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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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82화
82화 불의 잔치 (7)
전시된 기갑차량은 비단 크롬웰뿐만이 아니었다.
차체 후면에 폭뢰 발사기를 장착한 마틸다 헤지호그부터, 트럭에다 장갑을 용접해 붙이고 짐칸에 6파운더를 탑재한 간이 대전차 자주포 AEC Mk I 건 캐리어에, 마지막으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M3 스튜어트 경전차까지.
"이놈이 자네가 브룩한테 했던 조언을 토대로 만든 녀석일세. 어때? 기존의 마틸다보다 훨씬 강력해 보이지 않나?"
"그렇습니다, 각하. 후면에 달린 폭뢰를 쓴다면 적들을 벙커째로 날려버릴 수 있겠죠."
처칠은 뿌듯한 표정으로 마틸다 헤지호그를 바라보았다.
이놈 역시 실제 역사의 1941년에는 존재하지 않던 놈이다.
1945년, 호주에서 일본군의 벙커를 파괴할 목적으로 만들었다가 종전이 되는 바람에 그대로 무용지물이 된 비운의 무기인데, 여기선 4년 일찍 개발되었으니 전장에서 마음껏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나 빨리 시제품이 나오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습니다. 마치 마법이라도 쓴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마법은 아니고, 전부 다 사람의 기술로 만든 것들일세. 별거 없이 그냥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서 언제쯤 완성되겠냐고 물으니까 알아서 만들오더군."
"......."
"원래 개발자들은 말로만 안 된다, 안 된다 하면서도 막상 시키면 어떻게든 해온단 말이지. 이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왜 항상 우는소리부터 하는지 모르겠다니깐."
암만 생각해도 너무 빠르다곤 생각했는데, 이런 슬픈 비밀이 있을 줄이야.
소련도 스탈린의 엄명으로 SU-152 자주포를 25일 만에 개발해내기도 하고, 우리나라도 번개 사업 때 40일 만에 바주카를 복제해내기도 했으니,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긴 하다만.
얼마나 많은 공돌이가 갈려 나갔을지.......
그들이 내지르는 절규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
전차들을 둘러본 이후, 나는 두 번 더 채권 홍보 연설을 한 뒤 호텔로 복귀했다.
내일도 오늘처럼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채권을 좀 사달라고 부탁하는 말들을 하고 다닐 예정이었다.
"오늘도 수고했네, 대위. 오늘 스케줄은 이걸로 끝이니까, 푹 쉴 수 있도록."
"감사합니다, 중령님."
"그럼, 내일 보게나."
내일까지는 오늘처럼 총리 곁을 졸졸졸 따라다니며 사람들한테 전쟁 좀 할 수 있도록 채권을 사달라고 호소하는 일을 할 예정이었다.
그다음 날에는 병원을 돌아다니며 환자 및 부상병들과 만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고.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낫긴 하다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무척이나 지루했다.
벌써부터 몸이 적응한 모양이다.
처음 연설할 때까지만 해도 바지에 오줌을 지릴 것 같았는데, 이제는 긴장보다는 지루함만 느껴진다.
설상가상으로 호텔 방에는 뭔가 즐길 만한 오락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1941년이라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당연히 없고, TV조차 이 당시엔 엄청난 고가품이라서 최고급 호텔에서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국, 내게 남은 즐길 거리라곤 아침에 나온 신문 한 부와 라디오가 전부다.
라디오에선 이따금 이름을 모르는 음악과 아나운서 아저씨가 들려주는 뉴스가 흘러나왔는데, 늘 그렇듯 하품만 나오는 소식들이었다.
"잠이나 잘까."
시곗바늘은 아직 오후 6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지만, 할 것도 없으니 일찍 잠드는 게 나을 것 같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자, 자연스레 군대 사람들 생각이 났다.
지금쯤 다들 뭐 하고 있을까?
오늘도 일본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으려나.
잠들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오늘이 며칠인가 싶어 달력을 확인했다.
버마의 주둔지에서 런던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열차에 오를 때부터, 쭈-욱 지루하고 똑같은 나날들이 계속되는 바람에 시간관념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오늘은 5월 14일이다. 우리나라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박지성이 현역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하던 날. 그거랑 이스라엘이 건국된 날이라는 점 외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이다.
내일은 또 어떤 지루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
굳게 닫혀 있던 열차 문이 열리고, 화물칸에 탑승해 있던 병사들이 밖으로 뛰어내렸다.
"모두 서둘러라!"
"정렬! 동작 봐라!"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병사들을 다그치며 줄을 세웠다.
며칠 전, 난데없이 열차에 태워진 병사들은 자신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조차 모른 채 며칠 동안 열차 안에 짱 박혀 있었다.
열차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문만 무성해졌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 병사는 열차가 이탈리아로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탈리아로 간 뒤, 그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아프리카로 간다는 것이었다. 롬멜 장군의 DAK를 지원하기 위해서.
또 다른 병사는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독일이 스페인을 도와줬으니, 프랑코가 총통의 은혜를 갚기 위해 영국령 지브롤터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스페인군을 지원하여 지브롤터 공략에 참가할 예비 병력들이고.
"다 틀렸어. 우리는 지금 빨치산들을 때려잡으러 폴란드로 가는 거야."
폴란드로 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폴란드 총독부 각지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이외에도 덴마크에서 배를 타고 노르웨이로 가기 위해 북으로 가는 것이다, 중동 공략을 위해 터키로 가는 것이다 등등 수많은 소문과 추측이 나돌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폴란드였다.
"진짜 폴란드잖아?"
"거봐, 내 말이 맞지?"
폴란드행을 예언했던 병사는 자신의 말이 맞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폴란드행이라던 그 병사의 말을 맞았지만, 파르티잔 진압을 위해 그들이 이곳으로 보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그들은 이곳에 온 것이었다.
"중대, 모두 주목! 지금부터 총통의 명령을 전달하겠다. 주의해서 듣도록."
중대장이 나타나 호통을 치며 총통의 명령에 대해서 언급하자, 병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중대장의 입을 통해 나오는 총통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동부전선의 병사들이여!
나는 지난 수개월 동안 무거운 걱정에 짓눌린 답답한 마음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제는 그대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자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에게, 총통의 명령은 충격을 넘어 경악에 가까웠다.
병사들은 동맹국인 소련이 그들이 모르는 사이 국경을 침범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도발을 감행해왔다는 사실에서 놀랐고, 총통의 다음 목표가 다름 아닌 소련이라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들은 이제 영국군이 아닌 소련군과 싸울 예정이었다.
"......독일의 병사들이여! 그대들은 엄중하고도 막중한 책임이 있는 전쟁에 나섰다. 유럽의 운명과 독일의 미래, 우리 민족의 생존이 오직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에 나서는 우리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총통 아돌프 히틀러."
중대장의 명령서 낭독이 끝난 후에도 병사들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온갖 혼란과 상념이 그들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소련과 전쟁을 벌인다는 사실에 병사들은 당혹스러워했다.
명령서를 낭독한 장교들조차도 예상치 못한 총통의 명령이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건 불가능하다고 말하거나 총통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우리는 총통의 뛰어난 지도력 아래 일치단결하여 폴란드에 이어 노르웨이, 프랑스, 이집트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지 않은가!
상대가 소련인 게 뭐가 대수란 말인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터인데.
***
"후...... X 같은 인생. X발."
유리 나메로프 병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힘내십쇼, 병장님. 어쩔 수 없는......."
"시꺼. 니가 내 심정을 알아? 짬찌새끼가."
부사수인 드미트리 예고르 이병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성격 더럽기로 소문난 유리는 드미트리의 말을 자르며 매섭게 쏘아붙일 뿐이었다.
하, 이 개새끼. 위로를 해줘도 지랄이네.
드미트리는 유리의 말에 속으로 울컥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속으로 유리를 총검으로 수십 번 찔러 죽이는 상상을 하며 화를 달랬다.
드미트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두 명이 서 있는 것조차 좁게 느껴지는 벙커 내부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X발, 지금쯤이면 목욕하고 침대에 누워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있을 텐데."
원래대로라면, 그는 이미 제대하여 민간인이 돼야 했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전군에 경계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유리의 제대는 뒤로 미뤄지고 말았다.
중대장으로부터 자신의 제대가 연기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유리는 갑작스런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리를 쳤다.
그러나 중대장의 샤우팅과 행정보급관의 주먹맛을 본 뒤로는 남들처럼 조용히 지내는 중이었다.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후임들한테 스트레스를 마음껏 발산하면서.
드미트리도 성격 더럽고 꼬장만 부리는 이 역겨운 고참과 함께 근무를 서야 한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다면 아버지 말대로 해군에 들어갈걸.
레닌그라드 출생인 그는 입대 전, 선원인 아버지로부터 차라리 해군에 지원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해군이 육군에 비해 대우도 조금 더 낫다는 이유에서였다.
허나 드미트리는 수영을 못 한다는 핑계를 대며 아버지의 권유를 사양했다.
수영을 못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애초에 물 자체가 무서웠다.
어렸을 적 냇가에서 물놀이하던 친구가 익사하는 것을 목격한 뒤로는 물이 무서워졌다.
그런데 해군을 가라고? 잘못되면 그대로 바다에 풍덩인데?
차라리 육군을 가지, 해군은 절대 안 돼!
하지만 지금, 그는 아버지의 권유를 사양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후회했다.
적어도 해군에 입대했다면, 이런 또라이를 고참으로 만나 근무를 설 일도 없었을 테니까.
설상가상으로 전군에 내려진 경계령으로 인해 외출, 외박을 비롯한 모든 출타가 금지되었다.
덕분에 드미트리는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보낼 계획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경계령이 내려진 이유가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몰라서라고 한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비록 독일은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이념으론 소비에트 연방과 상극이지만, 2년 전 양국은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어 오랜 원한 관계를 청산하지 않았던가.
그뿐인가? 사이좋게 폴란드도 나눠 먹고, 소련이 독일에 각종 식량과 광물을 제공하면 독일은 그 대가로 자국의 우수한 과학기술과 기술자들을 보내 소련의 발전을 돕고 있다.
그런 우방국과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드미트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그때, 국경 쪽에서 정체불명의 굉음이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난데없는 굉음에 당황한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무지막지한 파열음이 그의 고막을 강타했다.
***
1941년 5월 15일,
새벽 3시 15분,
독일-소련 국경을 따라 배치된 수천, 수만 문의 대포가 동쪽을 향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활주로에서 이륙한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소련 상공으로 날아가 폭탄을 투하했다.
비단 독일-소련 국경뿐만 아니라 루마니아-소련 국경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