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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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2화
92화 사자와 여우 (3)
영국군이 이집트 방면에서 공세를 개시했을 때, 롬멜은 여전히 독일에 있었다.
히틀러에게 보다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는 오랜 사막에서의 생활로 건강이 크게 나빠진 상태였다.
독일에 남아 치료를 받으라는 주위의 권고가 끝없이 이어졌지만, 롬멜은 이를 거절했다.
보다 못한 히틀러가 직접 나서서 치료가 끝날 때까지 아프리카로 돌아갈 생각은 말라고 명령한 후에야 롬멜은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군이 공세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시 총통관저로 향했다.
"총통 각하, 영국군이 이집트 방면에서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장군."
"지금 당장 아프리카로 돌아가 부대를 지─."
"쓸데없는 소리."
히틀러는 롬멜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장군은 아직 치료도 다 끝난 상태가 아니지 않소. 그런 몸으로 어딜 간다는 거요?"
"총통 각하. 제 건강을 걱정해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제 몸은 제가 더 잘 압니다. 건강도 거의 다 회복한 데다, 병사들은 저보다 더 나쁜 환경 속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걸 두고 지휘관인 제가 치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독일에 계속 남아있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딴 생각을 한단 말이오? 아프리카 전황은 장군이 우려할 정도로 시급하지 않소. 나는 오히려 동부전선이 더 걱정이외다."
"총통 각하, 정 그러시다면 DAK에 대한 지원을 더 늘려주십시오. 병력과 물자만 충분하다면 우리는 금방 바그다드까지 갈 수 있습니다!"
"장군에겐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소. 그렇잖아도 요즘 동부전선이 난항을 겪고 있는 마당에 DAK까지 지원할 여력이 우리에겐 없소이다. 그러니 잠자코 치료나 받으세요."
그렇게 히틀러와 담판은 롬멜의 KO패로 끝났다.
같은 시각, 영국군은 시시각각으로 카이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순조롭게 풀리고 있군."
뙤약볕 아래 참모들과 함께 현 전황이 기록된 지도판을 들여다본 오킨렉은 자신의 예상대로 작전이 흘러가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가 지휘하는 영국군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카이로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비록 추축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지만, 진격과 점령은 예정된 시간 안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일주일 안으로 카이로를 탈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하지만 자만은 금물일세. 저놈들은 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행보를 보여왔으니까."
오킨렉이 우려하는 것은 카이로 외곽의 방어선이었다.
틀림없이 추축군은 카이로 외곽에 철통같은 방어선을 형성해놨을 것이다.
카이로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바보는 없을 테니까.
"틀림없이 지금쯤 제리들도 지원 병력을 증파하기로 결정을 내렸을 걸세. 놈들의 지원군이 지중해를 건너기 전에 서둘러 카이로를 탈환하고, 방어 태세를 굳혀야지."
오킨렉은 카이로를 탈환하자마자 도시 일대에 대규모 방어선을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다.
제리들과 파스타들은 분명 카이로를 재탈환하기 위해 공격해올 것이다.
겨우 힘들게 되찾은 도시를 다시 적들에게 뺏겨선 안 될 일이지.
문제는 처칠이었다.
그라면 틀림없이 카이로에 깃발을 꽂자마자 알렉산드리아까지 탈환할 것을 명령할 것이다.
애초에 이번 작전의 최종목표는 어디까지나 카이로를 탈환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총리께선 곧바로 진격을 명령하실 것 같습니다만."
부관도 처칠의 억척스러운 성격을 잘 아는지라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오킨렉이 누군가.
천하의 처칠마저 학을 뗄 정도로 원칙주의자가 아닌가.
"상관없네. 런던에서 어떤 명령이 날아오든 간에 귀를 닫아버리면 그만이니까."
"예?"
"어차피 총리께선 런던에 계신다네. 이곳에 있는 건 나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
"덥다, 더워."
더운 것은 버마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버마는 햇빛을 피할 그늘이라도 많았다.
하지만 이집트는 다르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버마와 달리, 이집트에선 그늘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모래벌판뿐.
"진짜 존나게 덥습니다."
살집 때문에 몸이 열이 많은 애덤은 땀으로 샤워를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벌레는 없으니까 그나마 낫네. 수통 좀 줘봐."
"여기 있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수통을 기울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물이 나오지 않았다.
"뭐야, 이거? 한 방울도 없잖아."
"아, 그거 제가 다 마셔서 그렇습니다."
태연하게 보고하는 애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야 이 새꺄, 그럼 수통은 나한테 왜 준 거냐?"
"그거야 소대장님께서 달라고 해서 드린 거 아니겠습니까?"
더욱 어이가 없는 답변이다.
그런데 이놈은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표정을 보니 날 골탕 먹이려고 텅 빈 수통을 준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수통을 달라고 하니까 준 것 같다.
하, X발. 의도가 없으니 욕하기에도 뭣한데.
"대위님, 정비 다 끝났습니다."
"어, 그래. 수고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할 동안, 열심히 전차를 손보던 정비병들이 수리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했다.
뙤약볕 아래서 정비를 하느라 땀이 폭포처럼 흐르는 중이다.
사막에서는 열기와 모래 먼지 때문에 엔진을 자주 손봐줘야 한다.
전투 도중에 엔진이 멈추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싫다면 말이지.
특히, 예전처럼 전차전 도중에 엥꼬가 나면...... 상상도 하기 싫구만.
"퓨즈 4개를 교체했고, 라디에이터도 손 좀 봤습니다. 못해도 사흘 동안은 잘 굴러갈 겁니다."
"좋아, 좋아. 늘 수고가 많아."
중대 전 차량의 정비가 끝나자 무어 소령은 다시 전진하기로 했다.
우리 중대가 대대의 최선두라 느긋하게 쉴 시간이 없었다.
다시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포탄이 날아왔다.
포탄은 1소대 3호 차량에 명중했다.
하필이면 궤도에 맞는 바람에 전차는 정지.
적 공격을 확인한 중대는 즉시 정지하여 포탄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부터 확인했다.
-11시 방향에 적 진지다! 파스타들이야!
뒤이어 시작된 적 보병들의 일제사격.
브렌건 캐리어와 트럭에서 하차하던 보병들이 총알 세례를 받고 픽픽 쓰러졌다.
병사들은 쓰러질 때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다만 춤을 추듯 괴이한 자세로 몸을 비틀며 쓰러졌다.
-중대, 좌우로 산개!
무어 소령의 명령에 맞춰 전차들은 좌에서 우로 넓게 퍼졌다.
한곳에 모여있으면 적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허나 이렇게 넓게 퍼져 있으면, 적은 어디를 먼저 쏴야 할지 혼란이 올 것이다.
-침팬지는 나를 따라 정면으로, 하마는 좌측으로, 얼룩말은 우측으로 돌격한다! 전진!
"수신 완료!"
나는 무전망을 소대망으로 돌린 뒤 애덤에게 가속을 명령했다.
적의 측면을 잡기 위해 전진하는데, 이번에는 우측에서 포탄이 서너 발이 날아왔다.
그중 한 발에 얼룩말 3의 궤도가 끊어졌다.
-여기는 얼룩말 3! 궤도 피탄! 기둥 불가!
"젠장, 이번엔 또 뭐야?"
다행히 적들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모래언덕 위로 포탑을 내민 M14/41 5대가 우릴 노리고 있었다.
측면에 적들을 남겨둔 채 계속 움직일 순 없었다.
나는 즉시 소대에 반전을 명했다.
"여기는 얼룩말 1. 언덕에 있는 놈들부터 먼저 처리한다. 얼룩말 3은 현 위치에서 지원 사격하라."
-수신 완료.
파스타 놈들은 현명하게도 우릴 향해 돌격해오지 않았다. 위치를 고수하며 우릴 향해 포탄만 날려댈 뿐.
게다가 포탑만 내민 탓에 조준이 영 까다로웠다.
"발사!"
주포를 떠난 포탄은 M14/41 대신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불명중. 토마스, 재장전!"
"장전 완료!"
47mm 철갑탄이 전면에 작렬했지만 도탄 되었다.
나는 사격 명령을 내리기 전에 애덤에게 정지를 명령했다.
"정지!"
전차가 멈추고, 잭슨으로부터 조준 완료 소리를 들은 후에야 사격 허가를 내릴 마음이 생겼다.
"사격!"
바닥에 떨어지는 탄피 소리가 귀청을 때리고, 이어서 M14/40의 포탑에 불꽃이 튀었다.
해치가 열리고, 연기가 새어 나왔다.
"소대장님, 철갑유탄이 다 떨어졌습니다!"
"뭐어?"
적 전차 격파에 기뻐하기도 전에 토마스가 다소 우울한 소식을 알려왔다.
차내에 적재한 철갑유탄이 모두 바닥난 것이다.
"그럼 철갑탄은?"
"철갑탄은 아직 있습니다만, 10발밖에 안 남았습니다."
철갑탄까지 다 떨어지면 나중에 전차가 나타났을 땐 유탄만으로 싸워야 했다.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앞으로 사격에 더욱 신중을 기할 수밖에.
"잭슨, 집중해라. 이제부터 실수는 용납 안 한다."
"옙!"
얼룩말 2와 4도 발포하여 적 전차를 한 대씩 격파했다. 이제 남은 전차는 2대.
그런데 두 놈은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언덕을 넘어와 돌진하는 것을 택했다.
돌진하는 적들을 향해 얼룩말 3이 발포했지만 포탄은 빗나가고 말았다.
두 놈 중 한 놈은 나를 향해 발포했지만, 도탄 되었다.
그러나 녀석은 계속해서 달려왔다.
포탑을 돌려 놈을 조준하기 직전, 녀석과 내 전차가 충돌하고 말았다.
몸통 박치기를 시전한 녀석에게 포탄을 박아주고자 했지만, 포탑이 돌아가질 않았다.
녀석의 포탑에 주포가 걸린 것이다.
"후진해!"
하는 수 없이 후진해서 주포를 빼내려고 했지만, 이탈리아군 조종수가 계속 전진 페달을 밟고 있는 탓에 녀석도 덩달아 따라왔다.
참 뭣 같은 상황이었다.
주포가 걸려서 코앞에 적이 있는데도 쏘질 못하다니.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적 전차의 해치가 열리면서 적 전차장이 튀어나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권총을 들어 나를 겨냥했다.
"우왓!"
총탄은 나를 맞추지 못하고 대신 큐폴라에 명중했다. 튕긴 총탄이 오른손을 아슬아슬한 차이로 비켜나갔다.
녀석은 재차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은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기능 고장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총알이 없었거나.
"Accidenti(빌어먹을)!"
그러자 놈은 다시 해치 안으로 들어가더니, 몇 초 후 야전삽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나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웨블리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야전삽밖에 없는 놈을 권총으로 겨눴다.
하지만 상대는 권총을 보고도 도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기자, 권총의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허벅지에 총탄이 박힌 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아악!"
놈은 허벅지를 부여잡으며 전차에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져 발버둥 치는 적 전차병을 보며 권총을 쏠까 망설이고 있는데, 헤드폰에서 얼룩말 2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룩말 1, 해치 안으로 들어가라! 지금 쏘겠다!
잽싸게 해치를 닫고 고개를 숙이자 얼룩말 2는 내 전차에 찰싹 달라붙은 M14/41을 향해 발포했다.
측면에 구멍이 뚫린 전차는 섬광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폭탄 파편과 전차 부품들이 해치를 두들겼다.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전투는 끝나 있었다.
우리가 적 전차들과 싸우는 사이, 1소대와 2소대는 대전차포의 공격을 받아내며 진격, 대전차포를 진지째로 짓밟아버렸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이전의 놈들과 달리 완강하게 저항했다.
대전차포가 당한 후에도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대신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보병들까지 가세하여 겨우 적들을 모두 처리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20명이 전사하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우리는 진격을 계속했다.
기름이 거의 바닥나 재급유를 위해 정차할 즈음, 지평선 너머로 도시의 전경이 희미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냈다.
저곳이 바로 카이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