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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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91화
91화 사자와 여우 (2)
"빨리! 빨리! 서둘러라! 시간이 없다!"
"꽉 조여! 중간에 풀리면 전부 다 X 돼!"
공병들이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금방 부교 1개가 완성되었다.
이어 2개의 부교가 덩달아 완성되었고, 육지에서 대기하던 차량들은 즉시 부교를 타고 운하를 건넜다.
병사들을 가득 태운 브렌건 캐리어들과 베드포드 트럭들이 덜커덩거리는 부교를 지나 전장으로 병사들을 실어 날랐다.
나는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의 행렬이 부교를 지나는 것을 지켜보며 서둘러 우리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느려서야 원.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 차례가 올 것 같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애덤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짬밥이 꽤나 쌓여서 그런지 녀석의 목소리에선 여유가 물씬 느껴졌다.
"아직 부교가 3개밖에 없어서 그래. 한 10분 뒤엔 이 정체도 조금 풀리겠지."
지금까지 맨날 당하기만 하다가 모처럼 각 잡고 들어가는 반격이라 그런지 병사들의 사기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아직 작전은 브랜슨 대령의 말처럼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시작된 지 겨우 3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저 연기들 좀 봐. 20개는 넘겠어."
잭슨은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수십 개의 연기 기둥들을 보며 희망 섞인 관측을 내놓았다.
"저 정도 포격이면 제리들은 죄다 죽었겠죠?"
"글쎄다. 몇 명 정도는 살아있을지도."
아무리 엄청난 규모의 포격이라도, 적을 100% 몰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호 안에만 들어가 있어도 생존율은 비약적으로 올라가니까.
아마 포격이 끝나고 이쪽의 공격이 시작되면 어디선가 하나둘씩 기어 나와 격렬하게 정항할 거다.
우리가 잡담을 나누는 동안 부교 2개가 더 완성되었고, 대기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우리 대대 차례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 적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적기다! 모두 주의!"
"슈투카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저편에서 슈투카 2대가 나타나 곧장 이리로 날아왔다.
곧바로 40mm 대공포와 대공기관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어 강철새들을 쫓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놈들은 쏟아지는 대공포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날아왔다.
녀석의 하부에 달린 육중한 폭탄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잡았다!"
아군 대공포가 한 녀석의 오른쪽 날개를 맞추었다.
날개가 부러진 슈투카는 중심을 잃고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녀석은 추락하기 직전, 폭탄을 투하했지만 조준이 엉망이었던 탓에 폭탄은 부교에서 멀리 떨어진 운하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신관이 오작동해서인지 폭발로 인한 물기둥은 없었다.
지면에 처박힌 슈투카는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그러나 남은 한 놈은 달랐다.
녀석은 마치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 단원처럼 기체를 이리저리 비틀며 포화를 피해 비행했다.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신들린 듯한 조종술이었다.
어느새 바로 부교 코앞까지 온 슈투카는 급강하하며 폭탄을 투하했다.
폭탄을 투하한 뒤, 녀석은 곧바로 기수를 올려 폭발 반경에서 벗어났다.
슈투카가 투하한 폭탄은 부교 한가운데에 그것도 부교를 지나던 전차 바로 뒤에 떨어졌다.
폭발은 코앞에 있던 크루세이더 전차까지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했다.
부교가 끊어지면서, 부교를 지나고 있던 전차들이 잇달아 운하에 빠졌다.
금쪽같은 부교 한 개와 전차 여러 대를 날려버린 슈투카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대공포화를 무시하듯 꼬리를 흔들며 지평선을 향해 날아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대대에 피해는 없었다.
공병들이 끊어진 부교를 고치는 사이 무어 소령으로부터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중대, 전진. 차량 간격 잘 유지할 수 있도록.
1소대와 2소대 전차들이 먼저 운하를 건너고, 그다음이 내가 지휘하는 3소대였다.
운하를 건너는 동안, 나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해치를 활짝 열어둘 것을 지시했다.
혹시 물에 빠지면 지체없이 탈출할 수 있어야 하니까.
전차가 가장 취약할 때가 바로 다리나 부교, 바지선을 이용해서 강을 도하할 때다.
길이 일직선인 탓에 어디 도망칠 곳이 없는 데다가, 방금처럼 슈투카가 공격해올 경우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한 탓에 그저 적기가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라야 했다.
부교를 건너는 동안 나는 마음을 졸이며 하늘을 응시했다.
언제 독일기들이 나타나 기총소사를 퍼붓거나 폭탄을 머리 위로 떨어뜨릴지 몰랐다.
부하들도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지 부교를 건너는 동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우 부교를 건너 육지에 닿았을 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을 정도다.
이게 뭐라고 숨이 다 막히냐, 진짜.
아직 전투는 시작도 안 했는데.
"일단 물귀신이 되는 일은 피한 것 같습니다."
토마스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그럼 이제 카이로까지 달려볼까?"
***
"전투 준비! 토미들이 온다!"
"대가리 모두 들어! 견착 제대로 하고!"
"명령 떨어지기 전에 방아쇠 당기는 놈은 손가락 잘라버린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돌격해오는 영국군의 모습을 본 독일 병사들은 이를 악문 채 사격 자세를 취했다.
좋은 날은 이제 다 갔다.
과거에는 그들이 공격자 입장이고, 영국군은 방어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정확히 그 반대가 되었다.
대다수의 독일 병사들은 어째서 도망치기 바빴던 영국군이 반격에 나서자 어째서 자신들이 방어하는 입장이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눈앞의 적들을 막지 못하면, 그들은 끝장이라는 점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X발, 저게 전부 다 몇 대야?"
"우린 전차는커녕 장갑차도 없는데... X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에겐 전차가 한 대도 없었다.
1개 중대 규모의 보병들이 방어하는 구역에서 유일한 대전차무기라곤 PaK 38 50mm 대전차포 3문이 전부.
"거리 700, 철갑탄 장전!"
누가 봐도 불리한 싸움이다.
허나 이런 사막에선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다.
도망쳐봤자, 물 한 방울조차 없는 사막에서 길을 헤매다 결국 탈수로 쓰러질 뿐.
살고 싶다면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기는 길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거리 500, 쏴!"
전차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대전차포 3문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명중, 격파!"
"재장전!"
마틸다보다 장갑이 얇은 크루세이더는 속도가 빨라 마틸다나 발렌타인으론 할 수 없는 기동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방어력이 약했다.
50mm 철갑탄은 크루세이더의 전면을 시원하게 뚫어버리며 전차를 불타는 관짝으로 만들었다.
적 전차 3대가 동시에 불타오르는 광경을 본 독일군 진영에서 환성이 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몰려오는 수십 대의 전차들을 보자 금방 사그라들었다.
대전차포병들이 2탄을 날리려는 찰나, 영국군도 발포했다.
20발이 넘는 포탄이 날아와 독일군의 참호에 작렬했다.
이 중 한 발이 대전차포의 포방패에 명중하여 대전차포병들을 대전차포와 함께 날려버렸다.
-전진! 다 쓸어버려!
생사를 건 사투의 소음은 이집트 사막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한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
"또 한바탕 싸우는 모양이군."
포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연기 몇 개가 시야에 잡혔다.
틀림없이 저곳에선 아군과 독일군-혹은 이탈리아군-이 싸우고 있으리라.
벌써 2시간 채 달리는 중이지만, 우리는 아직 적과 만나지 않았다.
아니, 적이라면 만났군.
다만 그 적이란 놈들이 죽어있어서 그렇지.
아군기에게 당한 것으로 이탈리아군 트럭 2대였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기관포를 정면에서 맞아서 그런지 차량 자체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했다.
짐칸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또 어떻고.
으깬 토마토도 이것보단 상태가 덜할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불쌍한 녀석들.
저 녀석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태어난 나라를 잘못 만났다는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야."
"뭐가 말입니까?"
"아까 봤던 파스타 녀석들 알지? 기관포에 잘게 다져진 녀석들."
"예."
"만약 무솔리니가 히틀러 엉덩이 대신 처칠 엉덩이에 붙었어도 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안타까워."
"본인들이 병신같은 지도자를 세웠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꼬우면 무솔리니를 지지하지 말았어야지."
토마스의 통렬한 일침.
녀석의 말대로, 이탈리아인들이 무솔리니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비극이다.
하지만 어쩌겠어?
니들이 선택한 두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쿵!
"어, 뭐야?"
몸에 해로운 모래 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달리고 있는데 웬 쇠뭉치 하나가 날아와 땅을 파고들었다.
자세히 보니 폭탄이었다.
다만 철갑탄이라 폭발하지 않았을 뿐.
캉!
뒤이어 날아온 녀석은 전차 장갑판에 튕겨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모두 주의! 대전차포다!"
나는 쌍안경을 꺼내 어디서 포탄이 날아왔는지 살폈다.
모래바람이 분 탓에 시야가 엉망이었다.
이래서야 어디서 포탄이 날아왔는지 알 길이 없다.
내가 대전차포를 찾느라 고군분투하는 사이, 또 한 발의 포탄이 날아왔다.
포탄은 이번에도 도탄.
그러나 자욱한 모래 먼지 탓에 섬광은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도탄된 것을 보면 88은 절대로 아니고, 그보다 더 작고 약한 놈이리라.
나는 입을 움직여 토마스에게 유탄 장전을 명령하곤 눈은 계속 움직여 적의 섬광을 찾았다.
"아, 찾았다! 2시 방향!"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모래 먼지가 걷히자, 적의 섬광이 눈에 들어왔다.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이탈리아군.
대전차포에 포방패가 없는 걸로 봐선 블레르 47mm 대전차포가 분명했다.
"조준 완료! 쏠까요?"
"그래, 쏴!"
대전차포가 유탄에 맞아 박살 나자 이번에는 참호에서 총격이 가해졌다.
제법 격렬한 사격이었지만 나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이놈들은 총알로 전차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애덤, 전진! 저 분수도 모르는 놈들에게 홍차 맛을 알려줘야지?"
"알겠습니다!"
브렌커 캐리어에 탑승한 병사들도 하차하지 않고 그대로 돌격을 감행했다.
이탈리아군의 참호에 도달해 유탄과 기관총을 번갈아 가며 쏘고, 전차를 이리저리 비틀어 참호를 뭉개자 이탈리아군은 금방 백기를 들었다.
"그만, 그만! 항복하겠다!"
서투른 영어로 필사적으로 항복을 외치는 이탈리아군 병사들은 우리에겐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그도 그럴 게 한창 진격해야 하는데 포로들을 데리고 갈 수 없으니까.
이에 무어 소령의 답변.
-무기만 뺏고 그대로 놔둬. 후속 부대에서 알아서 하겠지.
"수신 완료."
갈 길이 바쁜 탓에 우리는 녀석들의 무장만 해제하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격했다.
3분 정도 지나서 뒤를 돌아봤을 때 이탈리아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후속 부대가 볼 수 있도록 백기를 참호에 내건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