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9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9화
69화 폭풍 속으로 (2)
적들의 기세가 주춤해지자, 이제까지 방어만 해왔던 아군은 반격을 개시했다.
작전명은 팔라딘(Paladin, 성기사).
거창한 이름답게 시나이반도의 추축군을 수에즈 운하 너머로 완전히 몰아낸다는 야심에 찬 계획이다.
이참에 대대적인 공세를 펴서 지금까지 잃었던 영토와 땅에 떨어진 명예를 한 번에 되찾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그간 당해왔던 걸 생각하면 영국군 입장에서는 꽤나 자존심이 많이 구겨졌다.
독일군이야 그렇다고 쳐도, 유럽 안에서 약소 군대라고 알려진 이탈리아군에게도 심하게 당했으니.......
얼마나 그간 이를 갈아왔을지 전황을 안다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부분이었다.
작전을 앞두고 탄약과 연료, 전투식량이 배분되었다.
지금까지 줄곧 방어만 하다가 모처럼 반격에 나선다는 소식에 병사 장교 할 거 없이 모두가 흥분했다.
추축군도 슬슬 부담을 느낀 건지 공세를 멈춘 덕분에 아군의 준비는 순조롭게 척척 진행되었다.
작전이 끝날 때까지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을지도 모르니,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각성제도 지급되었다.
예전에도 몇 번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아직 먹어본 적은 없다.
각성제를 복용했던 녀석들의 말에 따르면 잠이 쏟아지다가도 갑자기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는데 어떻게 먹을 수가 있나.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일단 받은 것은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
그래도 되도록이면 쓸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약까지 먹어가면서 전투라니...... 안 그래도 인간성이 상실되는 전장에서 되도록 피하고 싶다.
"이번 작전이 성공하면, 우리는 다시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로 진격할 수 있다. 적들은 비록 만만찮은 상대지만, 놈들은 오랜 공세로 지친 상태다. 바로 이때! 우리가 치고 들어가는 거지. 우리의 손에 조국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예! 알겠습니다!"
"좋아! 모두 전차에 승차해라!"
지휘 텐트를 나가 전차를 향해 다가서는데, 옆에서 불빛이 번쩍거렸다.
거기다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오랜만입니다, 중위님!"
이 목소리는.......
"레이첼 양?!"
데일리 메일에서 사진기자-2년 계약직-로 일하고 있다던 레이첼 로튼이었다.
형...... 아니 누나가 왜 거기서 나와?
놀라서 반쯤 얼어붙은 나를 보며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지난번 중위님 사진 덕분에 눈도장 제대로 찍었거든요. 이제는 계약직이 아니라 정직원이랍니다."
"이야, 그거 참 축하할...... 아니, 그런데 왜 여기에 있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당연히 이것 때문이죠."
주변을 둘러보니 사진기자 여러 명이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대고 있었다.
갑자기 사진이 찍혀 당황한 병사가 있는 반면, 오히려 자기 좀 찍어달라고 포즈를 취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국내만 돌아다니면서 홈가드 영감님들 훈련 장면이랑 귀족 나으리들 병문안 사진만 찍는 게 질렸거든요. 마침 전방으로 가서 사진 찍어올 인원을 모집한다길래, 바로 지원했죠. 그건 그렇고 여기서 또 만나다니, 우연이 따로 없네요?"
"그러게요. 세상 참 좁네요."
솔직히 말해서 한동안 레이첼이란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았다.
워낙 일이 많아야 말이지.
아무튼 예전에 만났던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니 무척 생소한 기분이다.
"어이, 레이첼! 아는 사람이야?"
병사들처럼 반바지 차림을 한 기자가 다가오더니,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는 이내 눈을 반짝거리면서 주머니에서 펜과 수첩을 꺼냈다.
"맙소사,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다 했는데, 아서 그레이 중위셨군요? 질문 좀 몇 가지 해도 될까요?"
"예, 예? 아, 물론입니다만......."
남자는 동행한 기자인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 요즘 군 생활이 어떻냐, 내가 유명해진 것은 체감하고 다니냐 등등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져댔다.
레이첼은 남자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나를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자, 자. 기자 여러분, 시간 다 됐습니다. 이제 그만 이동하시죠."
기자들을 인솔하는 책임자인 듯한 대위가 나타나 소리친 후에야 기자들은 행동을 멈추고 발길을 돌렸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위님.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남자는 뜻밖에 수확에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안이 벙벙해진 내게 레이첼은 웃으며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이건 특별히 기사에 안 내고 나만 보도록 하죠.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전차에 돌아와 탑승하는데 토마스와 잭슨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대장님, 아까 그 여기자랑 아는 사이입니까?"
"뭐, 조금?"
"혹시 여친입니까?"
겨우 만나서 잠시 얘기한 것 가지고 여친이 아니냐고 묻다니, 뭔 생각이냐.
"여친은 무슨. 지난번에 후송 갔을 때 어쩌다 만난 사이야."
"그런데 아까 그 여기자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만?"
"소설 쓰고 자빠졌네. 꼭 여친 없는 놈들이 이런 망상을 한단 말이야(사실은 나도 없지만). 아무튼 신경 끄고 앞이나 봐."
내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녀석들은 더는 캐묻지 못하면서도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렸다.
이러고 있으니 꼭 가십거리 생겨서 신난 여고생들 같구만.
녀석들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맨날 남자들밖에 없는, 칙칙하다 못해 거무죽죽한 환경 속에서 지내다가 모처럼 여자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히 기쁘겠지.
그런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데다가 군복까지 입은 놈들이 저러니 모양새가 빠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자, 녀석들도 흥이 다 식었는지 이내 조용해졌다.
10분 뒤, 아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격은 30분 동안 진행되었다.
포병뿐만 아니라 하늘의 공군도 덩달아 적진을 공격을 가했다.
쉴 새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투기들을 보며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포격이 끝나갈 무렵, 무전망에서 무어 대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대, 전진!
시작됐군.
***
"각하, 급보입니다! 영국군이 전차를 앞세워 반격 중!"
"전방의 아군 방어선이 붕괴했습니다!"
그라치아니는 전방에서 들려오는 이탈리아군의 패퇴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방어에 급급했던 영국군이 갑자기 반격이라니.
하지만 그는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원래 전쟁터에서 퇴각하던 군대가 반격을 가해오는 일은 흔한 일이다.
승리에 취해 방심하고 있다가 조금 당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전열을 재정비해 공격을 가하면 적군은 금방 물러나리라.
"호들갑 떨지 마라. 그냥 방심하고 있다가 당한 것뿐이야. 휘하 기갑부대에게 반격을 명하도록. 그럼 적군은 금방 물러날 걸세."
"하지만 각하, 만일에 대비하여 독일 쪽에 알려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참모의 진언에 그라치아노는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인가! 이 정도는 우리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독일 놈들의 도움 따위에 기댈 필요조차 없다고!"
원수의 노성에 참모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영국군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반격하면, 적들은 금방 꼬리를 말고 도망치게 되어 있어!"
***
-전방에 적 전차! 모두 정지!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진격을 거듭하는 와중에 이탈리아군 기갑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착시효과 유발을 위해 하늘색과 황토색이 번갈아 가며 칠해진 아군 전차들과 달리, 이탈리아군 전차들의 색은 오직 모래색 하나뿐이었다.
확실히 주변 환경에 그대로 녹아내려 조준이 까다로웠다.
하지만 상대는 물장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군 전차들.
떡장갑으로 무장한 마틸다 전차에겐 상대도 되지 않는 놈들이다.
-여기는 민들레, 애벌레는 후속하는 적 보병들을 공격하고 잠자리와 도마뱀은 적 전차들을 상대한다.
-여기는 애벌레, 수신.
-여기는 잠자리, 수신.
"여기는 도마뱀, 수신."
아군 보병들도 전차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공격을 준비했다.
적 전차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중대의 모든 전차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일제 사격!
"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돌격하던 M13/40 전차 6대가 폭발을 일으키며 정지했다.
연기를 내뿜어대는 전차에서 몸에 불이 붙은 이탈리아군 전차병들이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그들의 비명은 이어지는 총성과 폭발음에 가려졌다.
"명중! 잭슨, 조금 전과 같은 방향에서 오는 놈이다!"
"장전 완료!"
"발사!"
이탈리아군도 자기네들 전차가 성능이 구린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방어력을 올려보기 위해 전차 전면에 모래포대를 쌓고, 그물망으로 고정까지 해뒀지만. 2파운더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운 좋게 막아낸 전차들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전면이 그대로 뚫려 허무하게 격파당했다.
"명중!"
"좋아, 다음!"
***
"조준, 발사!"
깡!
"튀, 튕겼습니다!"
포수 마리오 로세티 상병의 보고에 전차장 페르난도 마르니체 중위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맙소사, 저, 저놈들은 대체......."
이쪽에서 쏘는 족족 포탄은 튕겨 나가기 일쑤였다.
반면, 적들이 쏘는 포탄은 빗나가는 경우는 있어도, 튕겨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맞으면 무조건 격파.
운이 좋아 궤도에 맞아도, 곧바로 다음 포탄에 맞아 격파되기 일쑤였다.
페르난도 중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 흉악한 물건은 죄다 영국 놈들이 만든다더니, 과연 사실이었다.
눈앞의 저 괴물이 그 증거물이었다.
"X발. 용의 비늘로 만든 거야, 뭐야?"
전장의 여왕-마틸다 전차는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모두 도탄 시키며 전진하고 있었다.
어느 용감한 M13/40 1대가 속도를 올려 적에게 돌격했다.
중대장의 전차였다.
마틸다의 유일한 약점은 속도가 느리다는 것.
반면, M13/40은 방어력이 형편없지만, 속도에서는 마틸다보다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다.
중대장은 적에게 근접해 영거리 사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측면으로 돌려는 찰나, 다른 마틸다가 발포하여 측면을 맞추고 말았다.
측면이 뚫린 중대장 차량은 정지한 뒤 불타올랐다.
"젠장, 쨉이 안 돼! 모두 후─."
페르난도 중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날아온 포탄이 그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장갑을 뚫고 내부로 날아든 2파운더 포탄이 탄약고를 건드리는 바람에, 페르난도 중위의 전차는 유폭을 일으켰다.
전차 포탑이 허공으로 치솟고, 오렌지색 화염과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이탈리아군의 전차들을 모두 격파한 영국군 전차대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격파된 전차들의 잔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바람을 타고 서쪽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