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9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9화
89화 작전의 신 (4)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세계 각국의 군대 중에 일본군만 유독 투항률이 낮았던 이유는 왜곡된 무사도와 세뇌된 충성심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항복해서 포로가 되는 걸 용납하지 않았던 경직된 사회 분위기다.
러일전쟁 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군은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병사들을 그럭저럭 잘 대해줬다.
그러나 군국주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자신들의 권력 안정을 위해 국민들과 병사들에게 적과 싸우다 죽지 않고 항복해서 포로가 되는 것은 무사도에 어긋나는 것이며, 나아가 국가에 대한 중대한 배신이라고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왜곡된 교육과 세뇌로 인해 포로가 되는 것 자체를 수치로 여기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포로가 된 당사자의 가족들은 그 즉시 비국민(非國民)으로 취급받아 한국, 대만, 만주 등 식민지인들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
병사들은 자신이 포로가 되면 자신의 가족들이 비국민으로 몰려 차별받는 것이 두려워 항복 대신 자결이나 자폭을 택했다.
이는 장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일본의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1945년 중분부턴 사기가 점차 낮아지면서 비국민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항복하는 병사들의 수가 점차 늘긴 했지만, 일본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곧 있으면 전쟁에서 이길 텐데, 포로가 되면 어쩌자고?
평생을 비국민으로 지탄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것이 국가와 가족을 위하는 길이다.
이런 왜곡된 정신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헛되이 목숨을 버렸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중좌나 되는 양반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거기다 한술 더 떠 적의 선전 방송에 출현하기까지 한다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교육받았던 것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며, 옥쇄하거나 자결할 필요 없이 항복하라고 한다면?
그 충격이 어마어마하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중좌나 되는 인간이 포로가 된 것도 깜짝 놀랄 일인데, 정부까지 비판하고 다니니.
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들조차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셈이니까.
실제 역사에서도, 미군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 포로가 된 일본군 병사들을 선전방송에 내보내 적잖은 효과를 얻기도 했다.
지금은 일본군이 한창 잘나가는 시절이니, 삐라 한 번 뿌렸다고 일본군이 무더기로 투항해오진 않을 것이다.
다만, 일본군에게 충격을 줌과 동시에 무의미한 자살 공격이나 악착같은 저항을 조금이라도 줄일 순 있을 것이다.
자기가 첫 빠따가 되긴 싫어도, 앞에 '훌륭한 선례'가 있으면 망설여지는 게 사람 심리거든.
***
상부는 내 건의를 받아들여 츠지 마사노부에게 직접 '투항을 권유하는 글'을 작성하게 시켰다.
츠지는 즉시 앉은 자리에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1초도 안 망설이네.
근데 표정은 또 왜 저렇게 진지해?
누가 보면 유서라도 쓰고 있는 줄 알겠네.
글을 다 쓴 다음에는 '관련 전문가들' 여럿이 달라붙어 녀석이 쓴 글을 수정했다.
그런 다음에는 녹음실로 데려가 녀석에게 본인이 쓴 글을 직접 읽게 시켰다.
녹음실에서 자신이 쓴 투항 권유서를 읽는 모습은 사진으로 찍어 삐라에 인쇄했고.
그렇게 완성된 '초판본'은 즉시 인쇄되어 최전선 각지에 뿌려졌으며, 녀석이 녹음한 목소리는 확성기를 통해 전선 각지에서 방송되었다.
"대일본제국의 병사들이여!
나는 츠지 마사노부 중좌라고 한다.
내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그대들이 헛된 죽음의 늪에 빠지는 것을 막고 평화를 이륙하기 위해서다!
그대들은 어째서 그대들의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가?
고향에서 그대들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가족들은 그대들이 죽어서 야스쿠니의 영령이 되는 것보다, 그대들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더 반길 것이다.
그대들의 정부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우며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그대들을 사지로 내몬 쓰레기들이다!
인간은 쓰레기를 위해 살 수 없다! 그대들이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쓰레기들의 명령을 듣지 마라!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영국군은 그대들을 학대하지 않으며, 잘 대해줄 것이다!
포로가 되면 그대들은 악의 군대가 아닌 명예로운 자유인으로 대접받을 것이며,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의 영원한 평화, 만세!"
삐라 살포와 선전방송이 시작된 직후, 아군은 적군의 무전망을 감청하여 제법 흥미진진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대본영의 답변에 따르면, 사진 속 인물은 츠지 마사노부 중좌가 아니다. 영국군이 대역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병사들이 제법 동요하고 있다. 투항자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충격이 크다.
-삐라를 주운 병사들에 대해선 즉결처분까지 허용한다는 대본영의 방침이다. 그뿐만 아니라 투항자가 발생했을 경우 투항자가 발생한 대대의 모든 장교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병사들이 삐라를 줍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어도, 적들이 확성기로 방송을 내보내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다.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포격을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송 송출을 저지하라.
역시나. 이놈들도 이게 보통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구만.
그 '작전의 신'이 포로가 된 것도 모자라 직접 적의 투항 권유 방송에 출연까지 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지금쯤 도조 히데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데?
***
DJ츠지의 방송이 실제로 효과를 거두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송 시작 일주일 뒤, 아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포위된 일본군 소대가 항복해온 것이었다.
전장에서 포위된 적군이 항복하는 일은 별반 놀라울 것도 없지만, 상대가 옥쇄와 자살을 밥 먹듯이 행하던 일본군이라면 또 다르다.
지금까지 포위되면 돌파를 시도하다 전멸하거나 자폭하는 게 일본군이었는데, 자발적으로 항복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음날에는 정찰 도중 아군에게 발각된 일본군 정찰병 3명이 얌전히 항복했고. 지휘관인 중위는 권총으로 자살했지만.
선전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자네는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DJ츠지의 방송이 시작된 후, 무어 소령이 내게 한 말이었다.
"위에서 그러던데, 생각했던 것보다 파장이 너무 커서 오히려 놀랐다는군.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저 역시 그렇게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적들이 조금이라도 더 큰 충격을 받으면 그것만으로도 족하죠."
"선전부에선 아예 자네더러 전속할 생각이 없냐고 묻던데."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다.
선전부라면 최전선에서 적과 싸울 일도 없고 후방에서 아이디어만 짜내면 되니까.
무엇보다 야밤에 벌레들과 텐트 안에서 함께 잘 일도 없고.
그냥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엄청 좋은데?
어? 갑자기 입이 근질근질해지는데?
"아, 물론 농담으로 건넨 얘기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게."
내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 것을 캐치한 무어 소령이 황급하게 뒷붙였다.
"걱정마십쇼. 전 이 부대에 계속 있을 생각입니다."
"그렇지? 자네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껄껄껄."
무어 소령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홍차를 쭉 들이켰다. 아직 뜨거울 텐데.
"참, 상부로부터 새 명령이 전해졌어. 다음주에 이곳에서 방 빼라고 하더군."
나는 입가로 잔을 가져가는 것을 멈췄다.
"그 말인즉......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까?"
무어 소령은 잘 알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새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전에도 가봤던 곳이야."
전에도 가봤던 곳이라면.......
"이집트입니까?"
"정답일세."
중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높으신 분들께서 또 무슨 생각이신진 몰라도, 아무튼 그렇게 됐어. 쪽발이들 상대는 후속 부대가 맡게 될 거야."
"차라리 다른 부대를 거기로 보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뭐하러 그런 불필요하고 귀찮은 짓을 한답니까?"
"그건 나한테 묻지 말게. 굳이 이유를 찾자면, 우리가 잘 싸우니까 쪽발이들보다 강한 제리들을 상대하려면 우리가 제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겠지."
그는 이제 지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집트에는 버마와 달리 지랄 맞은 해충들-특히 거미와 지네-이 없다. 벌레라면 극혐 하는 내겐 반가운 소식이지만, 대신 일본군에겐 없는 슈투카와 88이 있다.
그런 괴물들과 다시 마주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번에는 또 어떤 고난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이집트의 독일군을 떠올리며 몸서리치는 동안 라디오에선 오늘도 지구촌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독일군 폭격기들에게 연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군의 폭격을 받은 핀란드가 공식적으로 소련에 선전포고했습니다. 한편, 소련군은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감행한 독일군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으며, 전선과 가까운 민스크에는 피난민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 중이라고 합니다.......
***
라스텐부르크에 위치한 볼프스샨체(Wolfsschanze, 늑대소굴)의 지휘 벙커에선 회의가 한창이었다.
"당최 이해를 할 수 없군."
지도와 현황판을 응시하던 히틀러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지휘봉을 잡은 오른손이 파르르 떨렸다.
"개전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민스크조차 점령하지 못했다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송구합니다, 총통 각하."
할더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옆에 선 카이텔도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이렇게 진격이 느려서야 어느 세월에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겠나? 10주 안에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10주 안에 모스크바까지 간다면 다행이겠지! 내 말이 틀렸나?"
5월 15일, 기세 좋게 소련을 침공한 독일이었지만, 대다수 부대가 국경 근처에서 발목이 잡혀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전, 스탈린은 전군에 경계령을 내렸고 그 결정이 지금의 소련을 구했다.
독일의 침공에 대비해 경계태세를 곤두세우고 있던 소련군은 전쟁이 시작되자 미리 정해진 방어진지를 고수하며 악착같이 저항했다.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은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고, 전 전선에 걸쳐 진격이 둔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민스크를 손에 넣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 중이어야 했지만.
현재 독일군은 아직 민스크 근처에서 소련군과 포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전황이 예상과 정반대로 흘러가자,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작은 핀란드에도 쩔쩔매던 러시아 놈들이 천하의 독일군을 상대로 호각에 가깝게 싸울 줄이야.
"이래서야 이 전쟁, 우리가 이길 수 있겠나?"
히틀러의 성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선 말이다.
장군들의 침묵은 총통의 분노를 더더욱 부채질했다.
히틀러는 지휘봉을 내던지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당장 보크(Fedor von Bock, 페도어 폰 보크) 원수에게 전하게. 3일 안으로 민스크를 점령하라고 말이야. 시간을 질질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우리니까."
"알겠습니다, 총통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