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8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68화
68화 폭풍 속으로 (1)
부대로 복귀하자, 브랜슨 중령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해냈구나, 너 이 미친놈! 해냈어!"
내가 거둔 전과는 이미 대대 전체는 물론, 연대장에게까지 보고가 된 상황이었다.
태어나서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격한 환영을 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 속 슈퍼히어로가 된 느낌이랄까?
확실히 주변에서 치켜세워주니 기분 째진다.
전생에서도 이 정도 축하는 받아본 적이 없는지라, 아주 좋다. 짜릿해, 새로워!
그리고 다음 날,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어제 있었던 급습 때 전사한 이탈리아군 중에는 조반니 메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탈리아군에 그리 큰 관심이 없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대충은 아는 인물이었다.
그 악명높은 이탈리아군에서 명장이라 칭송받은 몇 안 되는 인물.
원래 역사에선 그리스-알바니아에서 전투를 치루다가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에는 러시아 원정군을 이끌고 독소전쟁에 참가, 1943년에는 롬멜을 대신해 튀니지의 추축군을 이끌고 연합군의 공세를 어느 정도 막아내기까지 했다.
튀니지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탈리아가 연합국으로 전향하자 이탈리아군 참모총장이 되었고, 전후에는 국회의원까지 했던 인물.
그런데 그런 인물을 내가 죽였다니.
어째 기분이 묘했다.
이제까지 줄곧 후퇴만 거듭하다가 간만에 초대형 월척을 건진 아군은 내가 거둔 성과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신문마다 내 사진이 실렸고, 라디오 앵커들의 입에서 내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21세기에서도 누려보지 못한 인기를 20세기 영국에서 느끼게 되어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허나, 이곳 전장에서는 유명해지는 일이 딱히 좋은 일은 아니었다.
"중위님, 이것 좀 보십쇼."
그 사건이 있고 나흘 뒤.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들을 몸수색하던 게이츠 상사가 뭔가를 내게 보여주었다.
"뭡니까, 이건?"
그가 내게 보여준 건 전단지였다.
이탈리아어로 적힌 전단지.
"저놈들한테서 나온 겁니다."
아니, 그건 아는데요.
"뭐라고 적힌 겁니까? 이탈리아어는 몰라서 말이죠."
"방금 통역병한테서 들었는데, 중위님에 관한 거랍니다."
"어...... 나요?"
게이츠 상사는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마치 그라치아니가 직접 전군에 내린 명령이랍니다. 중위님을 죽이면 1계급 특진과 상금으로 1000리라를, 중위님을 생포해서 오면 3계급 특진에 상금으로 3000리라를 내리겠다는군요."
쿨럭.
"......저 말입니까?"
"네. 중위님 말이죠. 자식들, 지난번에 자기들 대가리가 죽은 게 보통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직접 적군 사령관이 일개 중위의 목에 현상금까지 내걸 줄이야.
이런 일은 오토 카리우스나 에리히 하르트만 같은 초초초에이스들한테만 걸리는 줄 알았는데.
내가 그 정도 위치인가 싶은 생각에 괜히 어깨가 들썩거리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어째 묘하다.
내 목을 노리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소리잖아.
이거 전장이 아니더라도 항시 몸조심해야 한다는 의미 아닌가.
"앞으로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중위님. 진급에 눈먼 놈들은 세계 어느 군대에나 잔뜩 널려있으니 말이죠."
"하하하하......."
그러지 마요.
사람 쫄린단 말이야.
***
이탈리아군은 여러 번에 걸쳐 공격을 가해왔다.
시작은 포격, 그다음에는 보병과 전차 공격.
이탈리아군의 포격은 생각한 거 이상으로 격렬했다.
처음 포격을 받았을 땐 이탈리아군이 아니라 독일군이 포격을 가하는 줄 알았으니까.
포탄이 착탄 해 폭발할 때마다 땅이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포탄 파편들이 전차에 부딪힐 때마다 팅팅 소리가 났다.
미리 해치를 닫아둬서 다행이군.
만약 열어놨다면 지금쯤 전차 내부엔 모래와 흙먼지가 무릎까지 쌓였을 것이다.
묵묵히 포격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뜬금없이 잭슨이 입을 열었다.
"소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소변이 마려운데 어떡합니까?"
조금 전부터 어딘가 불안한 듯 움찔거리더니, 소변이 마려워서 그런 것이었나.
그런데 이걸 어쩐다.
밖에는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밖에 나간다는 것은 자살하겠다는 소리와 동급.
이런 경우를 대비해 전차병들은 전차 안에 빈 탄약통을 두고 다닌다.
"별수 없지. 탄약통에 싸. 흘리지 않게 조심하고."
잭슨이 탄약통에 소변을 보는 사이 길고 길었던 포격이 끝났다.
허공으로 치솟았던 모래 먼지가 내려앉으면서 뿌옇던 시야가 도로 맑아졌다.
그와 동시에 참호에 수그리고 있던 보병들도 머리를 치켜들었다.
이제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다.
"포격이 끝났다. 모두 준비해."
"옙."
아니나 다를까 곧 적군이 나타났다.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규모다.
전차 중대에 보병 2개 중대.
그런데 오늘은 어제와 조금 다르다.
흔하디흔한 M13/40 전차 사이마다 그보다 더 작은 전차들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봐도 L6/40 경전차 같은데.
1941년 12월에야 전선에 등장하지 않았나?
뭐, 어차피 역사가 내가 아는 것과 달라졌는데, 전차 하나가 전선에 빨리 등장하던 그게 뭔 상관이란 말인가.
게다가 저놈들은 이 마틸다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
-중대, 발포!
"쏴!"
적들이 500m 안으로 들어오자 무어 대위가 일제사격을 명령했다.
11대의 전차들이 일제히 불을 뿜자 돌격하던 이탈리아군 전차 서너 대가 폭발하며 정지했다.
"명중! 이번엔 1시 방향에서 오는 놈이다."
"예!"
두 번째 철갑유탄은 L6/40의 포방패를 뚫고 들어갔다.
약실에 포탄을 장전해뒀는지 포탄이 명중하자 폭발이 일어나면서 포탑이 차체와 분리되었다.
이어서 보병들도 사격을 시작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이탈리아군을 도미노처럼 쓰러뜨렸다.
이탈리아군의 공격에 참호에 있던 아군 보병들도 여러 명이 쓰러졌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의 피해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캉!
그때 전차에 비격음이 들렸다.
기동 간 사격에 명중이라니, 좀 치는 녀석이군.
선공을 날린 건 칭찬해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소용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M13/40에 달린 빈약한 47mm 주포로는 마틸다의 장갑을 뚫을 수 없다.
"잭슨, 방금 포 쏜 놈이다!"
"알겠습니다!"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우측으로 기동하던 M13/40의 측면에 2파운더 철갑탄이 내리꽂혔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포탄이 적의 장갑을 뚫지 못하고 도탄 된 것이다.
"튕겼습니다!"
저놈의 장갑이 두꺼워서가 아니라 입사각이 나빠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아무튼 드문 일이긴 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군 전차가 포탄을 튕겨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지.
겁나 운도 좋은 녀석이네.
놈은 재차 발포했지만, 결과는 이번에도 도탄.
잭슨이 발사 페달을 밟으려는 찰나, 다른 전차가 녀석의 뚜껑을 따버렸다.
우리가 주포에 불을 당길 때마다 이탈리아군은 전차가 폭발하거나 보병 서너 명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탈리아군도 나름 열심히 싸웠지만, 애초에 시작부터가 불리한 싸움이었다.
원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선 공격 측이 방어 측보다 전력이 더 강해야 하는데, 엇비슷한 전력으로 싸움을 걸어왔으니 이길 수 있을 리가.
전투는 이탈리아군의 모든 전차가 격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차들이 모두 불덩어리가 되자, 이탈리아군은 공격을 멈추고 퇴각했다.
전차의 지원 없이는 강력한 방어선을 뚫는 게 어렵다는 건 무능한 이탈리아군도 잘 아는 듯했다.
불타는 잔해와 쓰러져 신음하는 동료들을 두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이탈리아군의 모습이 이제는 측은하기까지 했다.
-중대, 사격 중지. 모두 수고했다.
"오늘도 끝났군."
나는 베레모를 벗어 머리에 찬 열을 식혔다.
통풍도 잘되지 않는 베레모를 계속 쓰고 있으려니, 머리에 금방 열이 차서 고역이 따로 없다.
머리에 열이 많으면 탈모가 빨리 올 수 있다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크구만.
다른 건 몰라도 전역 후에 대머리가 되는 건 사양인데 말이지.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에는 제각기 뒤틀린 자세로 뻗은 이탈리아군의 시체로 가득했다.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악취에 자연스레 얼굴이 찌푸려졌다.
전장에서의 냄새는 도저히 익숙해지라 익숙해질 수 없는 듯했다.
아니, 익숙해지면 그때야말로 미쳐 버린 것일지도.
"멍청한 놈들. 매번 이렇게 죽고도 다음날에는 똑같이 공격해온단 말이지. 저놈들은 학습 능력이란 게 없나?"
"놈들에게 지능이 있었다면 애초에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죠."
토마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머리가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휘관이 멍청하면 병사들이 고생하는 법이고, 지도자가 멍청하면 국민이 고생하는 법이다.
2차대전 시기의 이탈리아와 일본만큼이나 이 말에 어울리는 국가가 있을까?
***
"이탈리아군이 계속 공세를 시도하고 있지만, 아군이 잘 막아내고 있습니다."
"아군이 감청한 이탈리아군의 교신에 따르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모들의 보고에 클로드 오킨렉은 미소를 지었다.
전사한 웨이벌의 뒤를 이어 영국 중동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오킨렉은 수중의 병력과 물자를 효율적으로 활용해 추축군의 진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독일군의 경우, 이탈리아군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였지만. 그래도 영국군은 나름 잘 버텨내고 있었다.
참모들의 보고를 들으며 지도를 유심히 살피던 웨이벌은 지휘봉으로 이탈리아군과의 전선을 가리켰다.
"이제 적들도 슬슬 지쳤을 테지. 쉬지 않고 공격만 가했는데, 뚫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그러니 이제 우리가 공격에 나설 차례라고 생각하네."
오킨렉은 추축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지만, 처칠을 만족시키기엔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처칠은 틈만 나면 전화를 걸어 적들은 언제 수에즈 운하 너머로 쫓아낼 계획이냐고 그를 닥달하고 있었다.
물론 적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는 것에 대한 칭찬도 빠지지 않았지만, 오킨렉은 처칠이 부담스러웠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럴 거면 차라리 전화하지 말던가.
그래도 총리의 명령이니,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그에겐 차곡차곡 쟁여둔 물자와 병력이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군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이었다.
그 대가로 버마와 말레이시아가 많이 허전해지긴 했지만.
만일에 대비해 예비대로 놔둔 전력이지만, 이 전력을 그대로 놔뒀다간 분명 처칠의 입에서 한소리 나올 게 뻔했다.
아니, 이만한 전력을 그냥 놀리고 있다고? 지금 장난하냐?
가만히 있어도 욕 먹을 거라면, 차라리 한 판 크게 벌이는 게 낫지 않을까?
때마침 이탈리아군은 병력과 물자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독일군의 공세도 서서히 시들해지고 있다.
반격하기 딱 좋은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자, 이제 저 파스타와 소시지 새끼들한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