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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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5화
95화 엇갈린 운명 (1)
"드디어 우리가 해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하하하하!"
카이로 탈환 소식이 전해진 뒤로 다우닝가 10번지는 축제 분위기였다.
영국군이 이집트 방면에서 공세를 개시했을 때, 처칠은 국민에게 지나치게 선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괜히 열심히 선전했다가 공세가 실패로 끝날 경우, 뒤따를 후폭풍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공세가 성공하여 카이로를 탈환하자, 정부는 영국군이 거둔 성과에 대해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승전 소식에 목말라 있던 국민들도 모처럼 들려온 의미 있는 승리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라디오에선 연신 카이로 탈환 소식이 흘러나왔고, 피라미드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영국군 장병들의 사진을 일면에 실은 신문들이 날개 달린 듯이 팔리고 있었다.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군!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지난 며칠간 지옥과 천국을 오간 처칠은 근심을 털어낸 채 호탕하게 웃었다.
동아프리카 주둔 이탈리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소식도 그를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동아프리카 전선이 전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긴 하나, 국민들 중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처칠은 내친김에 이 소식도 적절히 포장해서 국민에게 선전하기로 했다.
"동아프리카의 이탈리아군 세력을 박멸함으로써 인도양 진출을 노리던 추축국의 야욕 분쇄-이 정도 제목이 적당하겠군. 만약 아군이 실패했다면, 이탈리아 해군이 일본군과 손잡고 인도양에서 더욱 날뛰었을 거란 부연 설명도 추가하고 말이야. 알겠나?"
"알겠습니다. 신문사에 그리 연락하겠습니다."
승전이라는 달콤한 축제를 맞아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처칠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각하, 독일 동부전선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아니. 무슨 일이 생겼나?"
보좌관의 말을 들은 처칠은 곧바로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굴리기 시작했다.
설마 소련이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기라도 한 것일까? 그럼 안 되는데.
소련이 독일과 강화했다간 히틀러는 동부전선에 있는 병력을 아프리카로 돌려 다시 카이로를 공격하려 들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처칠이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어나지 않았다.
되려 그것과 정반대의 소식이었다.
***
"이 무슨......."
방금 모스크바로부터 전해진 전문을 받아든 서부전선군 총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은 말을 잊지 못했다.
전문에는 즉시 반격하여 독일군을 분쇄하고 국경 지역으로 몰아내라는 스탈린의 지시가 적혀 있었다.
파블로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민스크도 겨우 지키고 있는 상황인데, 뜬금없이 반격이라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란 말인가?
물론 파블로프는 제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경솔한 행동 따윈 저지르지 않았다.
지위에 상관없이 스탈린의 눈 밖에 나거나 스탈린을 조금이라도 흉본 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하기 일쑤다.
소련에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으면 늘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는 참모들에게도 모스크바의 전문을 보여줬다. 참모들도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차마 위대한 서기장 동지를 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주어'를 빼놓은 채 '약간의 불만'과 임무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게 전부였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장 동지. 방어도 힘든 마당에 반격이라니요."
"모스크바는 현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모스크바의 명령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
"그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스크바에 현 상황에 대해 보고하며 임무를 수정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파블로프와 그의 참모들은 모크스바에 서부전선군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며, 반격 명령의 이행이 실질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단호했다.
그에게 일선 장병들의 어려움 따윈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파블로프가 보낸 전문을 받아든 스탈린은 코웃음을 치며 보드카 잔을 비웠다.
"겁쟁이 놈. 독일군은 무섭고 나는 무섭지 않나 보지?"
스탈린은 파블로프가 충분히 반격할 역량이 있는데도 지레 겁을 먹고 웅크려 있는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스탈린의 옆에 서서 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국방 장관 티모셴코와 주코프가 파블로프의 변호를 위해 입을 열었다.
"서기장 동지. 파블로프 동지는 패배주의자가 아닙니다.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헤아려주신다면......."
"듣기 싫소. 애초에 이런 변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패배주의에 물들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스탈린의 서슬 퍼런 눈빛에 둘은 입을 다물었다.
스탈린은 곧바로 파블로프에게 새로운 전문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길게 쓸 필요 없고, 내가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만 상기시켜주게. 빠른 시일 안으로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크게 실망할 거란 얘기도 함께 말이야. 알겠나?"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
최대한 간곡하게 전문을 보냈는데도, 협박에 가까운 명령문이 날아오자 파블로프는 모든 것을 체념했다.
서기장은 이미 다른 이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계속 명령을 거절하다간, 그는 독일군의 총알 대신 아군의 총알에 맞게 될 것이다.
살고 싶으면, 명령에 따르는 수밖에.
아프리카 이집트에서 영국군이 카이로를 향해 내달리고 있을 때, 벨라루스에선 파멸을 향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파블로프는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공세를 감행했다.
민스크 일대의 독일군 포위망에 대타격을 입혀 포위망을 분쇄하고, 독일군을 국경까지 몰아낸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포병대의 일제 포격 뒤로 전차들이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소비에트를 위해, 스탈린을 위해 전진!"
"앞으로!"
공격의 선두에는 귀중한 신형 전차인 T-34 중형전차와 KV-1 중전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T-26, BT-5, BT-7 같은 경전차들이 뒤따랐다.
소련군의 공격은 처음에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소련군이 갑자기 반격을 가해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독일군은 당황했고, 저돌적으로 돌격해오는 소련군 전차대에게 전선 곳곳이 돌파당했다.
그러나 중부집단군 총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원수는 침착했다.
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그는 즉시 포병대와 기갑부대에게 명령해 적군의 측면을 찌를 것을 지시했다.
동시에 공군에도 지원 요청을 보내 슈투카 편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당황하지 마라. 이반(러시아인의 멸칭) 놈들의 발악일 뿐이야. 먼저 당황하는 놈이 지는 거야. 침착하게 적의 측면을 찔러 갈라놓으면 우리가 이겨."
***
전선을 돌파해 종횡무진 돌격하던 소련군 앞에 새로운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주의, 전방에 적 전지.
-모두 산──.
-주, 중대장이 당했다!
돌격하는 소련군 앞을 가로막은 것들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상대로 악명을 떨친 악마의 무기 88.
소련이 자랑하는 신형 전차인 T-34와 KV-1도 88의 일제 사격 앞에서는 맥을 추리지 못하고 터져나가기 일쑤였다.
포탑이 날아가 불기둥을 내뿜는 T-34 뒤로 또 한 대의 T-34가 88mm 철갑탄을 맞고 유폭을 일으켰다.
정면에서 88이 소련군 전차들을 두들기는 동안, 3호 전차와 4호 전차들로 이루어진 기갑부대가 측면에서 소련군을 공격했다.
이중 몇 대는 얼마 전 공장에서 출고가 시작된 장포신 75mm 주포를 장착한 신형 4호 전차(F2형)으로, 1km가 넘는 거리에서 목표물에 정확히 포탄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기존의 3, 4호는 물론, 장포신 50mm 전차포를 장착한 3호 전차조차 상대하기 어려웠던 T-34와 KV도 신형 4호 전차는 무리 없이 해치워나갔다.
"2시 방향에 T-34! 거리 800, 발사!"
"쏴!"
측면에 75mm 철갑탄을 맞은 T-34의 포탑이 허공으로 치솟자 포수가 환성을 질렀다.
"명중! 격파입니다!"
"잘했다, 다음!"
4호 전차 F2형들이 T-34와 KV를 상대하는 동안, 3호와 4호 전차들은 T-26과 BT 경전차들을 해치웠다.
하노마크에 탑승한 병사들은 전차들을 뒤따르는 보병들을 기관총으로 도륙했다.
육군의 지원 요청을 받고 전장에 나타난 슈투카들도 싸움에 가담했다.
"X발, 슈투카다!"
"이쪽으로 온다!"
"파벨, 후진해! 후진하라고!"
전차와 대전차포, 보병, 슈투카의 연계 플레이에 소련군은 숨도 쉬지 못하고 처맞았다.
일선 부대가 괴멸되었다는 보고가 전해질 때마다 소련군 지도부는 당황하여 후속부대를 투입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지금이라도 공세를 취소하고, 부대를 뒤로 물러야 했지만, 모스크바의 압박에 파블로프는 정상적인 지휘를 할 수 없었다.
이번 공세의 승패여부에 그의 목숨이 달려있었다.
이미 머리로는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강박적으로 공세를 지속했다.
그 결과,
"제11기계화군단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다, 다시 시도해봐. 통신이 과부화된 것일 수도......."
"급보입니다! 제1소총병군단이 괴멸당했다고 합니다."
"제36기병사단이 독일군에 투항했습니다!"
"빌어 처먹을 반역자 새끼들!"
휘하 부대들의 괴멸과 투항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파블로프의 얼굴을 점점 창백해졌다.
"민스크 북부 방어선이 돌파당했습니다!"
"독일군이 시내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대장 동지, 아군 전선이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이제 가망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야 합니다!"
"대장 동지!"
섣불리 공세에 나섰던 파블로프의 서부전선군은 보크의 중부집단군에 두들겨 맞고 완전 붕괴.
그 결과 민스크가 함락되고, 중부 전선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임무에 실패한 파블로프는 참모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미 독일군은 민스크를 거쳐 스몰렌스크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
영국군이 카이로를 탈환했을 때, 소련군은 민스크를 독일군에게 내주고 퇴각해야만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처칠은 콧방귀를 뀌며,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공산주의자들의 천국을 실컷 비웃었다.
"하여간 빨갱이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멍청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나치 독일의 등장으로 소련과는 뜻하지 않게 동맹이 되긴 했지만, 처칠은 본래 소련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히 꺼리는 걸 넘어 그는 소련을 극도로 혐오했다.
특히, 몇 달 전에 있었던 케임브리지 간첩단 사건 이후로 그는 소련을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다.
단순 처칠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영국인들이 그랬다.
평소 소련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해왔던 노동당조차 케임브리지 간첩단 사건 이후로는 소련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버리고 보수당과 같은 스탠스를 취하게 되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어제, 소련이 회담이 제안해왔습니다."
"소련이?"
보좌관의 말에 처칠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놈들이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회담을 제안해왔다는 건가?"
"나치에 맞서기 위해 공동의 전략 수립과 여러 면에서의 협력을 논의하고 싶답니다."
"하! 나치에게 처맞기 전까지 놈들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며 우리에게 간첩을 심어놨던 놈들이 뭐 어째? 배알도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처칠은 어이가 없었다.
우리 뒤통수를 치기 위해 각을 재던 놈들이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친한 척이라니.
그 뻔뻔함에 처칠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반공주의자이긴 했지만 동시에 현실주의자였다.
일단 나치가 가장 큰 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공산당을 무찌르는 것보다, 나치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 우선인 만큼, 소련과 완전히 척을 질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저 빨갱이들이 나치에게 다시 꼬리를 치게 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영국에게 돌아올 텐데. 그건 안될 일이지.
"마음 같아선 녀석들의 면상을 걷어 차주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 대신, 날짜와 회담 장소는 우리가 전한다고 전해."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