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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8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5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8화

58화 그레이 남작가(男爵家) (1)

 

 

"이런 멋진 새끼! 내 이럴 줄 알았어! 어떻게 이렇게 이쁜 짓만 골라서 하냐?"

"과찬이십니다, 대대장님."

"과찬은 무슨! 난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 언젠가 크게 될 놈이란 사실을!"

"하하하......."

 

이상하다.

분명 내 기억 속엔 연대 최고의 골칫덩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때의 '나'는 누가 봐도 명백한 폐급 of 폐급이었으니 할 말은 없다만.

 

과거엔 연대 최고의 폐급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행운과 우연이 겹치면서 지금은 졸지에 '크게 될 놈', '육군의 숨은 인재' 등으로 입지가 변하고 말았다.

 

칭찬받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째 점점 갈수록 과해지는 느낌이라 슬슬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러다가 꼭 사고 하나 터져서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경우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무튼, 이미지 회복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조용히 지내려고 하려던 참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다름 아닌 '집'에서 온 편지였다.

 

정확히는 '진짜 아서 그레이'의 집.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얼굴 못 본 지도 꽤 되었으니, 한 번쯤은 집으로 오라는 내용.

 

하지만 말이 쉽지, 민간인과 달리 군인은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휴가...... 말씀이십니까?"

"그래, 휴가 말일세. 자네, 1년 가까이 휴가 한 번도 못 나갔잖아?"

 

아니, 갑자기 이렇게 쉽게 휴가를 준다고?

 

설마 '집'에서 힘을 쓴 건가?

아니면 이전의 공로 덕분에 내린 포상일까?

 

하지만 대대장의 말에 따르면 이번 휴가는 그냥 평범한 정기휴가라고 한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니까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 없네. 그냥 집에 가서 부모님도 뵈고 편하게 쉬다 오게나. 자네가 중요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자네 한 명 없다고 부대가 안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 말일세."

 

브랜슨 중령은 웃으며 내 6박 7일짜리 휴가증에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레이 남작가(男爵家)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

 

그레이 남자가가 있는 케임브리지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옥스퍼드에서 케임브리지로 가는 열차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군의 공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에 비해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긴 했지만, 여전히 독일군은 사람들이 잊을만하면 귀신같이 나타나 폭탄을 떨구고 도망쳤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아직 영국은 한창 전쟁 중이었다.

 

다행히 철로는 무사했다.

공습이 끝나고 1시간 뒤, 열차는 다시 운행을 재개했다.

 

열차가 케임브리지를 향해 달리는 동안, 나는 창문을 통해 폭격을 맞은 도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이런 광경에는 익숙해진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잠을 자거나, 신문을 읽을 뿐. 연기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게 어째 신기하게 느껴졌다.

 

우리나라도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시골에선 사람의 백골이 굴러다녀도 아랑곳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던데, 딱 판박이 아닌가.

 

결국 어떤 상황도 적응한다더니.

순간순간 사람이 죽을지 모르는 전쟁이라고 해도 결국 일상이 되면 적응하는 것일지 모른다.

 

뭐, 인류 전체 역사를 봤을 때도 평화보다 전쟁이었던 시기가 더 길었다고 하니. 전쟁을 일상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인류는 그 이전에 멸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 이후로 별다른 일 없이 열차는 케임브리지에 도착했고, 나는 본래 아서 그레이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집으로 향했다.

 

그레이 남작가의 저택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군대의 막사보다 크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외관을 하고 있었다.

 

역시 귀족은 사는 집부터가 다르구만.

 

"아서 도련님!"

 

저택의 위용에 감탄하고 있을 때, 나를 알아본 하인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니, 전화라도 한 통 주셨으면 역으로 달려갔을 텐데......."

"오시는 길이 힘드시진 않으셨는지요?"

"가방은 이리 주시지요."

 

우와.

역시 귀족 자제의 삶은 정말 서민이랑 180도 다르구나.

 

고용인들의 호들갑에 가까운 시중을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간 나는 넓고 화려한 내부에 두 번째로 감탄했다.

 

천장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벽마다 이름을 알 수 없지만 척 보기에도 제법 값이 나갈 것처럼 보이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거기다 화룡점정으로 좀 사는 집에만 있다는 사슴 머리 박제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여기 진짜로 사람 사는 집 맞아? 호텔이 아니고?

 

저 샹들리에 하나만 팔아도 평생은 놀고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까지 투박하고 평범한 막사에서 생활해오다가 갑자기 귀족의 저택에 들어오게 되니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러시아 혁명 당시 황궁으로 쳐들어간 러시아 병사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왔느냐."

 

등 뒤에서 들려온 굵직한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 노인이 두 명의 건장한 집사를 거느린 채 서 있었다.

 

"아, 아버지."

 

저 노인이 바로 '아서 그레이의 아버지'였다.

 

찰스 그레이.

 

풀네임은 찰스 리들리 에드워드 그레이 남작.

 

현재로선 내 아버지......인 저 노인의 이름이었다.

 

한눈에 봐도 카리스마 넘치게 생긴 이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대화하는 내내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니 엄마랑 동생들은 내일쯤에야 올 게다."

"옙,"

"오랜만에 얼굴 보고 대화를 나누는구나. 그렇지 않냐?"

"그,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V자로 만들자 뒤에 대기하던 하인이 곧바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여 손가락 사이에 끼워줬다.

 

영화나 만화에서나 보던 행위를 실물로 보게 되다니, 어째 감개무량한걸.

 

아버지는 한동안 시가를 피우는 일에 몰두했다.

 

다시 입을 연 때는 자그마치 10분이 넘게 지나서였다.

 

"솔직히 말하마."

"예."

 

뭘 솔직하게 말한다는 거지? 벌써부터 불안한데.

 

"네가 사관학교에서 처음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래도 너를 믿었다."

 

음.

 

"몇 번이나 유급할 뻔했어도, 내가 힘을 써서 간신히 졸업시켰지."

 

으음.

 

"그런데 너는 고마운 기색은커녕, 그날 친척들과의 저녁 식사도 빼먹고 여자를 만나러 시내로 놀러 갔지. 다음날 오후에 술로 떡이 되어서 돌아왔고."

 

으으음.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또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너를 호적에서 파버릴까 고민까지 했었지."

 

쿨럭.

 

"나한테 뭐 할 말 없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이 노래...... 아니, 이 말밖에 없다.

 

"그래, 알긴 아는구나. 그나마 다행이군."

 

아버지는 다시 시가를 음미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허연 연기만큼이나 지독한 시가 연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본능이 지금은 말하면 안 된다고 해서 꾹 참았다.

 

"그래도."

 

두툼한 시가가 반으로 준 후에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고생 좀 하더니 정신 차린 모양이더구나. 네가 총리와 만났다는 소릴 듣곤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신문을 보고서야 너란 걸 알 수 있었지."

"네에."

 

줄곧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도, 자만해지진 마라. 나는 네가 한 짓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 경고를 허투루 들었다간 각오해야 할 거다. 명심해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하마터면 오야붕이라고 말할 뻔했다.

 

"아무튼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 이거 원, 예전에 비해서 달라진 게 없구만.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푹 쉬려무나. 저녁 식사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았군. 방에 가서 짐 정리하고, 목욕도 좀 해라. 그럼, 나는 그때까지 서재에 있으마."

"예, 편히 쉬십쇼...... 아버지."

 

***

 

과연 부잣집은 뭘해도 달랐다.

 

욕조가 막사에서 쓰던 침대보다 더 큰 거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지는구만.

 

이곳에 빙의한 이후로 처음으로 해보는 반신욕이라 기분이 무척 좋았다.

묵은 때가 쫙 씻겨나가는 기분이랄까.

 

비누조차 군대의 흔하디 흔한 질 떨어지는 보급 비누가 아닌, 꽃 모양 장식이 새겨진 고급 비누다.

 

심지어 종류는 여러 개다.

라벤다 향, 레몬 향, 허브 향, 로즈마리 향 등등.

21세기 한국에 있을 때도 비누는 그냥 가장 값싼 비누에 샴푸를 썼던 나로서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모자란 게 있다면 헤어드라이어가 없다는 것 정도이려나.

 

간만의 목욕을 즐기고 밖으로 나왔더니,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오랜만의 반신욕에 빠져 시간을 너무 썼던 것이다.

 

옷을 서둘러 챙겨입은 다음, 허둥지둥 아래로 내려가니 하인들이 식탁을 꾸미고 있었다.

귀족 아니랄까 봐 테이블의 자리마다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서재에서 나온 아버지가 자리에 앉아 하인들이 음식을 내왔다.

 

그런데 귀족의 식사치곤 생각보다 제법 소박했다.

 

토스트에 계란프라이, 베이컨, 소시지, 치즈와 토마토, 생크림, 커피까지.

 

누가 보기에도 호화스럽다거나 화려한 만찬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전시라서 물자가 부족한 것을 감안하면 또 그렇지 않나?

 

아무튼 우리 부자는 말없이 밥을 먹었고, 식사가 끝난 후엔 하인들이 디저트를 내왔다.

호두파이와 꿀에 넣고 졸인 사과였다.

 

식사 때는 입을 열지 않던 아버지는 디저트가 올라온 후에야 입을 열었다.

 

"확실히 군대가 사람을 만들어놨군."

"예?"

"군대 갔더니 달라졌다고. 군대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귀가 먹었냐?"

"아, 하하하."

 

나는 멋쩍게 웃으며 포크로 파이를 잘게 쪼겠다.

 

파이는 맛이 나쁘지 않았지만 식감이 꽤 거칠었고, 사과는 달아도 너무 달아서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과를 파이에 올려 야무지게 먹고 있었다.

 

"참. 내일 일정이 따로 있냐?"

"아니, 없습니다만?"

"그래? 잘됐군. 내일 저녁에 파티가 있으니,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거라."

"파티......라굽쇼?"

 

아버지는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손에 들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왜 그러냐? 가기 싫으냐?"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그냥 궁금해서요."

"별거 아냐. 문자 그대로 그냥 파티다. 전에 여러 번 참석했잖냐. 그때마다 번번이 여자 만난다고 몰래 도망가서 내가 둘러대느라 애를 좀 먹었지."

 

아버지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변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아직도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이럴 땐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

납작 엎드려 비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땐 제가 철이 없어서......."

"알면 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같은 일을 저질러 내 얼굴에 먹칠하면...... 아니다. 너도 변했으니, 설마 또 같은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내일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군.

 

저 표정은 진짜다.

 

내일 무슨 이유에서든 간에 사고를 쳤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히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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