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6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6화
86화 작전의 신 (1)
브랜슨 대령은 당번병이 타온 홍차를 홀짝이며 내가 없는 동안 부대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일본군과의 전투는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총 3번의 교전이 있었는데, 두 번은 정찰대와 교전한 거라 피해가 없었고. 두 번째 전투는 제법 규모가 큰 전투였지만,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3중대 중대장이 전투 지휘 도중 저격수에게 당해 부상을 입어 후송되고, 복귀 중에 전차 한 대가 늪에 빠졌는데 내부까지 물이 차는 바람에 구난소대와 정비중대에서 쌍욕 했다는 것 정도?
문제는 새로 온 신병들의 상태가 영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렇습니까?"
"어느 정도냐고? 직접 보면 알 걸세. 과거의 자네 정도는 아니지만 보다 보면 한숨이...... 아, 미안하네. 앞에 한 말은 잊어버리도록."
"알겠습니다."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2년 전까지만 해도 부대에는 주특기 외에도 다른 특기 하나씩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고, 조종, 장전, 사격, 정비까지 할 줄 아는 놈들도 많았는데, 요즘 애들은 하나밖에 못 해. 심지어 그 하나조차도 제대로 못 하는 놈들이 태반이고. 대체 훈련을 어떻게 받는 거야?"
지금 병사가 부족하지 않은 전선이 없다 보니, 영국 본토에선 병사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교육만 하고 그대로 자대로 방출하고 있었다.
병사가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전차병이라는 놈이 철갑탄과 유탄을 헷갈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전투 도중에 가끔 실수로 탄종을 잘못 장전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전투 중엔 워낙 바쁘고 혼란스러우니 이해는 하네. 그런데 전투 중도 아니고, 평시에 포탄 적재 훈련을 하는데 어떤 놈은 철갑탄은 한 발도 안 챙기고 죄다 유탄만 챙기지 않나, 가지고 오는 도중에 무겁다고 손을 놔버리지 않나 장전할 때 멍하니 있다가 자기 손 박살 내지 않나...... 벌써 비전투사고로 의무대로 보내진 놈만 세 놈일세."
"허어......."
듣기만 했는데도 엄청 심각했다.
병사들의 질이 전체적으로 낮아진 건지, 아니면 우리 대대에 재수 없이 그런 폐급들만 몰려서 왔는지 몰라도, 부대에 폐급들이 많은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병사가 모자란다지만, 이런 폐급들을 데리고 싸울 수는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드네."
"그래도 꾸준히 훈련하면 차차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원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드무니까요."
"그렇잖아도 매일같이 훈련을 시키고 있네만, 너무 느려. 안 그래도 여긴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전차 타고 나가야 하는 전방인데 말이야. 당장 전투에 나가야 하는데, 사고라도 치면 답이 없다고."
얼마 후 대대장의 예언 아닌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우리 소대에서.
***
부대에 복귀하고 이틀 뒤, 아침 점호를 시작하려는 찰나에 중대에 명령이 떨어졌다.
아군 1개 보병대대가 적군의 기습으로 고립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내가 지휘하는 3소대에 떨어졌다.
1소대와 2소대는 남하하는 적군과 싸우러 가는 보병연대를 지원하러 가야 했다.
병사들을 전차에 승차시킨 후, 서둘러 출발하는데 갑자기 코뿔소 4로부터 무전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여기는 코뿔소 4, 전차에 문제가 생겼다.
"여기는 코뿔소 1, 무슨 일인가?"
-엔진에 이상이 생겼는지, 조작이 잘 안 먹힌다. 전진만 가능하고 후진이 되지 않는다.
내가 국군에서 복무하던 시절에도 엔진 정비 불량으로 후진이 안 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지금 당장 전투에 나가야 하는데 엔진에 이상이 생기다니.
뒷골이 땡기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 상태의 전차를 억지로 끌고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쩔 수 없이 난 코뿔소 4에게 대기를 명한 뒤 남은 2대의 전차를 이끌고 전투에 나가기로 했다.
"혹시 걔가 사고 친 거 아냐?"
코뿔소 4가 엔진 이상으로 낙오했다는 말을 들은 토마스가 잭슨에게 말했다.
잭슨도 토마스가 말하는 '걔'가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다.
"3주 전에 온 신병 녀석? 어째 느낌이 좀 쌔한 것 같더니."
"야, 걔가 누군데?"
"소대장님도 보셨을 겁니다. 3주 전에 우리 소대로 전입 온 녀석인데, 좀 이상한 녀석입니다. 사람이 불러도 휙 가버리고, 듣자 하니 일도 개판으로 하던 것 같던데."
그 말을 들은 나는 전에 브랜슨 대령이 내게 늘어놓았던 푸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소대에도 새로 온 신병들이 배치되었는데, 숫자가 적은 데다 내가 타는 전차에는 배치되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고를 터뜨리다니.
아직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느낌이 쌔 했다.
일단 전투가 끝나고 돌아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그렇게 정글에 난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현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전장이 가까워짐에 따라 귀에 총성이 닿기 시작했다.
"곧 전장이다. 모두 주의해."
"옙."
부하들에게 주의를 주기 무섭게 정글에서 사람이 확 튀어나왔다. 그는 우리를 보곤 당황하여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기도, 철모도 없고 온몸이 진흙투성이라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았다.
"적군입니까? 아님 아군?"
"관측창만으론 확인이 힘든데."
하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상대가 적군인 것에 대비해 권총을 꺼내 들고 밖에 나갔다.
다행히 눈앞에 나타난 병사는 일본군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야, 너! 어디 소속이야?"
"1, 12대대 소속입니다!"
12대대라면 우리가 구출해야 할 대대였다.
"왜 혼자 있어? 다른 병사들은?"
"저희 중대는 괴멸당했습니다! 시체로 위장하고 있다가 겨우 도망치는 중입니다!"
"괴멸당했다고? 다른 중대는?"
"다른 중대는 아직 멀쩡합니다만, 여전히 포위된 상......."
어딘가에서 날아온 총알이 병사의 뒤통수에 명중하여 이마를 뚫고 나왔다.
병사가 쓰러지자 나는 냉큼 전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곧바로 사방에서 일본군이 나타나 총탄을 날려댔다.
"애덤, 앞으로 전진! 시체는 밟지 마라!"
"알겠습니다!"
우선, 미리 약실에 장전해둔 유탄을 쏘아 적의 기세를 죽이고, 공축 기관총을 난사해 눈에 띄는 적 보병들을 고꾸라뜨렸다.
허나 일본군은 사방에서 함성을 외치며 돌격해왔다.
"반자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
그놈의 반자이 소리는 좀 그만하면 안 되나?
게다가 전차를 상대로 소총과 수류탄을 들고 덤빈다는 발상은 또 뭔지.
너희들 그걸로 진지하게 전차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일본군은 궤도 아래로 수류탄을 던져 무한궤도를 끊어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보병용 수류탄으로 전차의 궤도가 끊어질 리가 없다.
물론 어느 정도 영향이야 주겠지만, 애초에 전차의 궤도는 수류탄 정도는 거뜬하게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놈이다.
수류탄을 던진 놈들은 수류탄을 밟고도 멀쩡히 굴러가는 전차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다가, 그대로 총탄에 벌집이 되어 고꾸라졌다.
우릴 뒤따라온 보병 1개 분대도 전차 뒤에 달라붙어 열심히 스텐을 쏘아댔다.
일본군의 숫자는 많았지만, 화력에선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적들을 문자 그대로 도륙 내며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서두르자. 전우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
"아직도 전투 중인가?"
츠지 마사노부 중좌는 자신과 함께 한 대대장에게 짜증이 역력한 말투로 물었다.
"거의 다 끝나갑니다, 중좌님."
대대장인 소좌는 츠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허나 그를 노려보는 츠지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다 병사들이 근성이 부족해서야. 천황 폐하의 자랑스러운 황군이 한 줌도 되지 않는 영국군을 상대로 고전하다니, 이 무슨 망신인가."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소좌는 잘난 체하는 츠지의 말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계급이 계급인지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의 규모가 일본군과 엇비슷한 대대라는 사실도 츠지에겐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연대장인 대좌조차 자신보다 하급자인 츠지를 상대로 쩔쩔맸다.
계급과 관계없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자는 한직으로 좌천되고, 격전지로 보내져 그곳에서 죽게 된다는 소문이 장교들 사이에선 파다했기 때문이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츠지는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 자는 설령 상관이라 할지라도 보고서에 허위사실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반드시 보복했다.
대본영은 츠지의 보고서를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수많은 장교가 한직으로 보내지거나 '자살당했다'.
싱가포르 전투가 끝나고, 본국으로 소환된 츠지는 승진했다.
그는 원래대로라면 필리핀 전선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허나, 버마에서 일어난 전투가 그의 운명을 살짝 바꿔놓았다.
겨우 중위가 이끄는 전차 4대와 보병 소대에게 공격에 나선 전차 중대와 보병대대가 괴멸당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은폐와 왜곡에 도가 튼 일본군은 당연히 이 사실을 숨겼지만, 영국군은 이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츠지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츠지는 이게 다 병사들과 현장 지휘관들이 무능하고 근성이 없어서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지휘를 맡았다면 이런 치욕은 없었을 것이라며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이에 대본영은 그를 버마로 보냈다.
그 소식을 떠올릴 때마다 츠지는 분노와 조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약체에 불과한 영국군에게 그런 망신을 당하다니.
그 전투에서 죽은 놈들은 황군이 아니라 황군의 탈을 쓴 쓰레기들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도 쓰레기들이 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시간이 벌써 1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적들을 다 제압하지 못하다니. 한심하고 무능한 놈들 같으니라고.
"보고드립니다. 아군 선봉대가 적 방어선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그래?"
기다리던 소식을 들은 츠지는 방긋 웃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군.
"소좌, 지금 당장 전차 한 대를 가져오게. 내가 직접 전차를 타고 가서 적들을 쓸어버려야겠어."
"예에?"
츠지의 말을 들은 소좌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츠지의 차갑기 그지없는 눈을 본 소좌는 반론을 포기하고, 전차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작전참모가 직접 전차를 타고 적들과 싸우겠다는 자신이 어떻게 말리랴.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줘야지.
츠지는 이때만을 기다렸다.
싱가포르 전투 당시, 그는 직접 전차를 타고 적진으로 돌격해 전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
물론, 적군에게 전차 같은 중장비가 전혀 없으며 사기 또한 바닥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저지른 일이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적군은 거의 괴멸 직전일 터.
바로 이 순간에 자신이 직접 전차를 타고 적진으로 돌격한다면, 이번에도 별다른 일 없이 무사히 전투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신은 직접 선두에 서서 적들과 싸운 용맹한 장교로 이름을 떨치게 되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사람들은 그를 '작전의 신'에서 '전쟁의 신'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출세와 진급은 당연한 일이고!
주문한 95식 경전차 하고가 나타나자 츠지는 반색하며 전차에 올랐다.
"어이,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이제부턴 내가 지휘할 터이니."
"예? 아, 알겠습니다."
난데없이 자신의 전차를 생면부지의 참모에게 넘기게 된 전차장은 황당한 얼굴로 전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실업자가 된 전차장을 놔두고, 츠지가 탑승한 전차는 이윽고 전선으로 돌격했다.
"자, 가자. 승리가 코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