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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3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2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3화

53화 어둠의 시간 (3)

 

 

 

다우닝가 10번지는 구름같이 몰려든 시위대로 인해 쥐새끼 한 마리 지나갈 틈조차 없었다.

 

연이은 패전에 분노하고, 전쟁에서 지친 시민들은 한 손에는 팻말과 한 손에는 돌멩이를 들고 다우닝가 10번지 앞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헌병들과 경찰들이 철통같이 경계 중인 다우닝가 10번지로 향하기 위해 애를 썼다.

 

헌병들과 경찰들은 방패로 시민들을 막았고, 저지당한 시민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총리 관저를 향해 돌팔매질을 했다.

 

전쟁으로 피해를 본 시민들의 분노는 상상 이상으로 격렬했다.

 

"처칠, 이 개자식아!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

"전쟁을 끝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일 셈이냐!"

"우린 전쟁이 지겹다! 우린 평화를 원한다!"

"그렇게 전쟁이 하고 싶으면, 니가 직접 가던가!"

 

하지만 처칠은 다우닝가 10번지에 없었다.

그는 극소수의 인원들만 아는 비밀 벙커에서 있었다.

 

카이로가 함락된 이후로, 처칠은 이곳에서 먹고 자고 업무를 보았다.

 

본인 말로는 업무가 많아 출퇴근할 시간조차 부족하다고 했지만, 거리를 뒤덮은 시위대가 던져대는 돌과 썩은 토마토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파리가 함락되던 날, 이제 세상에 더 놀랄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놀랄 일은 지천으로 널려있더군."

 

잔업과 폭음, 불면증으로 처칠의 목소리는 갈라지다 못해 찢기고 구겨진 수준이었다.

 

눈 밑에 씐 다크서클과 늘어난 이마의 주름들이 처칠의 생고생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몰타가 함락되더니, 결국엔 카이로까지 잃고 말았다.

 

아군은 겨우겨우 시나이반도로 퇴각했고, 수에즈 운하는 봉쇄되었다.

 

더군다나 중동 주둔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까지 전사했다.

 

웨이벌의 죽음은 수에즈 운하의 상실만큼이나 충격이었다.

 

영국의 충실한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파루크 1세는 자신의 재산과 여자들을 챙겨 수단으로 도망쳤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새로 성립된 이집트 공화국은 당연하게도 영국에게 선전포고했다.

 

알제리의 아군은 튀니지 공략을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로 끝났다.

 

이제는 병력과 보급 문제로 당분간은 공세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국의 루스벨트가 지원을 약속했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아직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루스벨트는 처칠과의 통화에서 영국이 필요로 하는 각종 식량과 의약품, 무기, 탄약을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내년 봄에는 미국이 지원한 물품들이 영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것으로 조금은 숨통이 트였지만, 여전히 전황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스가 추축 동맹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들었을 거요. 유고와 불가리아도 지금 히틀러 눈치를 보고 있고. 시기가 언제 되던 간에 이들까지 동맹에 합류하리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요. 거기다가 이라크에선 반란의 조짐이 보인다고 하오. 이집트까지 통째로 넘어간 마당에 이라크까지 독일에게 붙으면, 우리는 중동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 거요. 그 다음엔 인도가 되겠지."

 

뇌까리는 듯한 처칠의 말에 각료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총리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그 씁쓸함은 더욱 컸다.

 

특히 그리스는 전부터 친영 국가로 유명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조차 독일에 빌붙는데, 아무런 조치조차 취할 수 없다니.

 

천하의 대영제국 꼴이 말이 아니었다.

 

처칠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여론도 최악이고, 전황도 지지부진한 지금 작은 성과라도 거두지 않으면, 갈수록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처칠은 물론이고, 각료들조차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답답한 이는 처칠 본인이었다. 그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습관처럼 시가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토록 좋아하는 시가조차도 그의 마음을 풀어주진 못했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전황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해도, 국민한테는 다르게 보일 겁니다."

 

처칠은 이전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반려시켰다.

 

에티오피아 따위를 점령해봤자 전황에 얼마나 영향을 준다고? 기껏해야 무솔리니가 발광하는 것 정도?

 

하지만 지금처럼 작은 승리라도 목말라 있는 때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도록 하지. 내년 봄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동아프리카 공격 결정.

 

하지만 이걸로 부족하다.

뭔가, 뭔가 조금 더 큰 것이 필요한데.......

 

그래! 내가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독일 본토를 공습하는 것이 어떻소이까?"

 

독일 본토 공습이라고? 처칠의 말에 이제까지 지루한 침묵에 눌려있던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독일 본토를 공습해 국민에게 아군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여론을 반전시키는 거요! 동시에 독일의 산업역량에 타격을 주면 전황에도 유리하게 적용이 되겠지."

"하지만 각하. 독일 본토 공습 자체는 가능하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전투기들이 폭격기들을 독일 본토까지 호위해주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폭격기들의 희생이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영국 공군 전투기사령부 사령관 휴 다우딩 대장은 처칠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이미 처칠은 결심을 굳힌 직후였다.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나. 승리를 위해선, 불가피한 희생일세."

 

처칠의 시선은 다우딩의 옆자리에 앉은 아서 해리스 대장에게로 향했다.

 

"해리스 대장, 가능하겠나?"

"가능합니다, 각하."

 

훗날 '폭격기 해리스'란 별명으로 사람들에게 불리게 될 해리스는 씩 웃었다.

 

저 간악한 독일 놈들에게 불지옥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시간이 왔군.

 

그는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에 맞아 가루가 되는 독일 도시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벌써부터 몸이 흥분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

 

독일 본토 공습은 1939년부터 간간이 시행되어 왔지만, 이제까지 그렇다할 피해는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국민들이 열광하고, 여론을 반전시킬 수 있는 정도의 피해를 주어야 한다는 처칠의 명령으로 전에 없던 수의 폭격기들이 독일 본토 공습에 동원되었다.

 

수백 대의 휘틀리 폭격기가 활주로에서 이륙했다.

 

목적지는 독일 함부르크.

일반 시민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도시이자 독일 서부의 중요 도시로, 이곳을 폭격한다면 나치의 위신에 타격을 입히는 것은 물론, 독일의 전쟁수행에 적잖은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10분 뒤면 함부르크 상공에 도착한다!"

"대열 유지해!"

"내가 던지라고 하면 던진다, 알겠냐?"

"알겠습니다!"

 

폭격기 승무원들은 터질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함부르크 상공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토미들의 폭격기들이다!"

"서둘러! 함부르크가 잿더미가 되는 꼴 보기 싫으면!"

"여기는 3호기, 이륙한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독일군도 출격을 감행했다.

 

Bf109, Bf110 같은 쟁쟁한 전투기들이 함부르크 상공에 나타난 영국인 관광객들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이어지는 난전.

 

"투하! 투하!"

"티미가 당했어! 안 돼!"

"X발, 추락한다!"

"살려줘!"

"기수 높여! 당장!"

"편대 유지해! 이 개자식들아! 편대─."

"편대장님이 당했다!"

 

평화롭던 함부르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상에서도, 하늘에서도.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연휴를 즐기던 독일 시민들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공습에 동원된 RAF 조종사들에게도.

 

야간이 아닌 주간에 공습에 나선 탓에 RAF의 피해는 극심했다.

공습에 동원된 폭격기 절반이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고, 폭격기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인 조종사들도 덩달아 희생되었다.

 

대다수의 조종사들은 폭격기가 격추되면, 탈출하지 못하고 그대로 폭격기와 함께 죽음을 맞았다.

 

운좋게 탈출에 성공한 극소수의 조종사들의 운명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공습으로 집과 가족을 잃어 눈이 뒤집힌 함부르크 시민들이 영국인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도륙을 냈기 때문이다.

 

"저기, 저 새끼 영국놈이야!"

"죽여라!"

"잠깐, 살려─."

 

불과 연기에 휩싸인 함부르크 곳곳에서 살육극이 일어났다.

 

현장에 도착한 독일군들이 분노로 이성을 잃은 시민들을 말려야 했을 정도였다.

 

"그만! 그만!"

"비키세요, 선생님들!"

"왜 말려? 이놈은 폭탄을 투하한 영국 놈이란 말이야!"

 

정보를 얻기 위해서 조종사들의 생포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허나 이미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사람들에겐 그런 게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

 

"가증스러운 영국 놈들이 기어코!"

 

히틀러가 주먹을 내리치자, 책상의 서류들이 나폴거리며 바닥으로 낙하했다.

조금 전의 충격으로 살이 찢어져 피가 흘렀지만, 히틀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분노로 눈이 뒤집힌 그에게 주먹의 통증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함부르크 소식은 즉시 베를린의 히틀러에게 전달되었고, 함부르크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말에 히틀러는 격노했다.

 

전쟁이 터진 뒤로 이토록 극심한 분노는 처음이었다.

 

특히 이집트 점령과 그리스의 추축국 합류라는 경사 뒤에 이런 일이 터진지라 히틀러의 분노는 더했다.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아직 추산 중입니다."

 

괴링은 이어 '불행 중 다행으로 적들이 주간에 나타나 많은 수의 폭격기를 격추하였으며, 산업피해도 그리 크지 않다'고 말할 예정이었지만, 이어지는 히틀러의 고성에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네, 어떻게 할 텐가? 작년에 '독일 상공에 한 대의 적기라도 나타나면 자길 마이어라 부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초, 총통 각하. 그것이......."

"이제 어쩔 건가? 앞으로 나는 자네를 '헤르만 마이어' 선생이라 부르면 되겠는가?"

"죽여주십시오!"

 

하지만 히틀러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 전쟁을 하다 보면 도시가 폭격을 맞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괴링을 마이어라 부른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게 될지 모른다.

 

모든 승리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른다.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게 세상의 이치니까.

 

희생 없인 승리도 없는 법이다.

 

그러니 벌써부터 성을 내서 체력을 소모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내겐 이 나라 독일을 이끌어갈 의무가 있지 않은가.

 

"......그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지."

 

휴우. 히틀러가 분노를 가라앉히자 괴링은 속으로 안도했다.

 

"저놈들이 우리 도시에 폭탄을 떨궜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지. 그것도 몇 배로. 피는 피로 씻어야 하는 법일세. 안 그런가, 괴링?"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총통 각하!"

"지금 당장 케셀링 원수를 호출하게. 아, 밀히와 리히트호펜도 부르게. 영국인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지."

"예, 총통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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