***

 

"모두 모였나? 모인 것 같군."

 

연대장 고든 스콧 대령은 지휘실에 모인 장교들을 쭉 둘러본 뒤 빠진 얼굴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이라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곧 있을 본국 송환 때문에 그렇네."

 

본국 송환이라고?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던 사람들의 눈이 본토 송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나야 얼마 전 채권홍보 일로 본토에 다녀왔지만, 여기 이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희소식에 흥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스콧 대령도 우리의 표정이 밝아진 것을 보곤 피식 웃었다.

 

"자식들, 집에 간다니까 좋냐?"

 

좋은 소식이긴 한데,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본토 송환이라니, 대체 뭣 때문에?

 

내가 알기론 한 번 전역에 투입되면 1~2년 동안은 본토로 가지 못하고 같은 전장에 짱박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들었는데.

 

"착각 말어. 니들 쉬라고 보내는 게 아니라, 새 임무 때문에 보내는 거니까."

 

새 임무? 그건 또 뭐야?

 

스콧 대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편에서 대기하던 부관과 당번병이 이동식 칠판을 밀며 나타났다.

 

칠판에는 커다란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사진 속에는 크롬웰 전차가 있었다.

 

"이놈은 우리 기술자들이 새로 개발해낸 신형 순항전차 크롬웰이다. 차체 전면장갑은 마틸다와 동일한 75mm에, 엔진은 신형 엔진을 달아 속도는 최대 54km/h, 주포는 새로 개발된 6파운더로 2파운더와는 차원이 다르지. 뭘 보더라도 마틸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전차네. 우리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이 녀석의 조작법에 대해 배우러 가는 것 때문일세. 앞으로 너희들이 타고 다닐 테니까 말이야."

 

***

 

"만나서 반갑습니다, 몰로토프 장관."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만면에 띈 채 회담장으로 들어서는 소련 외무인민위원 바쳬슬라프 몰로토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몰로토프도 얼른 이든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별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이곳까지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편안한 여행길이었지요."

 

둘의 대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시곗바늘이 오후 1시를 가리킬 무렵, 이든은 덕담을 멈추고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했다.

 

"그럼, 귀국이 저희에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예, 장관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조국 소비에트는 지금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서부전선군의 반격이 대재앙으로 끝난 후, 독일군을 동쪽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민스크와 빌뉴스, 리가, 오데사, 빈니차 등 내로라하는 수많은 도시가 함락되었으며, 이제는 키예프도 위험했다.

 

붉은 군대가 악착같이 싸워 독일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황은 소련에 매우 불리했다.

 

"파시스트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을 둔 입장으로, 우리 소비에트 연방은 대영제국과 보다 발전된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이든은 찻잔을 들어 실론산 최고급 홍차의 맛을 음미했다.

 

반면, 몰로토프는 자기 몫의 홍차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따라서, 영국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과학 장비와 설비, 의약품의 보급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여기 그 목록들입니다."

 

몰로토프가 내민 서류철에는 소련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의 명단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이든은 그것들을 유심히 읽어보는 척하다가 도로 덮어두었다.

 

"그리고 식량에 대한 보급도 필요합니다."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가진 우크라이나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우크라이나는 지금 전쟁터였다.

 

아직 동부지역에는 전쟁의 참화가 닿지 않았지만, 언제 그곳도 독일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소련은 독일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우크라이나에 있는 모든 공장을 뜯어서 동부로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공장은 어떻게 이전이 가능하지만, 농지는 그렇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역이 독일에 넘어간다면, 소련의 식량 보급은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몰로토프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던 이든은 손에 깍지를 풀고서 대답했다.

 

"저희 영국의 사정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얼마 전 카이로 탈환에 성공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집트 전선은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동남아 지역도 그렇고요."

 

이든은 얼마 남지 않은 홍차를 들이켰다.

여전히 몰로토프의 찻잔에는 홍차가 가득 차 있었다.

 

"무엇보다, 정부 각료들과 국민이 귀국에 원조를 제공하는 것에 동의할지 의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언급하기 조금 민망한 사안입니다만, 귀하께선 '케임브리지 간첩단 사건'을 알고 계시겠지요?"

 

몰로토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케임브리지 간첩단 사건. 외부에 대해 정보가 통제된 소련에선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영국인들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그 사건.

 

회담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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