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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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7화
77화 불의 잔치 (2)
전투가 끝난 뒤, 나는 병사 서너 명을 데리고 주변에 즐비한 시체들 쪽으로 다가갔다.
전에 이탈리아군 장교의 시체에서 지도판을 탈취했듯이 뭔가 쓸모있는 물건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장교들의 시신을 전부 뒤져봐도 지도나 작전 계획서 같은 문건은 얻을 수 없었다.
대신,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의 일본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야, 이놈 때깔 좀 보소."
일본도 자체가 고가이긴 하지만, 이놈은 칼날에 무늬가 새겨진 걸로 봐선 상당한 고가품인 게 분명했다.
내가 가져온 일본도를 본 소대원들도 눈을 반짝거리며 몰려들었다.
"우와, 이거 진품 일본도 아닙니까?"
"고놈 참 멋지게도 생겼네."
괜히 신이 난 나는 내친김에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어때, 자식들아? 사무라이 같냐?"
"연극배우 같습니다."
"아무튼 그거, 소대장님께서 가지실 겁니까?"
"당연하지. 집에 돌아가면 벽에다 걸어놓을 거야."
지금이 21세기였다면 당장 경매에 올렸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1941년이다.
누군가는 이걸 원하겠지만, 구매자를 찾는 것도 일이고. 무엇보다 난 돈이 그다지 급하지 않다.
일단 귀족이라서 전쟁이 끝난 뒤 제대해서 백수가 된다 하더라도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몸.
따라서 이건 기념품으로 집에다 놔둘 생각이었다.
잭슨과 토마스도 내 일본도가 무척이나 탐이 나는 모양인지 연신 입맛을 다셨다.
오직 애덤만이 일본도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저, 소대장님?"
"왜?"
"슬슬 배가 고파서 그런데 식사 시간은 언제입니까?"
언제 그 말이 나오나 싶었다.
근데 애덤을 뭐라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아침에 먹은 음식이라곤 차 한 잔과 비스킷 한두 개가 전부였다.
게다가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반.
애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도 충분히 배가 고플 시간이다.
"조금만 참아. 복귀 명령이 떨어지면, 그때 가서 먹으면 되니까."
"옙."
문제는 그 복귀 명령이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지만.
보병사단의 철수가 끝나는 대로 연락을 주기로 무어 대위가 약속했지만,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아직도 철수가 한창인 것일까?
-여기는 도마뱀, 코뿔소는 응답 바람.
"코뿔소 수신."
-현재 보병사단이 철수를 완료했다고 알려왔다. 코뿔소도 복귀할 수 있도록.
"알겠다. 수신 완......."
그때였다.
시야에 한 무리의 전차들이 잡힌 것은.
동시에 엔진음이 귀에도 닿았다.
마틸다의 엔진소리와는 판이한 소리.
거기다 소리가 나는 방향도 뒤가 아니라 앞이었다.
"적이다!"
망을 보던 보병들이 적의 출현을 알리며 다급히 참호로 뛰어들었다.
무어 대위도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코뿔소, 무슨 일인가?
"적이 출현했다. 소리로 판단하건대 전차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전투 후에 다시 교신하겠다, 이상!"
-제길, 알겠다.
무전을 끊은 후, 나는 관측창부터 확인했다.
녹색과 갈색, 황색이 번갈아 가며 칠해진 전차 12대가 줄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숫자로는 아군이 확연한 열세.
허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타난 전차들은 그 유명한 '전차호소인' 치하였으니까.
"와, X발. 12대나 되잖아?"
조준경으로 적 전차들의 수를 세어본 잭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녀석, 내가 전에 설명해준 것은 벌써 까먹은 모양이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하냐? 일본 놈들의 전차는 성능이 구려서 절대로 우릴 못 이긴다고. 나만 믿고 침착하게 싸우면 우리가 무조건 이겨."
"아, 알겠습니다."
이탈리아군의 M13/40은 전차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치하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인 수준이다.
방어력 자체도 치하보다 나은데다가 놈에게 달린 블레르 47mm 전차포는 치하에 장착된 97식 57mm 전차포보다 성능이 월등히 뛰어났으니 말이다.
그 47mm 주포로도 마틸다의 장갑을 뚫지 못했는데, 그보다 관통력이 훨씬 뒤떨어지는 57mm 주포가 뭐가 무서울까?
전차포가 개판이면, 적어도 방어력이라도 뛰어나야 하는데 치하의 방어력은 알다시피 기관포에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저런 형편없는 전차를 자그마치 종전 때까지 타고 다니며 M3 스튜어트, M4 셔먼 같은 괴물들(?)과 싸워야 했던 전차병들이 불쌍할 뿐.
"토마스, 철갑유탄 장전해. 속전속결로 끝낸다."
토마스가 장전하는 동안, 치하들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거리는 약 400m.
1개 중대 가량의 보병들도 전차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미 적들은 모두 사거리에 들어온 상황. 나는 지체 없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
"정면에 있는 적 전차, 거리 370, 쏴!"
덜커덩거리며 전차포가 불을 뿜고, 선두에 위치한 치하가 우뚝 멈춰 섰다.
잘 보면 차체 전면장갑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윽고 해치가 날아가면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적 전차 격파!"
"잘했어. 뒤에 있는 놈이 나타나면 바로 쏠 수 있게 포탑은 그대로 고정해둬."
선두에 있는 놈이 격파당하자 뒤따르던 전차들이 옆으로 나와 앞으로 움직였다.
"쏴!"
이번에도 명중이다.
앞의 놈처럼 전면장갑이 관통당한 치하는 관통당한 후에도 3m가량 전진하다가 정지했다.
그래도 유폭은 피했는지 전차병이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팔 한 짝이 없는 것을 보니 다른 전차병들은 모두 즉사한 듯했다.
격파당한 두 대의 전차들로 인해 길이 막히자 일본군은 그대로 물러나는 듯싶었다.
그러나 잠시 후, 놈들은 좌우로 나뉘어 동시에 공격해왔다.
나는 휘하 전차장들에게 각자의 판단으로 전투에 임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우측의 보병들을 지원했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돌격해왔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
"저놈들, 죽는 게 안 무섭나? 끝도 없이 밀려오네."
잭슨은 죽음 따윈 전혀 두렵지 않은 듯 연신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해오는 일본군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공축 기관총이 불을 뿜어 선두의 대열을 쓰러뜨려도, 곧바로 다음 대열이 선두의 시체를 밟고 돌격해왔다.
보병들도 사격을 개시해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들을 열심히 고꾸라뜨렸다.
그러다가 치하가 쏜 57mm 유탄이 떨어지자 보병 두 명이 뒤로 날아갔다.
"2시 방향에 적 전차, 거리 300, 발사!"
"발사!"
2파운더 주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치하의 전면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탈리아군을 상대할 때처럼, 포탄이 빗나가는 경우는 있어도 포탄이 튕겨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포탄에 명중할 때마다 치하는 연기를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허나 이탈리아군과 달리, 일본군 전차병들은 전차가 피격당하면 도망치는 대신 일본도나 수류탄을 들고 돌격하는 것을 택했다.
그래봤자 하나같이 기관총의 제물이 되었지만.
3대째 전차를 격파했을 때, 치하가 쏜 포탄이 마틸다의 전면장갑에 명중했다.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관측창에서 빛이 쏟아져 어두운 전차 내부가 일순간 밝아졌다.
"당했나?"
포탄을 장전하던 토마스가 당황하여 물었다.
"안 당했어, 이 자식아! 전차에는 아무 문제 없으니까 장전이나 빨리 해!"
"이미 장전했습니다!"
"좋아, 1시 방향에서 오는 놈이다. 거리 260, 쏴!"
우리 전차를 명중시킨 놈은 틀림없이 우리가 당한 줄 알고 기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반격이 가해지자, 놈들은 당황한 듯 전차를 후진시켰다.
"젠장, 빗나갔습니다!"
"포탑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려!"
"장전 완료!"
"발사!"
이번에는 명중이었다.
포탑 정중앙에 포탄을 맞은 치하는 유폭을 일으키는 바람에 포탑이 차체와 분리되어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나 전차가 격파당한 후에도 일본군은 계속해서 공격해왔다.
공축 기관총이 열심히 불을 뿜었지만,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족히 대대급은 되는 병력이었다.
"X발, 쥐새끼들처럼 몰려오는구만."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적 보병들의 대열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영화 <핵소 고지>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핵소 고지>와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미군이 아니라 영국군이라는 것과 전차까지 있다는 점이다.
재장전을 끝낸 공축 기관총이 열심히 불을 뿜는 동안, 나는 좌회전을 시도하는 전차를 발견했다.
"잭슨, 11시 방향이다! 거리 200!"
"조준 완료!"
"쏴!"
측면에 구멍이 뚫린 치하는 폭발로 인해 궤도가 끊어지면서 근처에 있던 구덩이로 굴러 들어갔다.
해치가 열리고, 일본군 전차병이 뭐라 괴성을 지르며 힘겹게 밖으로 나왔다.
겨우 살아남긴 했지만, 이후 날아온 총탄이 가차 없이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가 버렸다.
12대나 되던 전차들은 이제 한 대도 빠지지 않고 모두 격파당했다.
그러나 전차들이 모두 격파당한 후에도 일본군의 광기 어린 공격은 그칠 줄 몰랐다.
말 그대로 그들은 죽기 위해서 싸우는 것처럼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다.
코뿔소 2에게 격파당한 일본 전차의 전차장은 직접 수류탄을 들고 뛰어왔다.
녀석은 기관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에도 수류탄을 던지기까지 했는데, 그 바람에 보병 2명이 부상을 입고 말았다.
"애덤, 전진해!"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전진해서 돌격하는 적들을 죄다 짓밟아버리는 수밖에 없다.
"덴노 헤이카 반─."
주제도 모르고 일본도를 휘두르며 달려오던 장교 한 명이 우측 궤도에 치여 그대로 곤죽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미친 사람처럼 무작정 뛰어오던 적병 서너 명이 총탄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 뒤 궤도에 깔려 으스러졌다.
"전진! 짓밟아버려!"
몇 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일본군도 자신들을 향해 굴러오는 사신들을 보곤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놈들은 방금까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으로 돌격하던 모습과 정반대가 되어 이제는 도망치기 바빴다.
아직 연신 돌격을 외쳐대는 작자들이 있었지만, 총알 몇 발을 박아주자 금방 조용해졌다.
전차라는 강철의 벽 앞에서 알보병은 무력하기만 했다.
등을 보인 채 허겁지겁 달아나는 적들을 본 보병들도 신이 난 나머지 참호 밖으로 나와 전차를 따라가며 연신 총을 쏘아댔다.
허나 우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적의 공격을 막는 것이었지, 퇴각하는 적들을 추격해서 박살 내는 것은 아니었다.
"이쯤 하면 됐다. 애덤, 정지해."
나는 정지를 명한 뒤,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해치를 열자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코로 밀려들었다.
"우웁!"
상상을 초월하는 악취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덥고 습한 정글이라 그런지, 시체들의 부패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벌써 날벌레들이 몰려들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본능이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된다고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사방에 널린 피의 흔적을 뒤로한 채, 나는 지체 없이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