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7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7화
87화 작전의 신 (2)
바퀴벌레들처럼 몰려드는 적들을 벌집으로 만들고, 벌집이 된 시체를 사뿐히 지르밟아가며 전진하길 10여 분.
우리는 겨우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아군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전차를 이끌고 그들에게 당도했을 때, 병사 중 몇 명은 총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우리가 영국군이 아니라 일본군의 전차부대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포위되어 싸우던 아군 상당수가 인도인이었다. 그들은 마틸다 전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탓에 전차하면 무조건 일본군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가진 무기라곤 소총과 수류탄, 기관총이 전부인데 전차가 나타났다?
죽기 싫으면 게임 던져야지.
하지만 이내 우리가 일본군이 아니라 같은 아군이란 것을 알게 되자 잽싸게 무기를 주웠다.
나는 전차에 그대로 탄 채로 부대의 지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
"날세. 내가 지휘관일세."
소령 계급장을 단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전투 중 부상을 입은 탓에 왼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런데 위생병의 실력이 별로였는지 붕대가 풀리기 직전이었다.
"아서 그레이 대위라고 합니다. 퇴각을 엄호하러 왔습니다, 소령님!"
"맙소사, 자네가 그 아서 그레이 대위라고?"
소령은 내 이름을 듣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진짜로 그 아서 그레이가 맞나? 동명이인이 아니라?"
"예, 제가 그 아서 그레이 맞습니다."
"이런 젠장! 살다 살다 이런 일이 다 생기는군! 그 전쟁영웅이 우릴 구출하러 올 줄이야!"
분명 칭찬인데 민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소령은 싱글벙글 웃으며 부하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퇴각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환호하며 무기를 챙겨 일어섰다.
"걷지 못하는 부상병들은 전차에 태워! 서둘러라! 시간이 없어!"
병사들이 코뿔소 2와 3에 부상병들을 태우는 동안, 나는 보병 분대와 함께 경계를 섰다.
철수 작업이 한창 진행될 무렵, 저 멀리서 엔진소리가 났다.
아군의 마틸다 전차와는 확연히 다른 소리였다.
"일본놈들도 근처에 온 모양이군. 서둘러야겠어."
언제 적군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때 코뿔소 2로부터 철수 작업이 모두 끝났다는 무전을 보내왔다.
"코뿔소 2와 3은 보병들을 데리고 먼저 철수하라. 나는 이곳에 남아 엄호하겠다."
-수신 완료.
포위당했던 보병들과 코뿔소 2, 3이 먼저 철수하고, 나는 이곳까지 따라온 보병들과 함께 그들의 퇴각을 엄호하며 물러서기로 했다.
잠시 후 일본군이 나타났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들은 반자이를 외치며 달려왔는데, 정글에서 공터로 나온 그들을 반긴 것은 2파운더 유탄과 보병들의 일제 사격이었다.
"발사!"
유탄과 기관총의 총알 세례를 받은 일본군 제1진이 순식간에 전멸하고, 2진 또한 앞서 죽은 전우들의 시체 위에 그대로 포개졌다.
***
"뭐야, 저놈들? 이게 무슨 일이야?"
전차에 위풍당당한 자세로 타고 있던 츠지는 나무 뒤에 숨어 우물쭈물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 거기 네놈들!"
츠지는 병사들과 함께 섣불리 전진하지 못하고 있던 소위를 향해 소리쳤다.
츠지의 외침을 들은 소위가 뒤를 돌아봤다.
"예, 옙!"
"지금 거기서 뭣들 하고 있나! 빨리 돌격 안 해?"
"하지만 적군의 화력이 너무 강합니다!"
"뭐라고? 지금 나랑 말장난하는 건가?"
소위의 말에 화가 난 츠지는 권총집에서 남부 권총을 빼 들었다.
황군의 장교란 작자가 적군이 두려워 돌격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모습이라니!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명령이다! 지금 당장 돌격해! 안 그러면 여기서 네놈 대갈통을 날려주마!"
츠지의 협박에 소위는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을 데리고 돌격해야만 했다.
그들이 돌격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츠지는 해치를 닫고 전차 안으로 들어와 조종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 전진! 황군에겐 오직 전진뿐이다!"
"옙!"
그러나 츠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적이 누구인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약해빠지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보병이 아니라 그 어떤 무기로도 격파할 수 없는 괴물이란 사실을.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들을 지나자 탁 트인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앞에는 영국군이 있었다.
***
"적 전차다!"
정면에서 전차가 나타나는 광경을 본 나는 잭슨에게 포탑을 정면으로 돌릴 것을 지시했다.
"토마스, 철갑유탄 장전!"
유탄을 향해 손을 뻗던 토마스는 내 명령을 듣곤 철갑유탄을 집어 들어 약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폐쇄기가 닫히는 소리가 경쾌하기까지 하다.
"장전 완료!"
캉!
잭슨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기 직전, 하고가 먼저 불을 뿜어내 전차에 명중타를 날렸다.
하고의 37mm 주포는 치하의 57mm 주포보다 관통력이 좋긴 하지만, 마틸다의 무지막지한 떡 장갑 앞에선 있으나 마나였다.
"목표 정면, 쏴!"
"쏴!"
차체 하단에 철갑유탄이 박힌 하고는 그대로 정지했다.
구멍 사이로 연기가 조금 새어 나오는 것만 빼면, 전체적으로 봤을 땐 멀쩡하게 보였다.
처음엔 격파되지 않은 줄 알고 한 발 더 먹일까 고민했지만, 놈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로 나타난 놈도 차체 정면에 철갑유탄을 처맞고는 그대로 불길에 휩싸였다.
"1시 방향에 적 전차, 발사!"
세 번째로 나타난 녀석을 잡기 위해 발포했지만, 포탄은 녀석의 옆에 있던 나무에 명중했다.
포탄을 맞은 나무가 쓰러지면서 하고의 주포를 찌그러뜨렸다.
곧이어 하고의 포탑이 섬광을 내뿜으며 산산조각이 났다.
아무래도 나무가 주포를 찌그러뜨리는 순간, 전차장이 발포하면서 포탄이 주포 안에서 폭발한 모양이었다.
주포가 찌그러진 탓에 폭압이 전차 내부로 쏟아졌고, 유폭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포탑이 박살 난 듯했다.
비록 적 전차는 명중시키지 못했지만 적이 폭발했으니, 이것도 엄연한 격파로 봐야겠지......?
순식간에 전차 3대를 격파하자, 일본군은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하곤, 죽은 전우들을 남겨둔 채 도망쳤다.
적들이 도망치는 모습은 본 나는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자식들, 도망치는 꼴 좀 봐라. 바쁘다, 바빠."
"이래서 원숭이 새끼들은 안 된다니까."
물러서는 일본군을 보며 잭슨과 토마스가 낄낄거렸다.
토마스의 원숭이 발언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시대를 감안하면 차마 나무랄 수도 없었다.
"좋아. 적들이 다 물러갔으니, 우리도 이제 슬슬......."
"어? 소대장님, 저놈 좀 보십쇼."
애덤의 말에 나는 다시 관측창에 눈을 갖다 댔다.
첫 빠따로 격파한 하고의 포탑에서 장교가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복장이 조금 이상했다.
평범한 전차병 복장이 아니라 금줄까지 찬 제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옆구리엔 일본도까지 차고 있었고.
아무래도 평범한 전차장은 아닌 듯했다.
탈출한 장교는 비틀거리며 뒤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뒤쫓아온 아군 병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아군에게 붙잡힌 일본군 장교는 뭐라고 외쳐대며 저항했지만, 개머리판에 얼굴을 강타당하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대위님, 이놈 어떻게 합니까?"
일본군 장교를 사로잡은 병사들이 다가와서 물었다.
표정을 보니 미간에 총알을 박아넣길 바라는 눈치인데.
하지만 저자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이곳에서 그냥 죽여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데리고 가는 수밖에.
"전차 뒤에 실어. 평범한 놈은 아닌 것 같으니, 데려가서 심문해야지."
"알겠습니다."
그때 기절한 줄 알았던 장교가 고개를 쳐들곤 뭐라 뭐라 소리쳤다.
발음이 뭉개진 데다 일본어를 몰라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 야, 잠깐만."
일본군 장교의 얼굴을 보자 불현듯이 생각나는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해치 밖으로 나가 포로에게 다가갔다.
"설마......."
훈장과 금줄이 주렁주렁 달린 군복에 일반병들과 다를 바 없는 빡빡머리, 수염 한 가닥 없이 말끔한 턱과 인중, 마지막으로 안경까지.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장교라는 그놈뿐이다.
"츠지 마사노부?"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은 장교가 고개를 홱 처들며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きさま, どうやって......(네놈, 어떻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이 작렬했다.
"대, 대위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놀란 병사가 황급히 물었지만, 이미 내 주먹은 녀석의 코를 정통으로 때린 후였다.
"엇, 나도 모르게 그만......."
내게 안면을 강타당한 츠지 마사노부는 마구 욕설을 내뱉으며 발광했다.
이 새끼, 더럽게 시끄럽네.
말을 안 들을 땐 매가 약이다.
주먹을 한 방 더 먹이니, 그제야 놈은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나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병사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돌렸다.
"그놈, 잘 포박해라. 어디 도망치지 못하게."
***
츠지는 코와 인중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누군가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안경이 박살 난 탓에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영국군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드디어 깨어났군."
놀랍게도 눈앞의 영국군 장교는 영어 대신 일본어로 말했다.
놀란 츠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랐지? 백인놈이 일본어로 말하니까. 왜 그런지 가르쳐 줄까?"
츠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상대방은 그를 한껏 비웃고 있었다.
"아버지가 상인이셔서 어렸을 적에 요코하마에서 자랐거든. 나쁘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
장교는 츠지에게 몇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당신 이름이 츠지 마사노부라며? 계급은 중좌. 버마로 오기 전에는 싱가포르에 있었고."
"당신, 어떻게 그 사실을......."
츠지는 이 가증스러운 영국 놈이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영국군의 첩보 능력이 이 정도였나?
이다음 영국군 장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츠지는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았다.
"싱가포르에선 아주 재밌는 짓을 저지르셨더군. 포로들과 화교들을 학살하다니. 그것도 수천 명이나."
"......!!!!"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놀란 탓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츠지의 표정을 본 영국군 장교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표정을 보니 내 말이 맞는 것 같군."
"아, 아니오."
겨우 말을 토해낸 츠지는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건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니오. 부, 분명 오해야, 오해! 난 절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어!"
"이게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이미 네놈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다 있어. 더 이상 발뺌해봤자 소용이 없을걸?"
차갑기 그지없는 상대의 말과 표정에 츠지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떠들어봤자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눈치 하난 빠른 것 같군. 그럼, 천천히 얘기해보자고.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