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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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1화
51화 어둠의 시간 (1)
'속보, 카이로 함락!'
'영국군, 시나이 반도로 총퇴각'
'처칠에게 빗발치는 사퇴 요구......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
카이로 함락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을 때, 영국의 신문사들은 서로 경쟁하듯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내며 신문을 팔아치우기 바빴다.
그런데 카이로 함락이라는 최악의 소식에도 불구하고, 이곳 오랑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범하게 일과는 보내는 사람들을 보자니, 어째 신문들만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느껴져 괴리감이 느껴졌다.
일단 이곳 오랑이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 중의 극후방이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랑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는 알제리인과 프랑스인들.
다수의 알제리인들은 해외 소식에 그닥 관심이 없고, 프랑스인들은 이미 자기네 나라 수도가 독일에 따이는 것을 실시간으로 접한 터라 카이로 함락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오랑은 여느 때처럼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식중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원대복귀를 명령받았다.
개인물품들을 챙기고, 정든 병실과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새로운 전보가 전해졌다.
오랑에 그대로 있으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전보에는 그저 내게 오랑에 그대로 있으라는 말만 적혀 있었다.
나야 알제리 끝단까지 갈 필요가 없어져서 좋긴 했지만, 무슨 이유로 이곳에 계속 있으라고 한 걸까?
***
내 의문은 이틀 후에야 풀렸다.
내가 소속된 제7전차연대는 얼마 전 튀니지 방어선에서 벌어진 전투로 큰 피해를 입어, 상부로부터 본국으로 이동해 재편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따라서 나는 그대로 있다가 오랑에 도착한 본대와 합류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중위 아서 그레이, 원대복귀를 신고합니다."
"어서 오게, 중위. 그간 고생했네."
못 본 사이에 무어 대위는 5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법 좋은 대우를 받은 모양이군. 혈색이 좋아졌어."
"감사합니다, 중대장님."
무어 대위에 이어 게이츠 상사와도 인사를 나눴다.
게이츠 상사는 더 심각했는데, 이마의 주름이 몇 개 늘어난 것도 모자라, 머리숱이 반이나 벗겨진 상태였다(세상에).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중위님.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사......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겪었던 일을 생각하니 막상 말이 나오지가 않는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뭐, 뻔하죠. 위에서 내린 명령대로 전투에 나갔다가, 88과 슈투카에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지옥 그 자체였죠. 아라스에서 겪었던 일을 똑같이 반복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88과 슈투카의 연계 플레이라니.
생각만으로도 토가 나온다.
그 말을 증명하듯 중대원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익숙한 얼굴들 여럿이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리라.
"나왔다, 이 자식들아."
"소대장님 오셨습니까."
다행히 내 승무원들은 전원 생존에 성공했다. 그런데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죄다 머리나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붕대를 하도 많이 감아서 미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게이츠 상사한테 들었다. 고생 좀 했다면서?"
"어유, 말도 마십쇼. 진짜 뒤지는 줄 알았습니다."
잭슨은 상상만으로도 질린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 탓에 붕대가 풀리면서 관자놀이에 난 피멍이 드러났다.
"하필이면 포탄이 전차 옆에 떨어지는 바람에 전차가 전복돼서 겨우 탈출했습니다.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설명만 들어도 내가 다 아찔하군.
그런데도 용케 전원 무사히 살아서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몸이 좀 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에서 그친 게 어딘가.
"소대자니므 어떠셔읍니까?"
"나? 나야 뭐 입원해서 치료받았지....... 그런데 너 말투가 왜 그래?"
토마스가 대신 나서서 애덤의 말이 이상해진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저 녀석, 혀를 다쳐서 그렇습니다."
"아, 전차가 전복될 때 다친 거야?"
"아뇨. 어제 밥 먹다가 혀 씹은 겁니다."
"......."
가지가지 한다, 진짜.
***
오랑을 떠난 수송선은 닷새 뒤 포츠머스 항구에 도착했다.
열차를 타고 옥스퍼드로 향하는 동안, 창밖으로 시위 중인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팻말과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전쟁광 처칠은 물러가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전쟁은 이제 그만!"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마라!"
"시위대가 부쩍 늘었군."
무어 대위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나와 포커를 치던 중이었다.
뭐라고 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는데 말이지."
"그땐 아직 파리가 점령당하지 않았으니까요."
"자네 생각은 어떤가? 총리가 과연 히틀러와 협상하려고 할까?"
"잘 못 들었습니다만?"
난데없는 물음에 나는 당황해서 그를 쳐다봤다.
표정을 봐선 농담으로 한 말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물은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냥 한 번 물어본 걸세. 총리가 히틀러와 협상할 거라고 생각하나?"
"중대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 나는 잘 모르겠군. 제아무리 강철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일이 계속 안 풀리면 점차 의지가 흔들리기 마련이지. 내가 총리 본인이었다면, 솔직하게 말해서 과거에 협상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을 거야. 직접 총리를 만나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그가 협상할 거라고 보나?"
하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멘탈이 가루가 됐겠지.
됭케르크에서 육군을 말아먹고, 프랑스가 무너지고, 이제는 수에즈 운하까지 잃고 말았다.
사람들이 당장 전쟁을 멈추라고 난리를 치는 것도 당연한 알이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왜지?"
무어 대위는 내 대답이 뜻밖이었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총리가 보통의 평범한 정치인이었다면 됭케르크에 아군이 포위당했을 때 진작에 협상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린 아직 독일과 싸우고 있죠. 총리가 직접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독일군이 본토에 상륙해 런던을 집어삼켜도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노라고. 다른 건 몰라도, 그때 그 말은 '진짜'였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이 지금처럼 계속 전쟁을 반대하면?"
"......그래도 절대로 협상 따윈 하지 않을 겁니다. 원래 그런 양반이거든요. 대영제국이 다른 나라에 고개를 숙이는 걸 볼 바에 차라리 자살을 택할 사람입니다. 따라서 협상 같은 건 있을 수가 없죠."
무어 대위는 내 대답을 듣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럴듯하군. 그건 그렇고 자네, 마치 총리를 엄청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구만. 자네, 혹시 총리랑 친척 아닌가?"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미래의 지식을 토대로 한 말이라고 어떻게 말해.
아무튼 확실한 것은, 처칠 그 양반은 절대로 독일과 협상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인 목에 칼이 들어와도, 차라리 죽고 말지 절대로 협상의 협 자도 꺼내지 않을 인간이다.
비록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에, 본인이 항상 옳고 최고라고 생각하며, 식민지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는 제국주의자이긴 하다만.
그 무시무시한 나치 독일에 맞서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고, 국론이 반으로 분열되다시피 한 영국인들을 단결시킨 것은 오직 처칠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나저나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인데, 이래서야 원.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는 것도 물 건너 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앞으로 이틀 뒤면 크리스마스다.
21세기 한국에선 간만에 쉴 수 있는 빨간 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서양에서 크리스마스는 우리나라의 설날이나 추석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명절이다.
1년 전에도 유럽은 전쟁 중이었지만, 사람들은 평온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리라.
적어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카이로 함락 소식에 초상집 분위기가 된 런던과 달리, 베를린과 로마는 연일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아프리카 군단이 아프리카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에 환호하면서, 총통과 롬멜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거리는 아름답게 꾸민 트리들로 넘쳐났고, 제과점들은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크리스마스트리만큼이나 화려하게 장식된 케이크와 과자들을 진열했다.
"대승이야, 대승! 조금 이른 감이 없진 않지만, 독일 국민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로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총통 각하."
베를린의 총통관저도 연일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카이로를 점령했다는 롬멜의 전보를 받은 날, 히틀러는 총통관저를 돌아다니며 비서들부터 청소부, 요리사까지 모든 이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처칠, 그 늙은 돼지는 지금쯤 똥줄이 타서 죽을 지경일 겁니다!"
"하하하하하!"
"진작에 우리와 평화조약을 맺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지요."
"지금 런던은 초상집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행복이 과해 흘러넘칠 것만 같은 이 분위기에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또 하나의 희소식을 전했다.
"총통 각하, 그리스의 메탁사스 총리로부터 추축 동맹 가입을 희망한다는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그거 좋지. 나는 새 동맹국을 언제나 환영한다네."
이탈리아의 팽창정책을 우려의 눈으로 쳐다보던 그리스는 독일이 카이로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추축 동맹 가입을 결정했다.
이미 유럽 전역은 사실상 독일의 것이나 다름없으니, 추축 동맹에 가입하면 자기네 영토를 넘보는 이탈리아의 야욕을 막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었다.
이미 그리스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대거 추축 동맹에 가입하거나 그리스처럼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이탈리아와 루마니아, 헝가리는 동맹 가입국이었고, 불가리아와 터키는 중립이긴 하나 친독이었으며, 유고슬라비아 고위층 내부에서도 동맹에 가입해야 한다는 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비록 그리스는 국토가 산과 언덕으로 이루어진데다 자원도 없고, 군사력도 그닥이지만. 그래도 위치 하나만큼은 절묘하단 말이지."
히틀러의 말대로, 그리스는 이미 고대의 위엄을 모두 내다 버리고 지금은 유럽의 약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발칸반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그리스를 손에 넣으면, 발칸반도 전역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아니톨리아 반도를 통해 아시아로 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흑해로 통하는 바닷길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다!
터키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과한다고 한들, 그리스만 있으면 흑해에서 지중해로 가는 모든 배들을 통제하는 게 가능하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고.
이는 장차 소련 침공을 계획 중인 히틀러에게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곧 유고와 불가리아도 같은 소식을 전해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좋아, 아주 좋아."
이로써 발칸반도 전역은 사실상 독일의 손아귀로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히틀러의 머리는 다음 해인 1941년에 있을 계획들로 가득했다.
발칸을 발판 삼아 중동에 진출하고, 터키와 이란을 끌어들여 소련의 남부를 공략하면 스탈린에겐 치명타가 되겠지.
동시에 인도까지 공격해서 영국을 압박한다면......!
독일은 영국과 미국을 뛰어넘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독일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로 역사에 새겨질 테고.
내가 죽은 후에도, 사람들은 틀림없이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스마르크에 이어 나,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반드시!
대학에 떨어진, 별 볼 일 없는 화가 지망생 따위가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이 되리라고 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겠는가.
이래서 세상일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