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0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70화
70화 폭풍 속으로 (3)
"제14보병사단과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예비대로 투입한 121보병연대와도 연락이 안 됩니다!"
"7보병사단이 후퇴를 요청해왔습니다! 부상자 다수에 탄약 부족으로 더 이상의 방어선을 지탱하는 것은 어렵다고 합니다!"
"각하, 33전차대대가 적과 교전하여 전멸했다는 소식이......!"
최전선에서 들려오는 연패 소식과 퇴각 요청에 그라치아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영국군 따위 별거 아니다며 콧방귀를 뀌던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하는 패장의 모습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이럴 리 없어. 천하의 이탈리아군이 어째서......."
그는 애써 현실을 부정했지만, 현실은 늘 냉혹한 법이었다.
퇴각과 방어에만 급급한 줄 알았던 영국군은 뒤로는 부대를 재정비하고, 물자와 병력을 증원했다. 바로 지금을 위해서.
반면, 이탈리아군은 승리에 취해 자신들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고, 적들을 얕잡아 보는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계속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무의미한 공격을 반복했고, 그렇잖아도 부족한 병력과 탄약을 스스로 갉아먹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실수의 대가를 아주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었다.
그것도 고위급 장성들 대신해 일반 병사들과 초급 장교들이.
"각하, 이대로 가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보다 못한 이탈로 가리볼디 대장이 그라치아니에게 진언을 올렸다.
"일단은 부대를 퇴각시켜 재정비한 다음, 독일군에게도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지금은 체면을 잠시 접어두심이 좋을 듯합니다."
가리볼디는 그라치아니의 하급자였지만, 이탈리아군 전체를 통틀어서 그라치아니 다음으로 계급이 높았고, 짬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다른 이들의 진언을 간섭으로 치부하던 그라치아니조차 가리볼디의 말에 끝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어쩔 수 없군. 롬멜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각하."
***
"이탈리아군이 도움을 요청해왔다고?"
"그렇습니다, 각하.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심각한 모양입니다."
부관 루크로부터 이탈리아군이 도움을 청해왔다는 소식을 들은 롬멜은 혀를 찼다.
"젠장, 이쪽도 벅찬데 동맹이란 놈들까지 저 지랄이군."
롬멜은 이탈리아군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들과 하사관들, 그리고 초급 장교들이야 용감하고 열심히 싸우는 훌륭한 군인들이지만, 상층부는 썩어도 너무 썩었다.
무능한 밥버러지들, 그게 롬멜의 이탈리아군 고위 장성들에 대한 평가였다.
병사들이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그들을 이끄는 상층부가 저 모양인데 변할 리가 없다.
"식충이 녀석들. 그놈들이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군. 로마인들은 창과 말만으로 유럽을 정복했는데, 저놈들은 전차와 비행기를 가지고도 싸울 줄 몰라."
"맞는 말씀입니다."
롬멜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지도판을 들여다봤다.
"21기갑사단과 90경보병사단은 전투 중이니까 안 되고, 164보병사단은?"
"아직 전투 중입니다."
"그럼 남는 건 15기갑사단이군. 그 친구들을 보내게. 가서 마음껏 날뛰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
"출동이다! 모두 전차에 시동 걸어!"
중대장의 명령에 전차병들은 일제히 전차에 탑승하여 전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랍니까?"
발터의 물음에 베르거는 머리에 헤드셋을 쓰면서 말했다.
"우리의 파스타 친구들이 토미들에게 애를 먹고 있다는군. 가서 도와주는 게 우리 일이야."
"하여간 파스타 녀석들은 혼자서 뭘 할 줄 몰라요."
출동 소식에 잠에서 깬 한스는 귀찮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어쩌겠어? 총통께서 이탈리아를 우리 동맹으로 삼았는데."
"친구가 많다고 해서 다 좋은 친구는 아닌데 말이지."
발터의 말에 베르거는 쓴웃음을 지었다.
"동감일세."
***
"이제야 좀 살겠네."
지금은 잠시 쉬는 시간.
소변통 대용으로 쓰던 탄약통조차 가득 차는 바람에 10분 넘게 소변을 참던 나는 중대장의 휴식 명령이 떨어지자 냉큼 전차 밖으로 나왔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소변 줄기를 보며 나는 몸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와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
"야, 야. 조심해, 조심. 이거 쏟으면 우리 전부 다 끝장이야."
"나도 알거든?"
잭슨과 토마스는 소변이 들어찬 탄약통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며 전차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물이 귀중해서 최대한 아껴서 마시는데도, 이상하게 소변량은 갈수록 많아지는 것 같다.
탄약통을 하나 더 들고 다녀야 하나?
"애덤, 너 뭐하냐?"
애덤이 보이지 않길래 전차 뒤편으로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열심히 먹방을 찍고 있었다.
"소, 소대장님......."
전투식량이 배분되긴 했지만, 작전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므로 지휘관의 허락 없이는 취식이 금지된 상태였다.
겨우 몇 시간을 참지 못하고 전투식량에 손을 대다니, 참 징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아이고, 야 이 새끼야. 아침 먹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처먹냐?"
"죄, 죄옹함이다!"
입안 가득 비스킷이 들어찬 상태에서 말하려니 발음이 뭉개졌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저 녀석,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그놈의 식탐이랑 눈치가 문제란 말이지.
하지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가끔씩 속 썩이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차 모는 실력 자체는 수준급인데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기에 그냥 포기하는 게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 것도 아니고 자기 것만 먹었으니, 나중에는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날씨 한 번 좋다~."
오늘따라 바람도 제법 선선하게 불고, 햇빛도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소풍 나가기 딱 좋은 날씨다.
병사들도 화창한 날씨에 취해 이곳이 전장이란 사실을 잠시 잊은 채 꿀맛 같은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평화란 전쟁 사이의 시기라고 하던데,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짧은 평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할 동안, 앞서 정찰을 나갔던 다임러 딩고 경정찰장갑차가 부대로 돌아왔다.
"이탈리아군 부대가 이동 중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서둘러 전차에 승차했다.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적들은 우리가 있는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동 중이었다고 한다.
그 말인즉 우리의 존재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소리였다.
규모는 2개 중대 정도로, 전차는 한 대도 없고 대다수가 보병에 기껏해야 장갑차가 전부라고 하니, 우리가 기습을 가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터였다.
무어 대위는 새로운 전공을 올릴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중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자, 파스타 놈들 족치러 가자!"
***
중대는 곧 이탈리아군 부대가 위치한 곳에 다다랐다.
모래언덕을 타 넘자, 정말로 이탈리아군이 있었다.
거리는 약 1km.
정찰대의 보고대로 전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차량은 트럭 몇 대와 장갑차 서너 대 정도.
장갑차의 형상으로 봐선 란치아 1ZM인 듯싶었다.
-중대, 전진!
"전진!"
무어 대위의 공격 명령에 전 전차들이 일제히 굉음을 울리며 적군을 향해 돌격했다.
우리가 나타나자, 이탈리아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보병들은 좌우로 흩어지거나 달리는 트럭에 타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트럭들은 그런 병사들은 무시한 채 살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뭐, 뭐야?!"
전진 명령이 내려지고 5초 뒤, 갑작스런 폭음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보병들을 태우고 달려오던 트럭 한 대가 전복된 채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 아닌가.
트럭 주변에는 몸이 괴상한 각도로 꺾은 보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뒤이어 두 번째 포탄이 날아와 아군의 브렌건 캐리어를 연이어 날려버렸다.
브렌건 캐리어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무어 대위의 당황한 목소리가 중대 무전망에 울려 퍼졌다.
이어지는 1소대장의 목소리.
-측면에 적 전차 출현!
돌연 측면에서 나타난 전차들이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전차들의 숫자도 장난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바로 전차들의 정체였다.
경사가 진 이탈리아 전차들과 달리 반듯하게 각이 진 형상을 한 전차들.
틀림없이 독일군 전차들이었다.
"젠장, 저놈들, 파스타가 아냐! 제리들이다!"
-제리들이라고?!
-맙소사, 저놈들이 어떻게......!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울리자 무전망에 들리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대열의 후미에 있던 마틸다 한 대가 측면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적탄에 피격당한 것이다.
적탄에 구멍이 뚫린 마틸다는 주포와 해치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정지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즉시 애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애덤! 우측으로 틀어!"
***
"명중!"
불과 연기를 토해내며 정지하는 마틸다를 본 한스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가 쏜 75mm 철갑탄은 마틸다의 측면 하부 장갑에 명중했고, 그로 인해 마틸다의 모든 승무원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잘했어, 한스! 이다음은 1시 방향에 있는 놈이다. 거리 520m. 탄종은 계속 철갑탄으로."
해치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적들을 주시하던 베르거는 다음 목표로 황급히 차체를 돌리고 있는 마틸다를 지정했다.
"장전 완료!"
"조준 완료!"
"쏴!"
맹수의 포효처럼 우렁찬 굉음을 토해내며 4호 전차의 주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운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한스가 쏜 철갑탄은 마틸다의 전면장갑을 맞고 도탄 되었다.
***
간발의 차이로 우리는 적탄을 튕겨낼 수 있었다.
전면장갑에 맞고 튕긴 포탄은 땅에 처박혔다.
보병들이 불발탄을 피해 물러서는 동안, 중대의 다른 전차들도 서둘러 차체를 회전시켰다.
적들은 3, 4호 전차가 다수에 숫자는 약 20대가량.
쪽수로 따지면 아군이 불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전차의 방호력을 따지자면 우리가 적들보다 우위에 있다.
3호 전차의 50mm 42구경장 주포나 4호 전차의 75mm 24구경장 주포로는 이 거리에서 마틸다의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없다.
반면, 마틸다의 2파운더 주포는 적들의 전면장갑을 충분히 관통할 수 있다!
전체적인 전력으론 해볼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거리만 유지한 채 싸운다면 승산이 있었다.
-중대, 후진! 모두 뒤로 물러나라!
무어 대위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후진 명령을 내렸다.
우선 적과 거리를 벌린 뒤, 차례대로 처리하겠다는 의도인 듯했다.
그러나 적들도 우리의 의도를 간파한 모양인지 속도를 올려 돌진하기 시작했다. 절대 공격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의지다.
야수처럼 달려드는 적들을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법 힘든 하루가 될 것 같구만.
"목표, 정면의 3호 전차! 철갑탄 장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