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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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50화
50화 사막의 여우들 (9)
22살의 젊은 소위인 가말 압델 나세르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왔던가.
그에겐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포성과 폭음, 총성, 거리를 뒤덮은 피와 잔해들까지 전부 다.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세르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조국 이집트가 영국의 내정간섭을 받는 보호국이란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국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천 년에 달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조국이 어째서 신을 믿지 않는 이단자들에게 굴복하게 되었단 말인가?
이게 다 조국에 힘이 없어서, 적과 맞서 싸울 무력의 부재로 인한 결과물이라 생각했던 나세르는 일직이 군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그는 1939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뒤 수단으로 보내져 근무를 시작했다.
3개월 전, 다시 이집트로 돌아온 나세르는 자신과 뜻이 맞는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영국군의 무기고와 탄약고를 습격해 후방에서 혼란을 일으킨다는 나세르의 계획은 이제 곧 현실이 되려 하고 있었다.
나세르가 지휘하는 이집트군을 태운 트럭은 별다른 일 없이 무사히 영국군의 탄약고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예상대로 탄약고 주변의 경비는 삼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경비병력의 수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수의 병력이 독일군과 싸우기 위해 시내로 향한 탓이었다.
좋아, 해 볼 만하겠군.
나세르는 침을 꿀꺽 삼킨 뒤, 권총을 빼 들었다.
그가 트럭에서 내리자, 뒤 칸에 타고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하차했다.
병사들은 철저하게 연습한 대로 트럭에서 내리는 즉시 좌우로 흩어졌다.
나세르는 병사들을 이끌고 조심스레 탄약고로 접근했다.
탄약고 근처까지 병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와 함께 따라온 40명의 병사는 영국군 초병들을 조준했다.
지금이다!
나세르가 손을 내리자 수십 개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탄약고 밖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영국군 초병들은 그대로 나자빠졌다.
"적습이다!"
그러나 모든 영국군이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조준이 빗나가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영국군 병사들은 즉시 나세르의 쿠데타군을 향해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루이스 경기관총이 불을 뿜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쿠데타군 병사들을 구멍투성이로 만들었다.
"적습, 적습!"
"제리들이다!"
영국군은 자신들을 습격해온 상대가 독일군 공수부대로 착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독일군이던, 이집트인들이던 간에 싸워야 할 상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세르는 일이 꼬이자 쌍욕을 내뱉었다.
허나 아직은 그들이 우위에 있었다.
영국군의 수는 기껏해야 5명 안팎. 반면 나세르에겐 아직 30명의 병사가 있었다.
게다가 독일군 공수부대의 습격으로 영국군의 추가 병력은 없을 것이다.
"좌우에서 협공해라! 숫자는 우리가 더 많아!"
이집트군 병사들은 나세르의 지휘대로 좌우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영국군은 필사적으로 사격했지만, 기관총이 단 한 정뿐이라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모두 쓰러뜨릴 수 없었다.
"알라후 아크바르!"
한 병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류탄을 안고서 영국군 진지로 돌진했다.
수류탄을 던지기 직전, 총탄이 그의 몸을 꿰뚫었지만 이미 수류탄은 그의 손을 떠난 뒤였다.
요란한 폭발이 일어난 뒤, 더 이상 날아오는 총알은 없었다.
영국군 경비병들을 모두 제압한 나세르는 탄약고 안으로 돌입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절단기로 자물쇠를 따고 굳게 닫혀있던 철문을 열었다.
"......뭐야, 왜 텅 비었어?"
그런데 예상과 달리, 탄약고 내부는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나세르는 어이가 없었다.
뭐지? 영국 놈들이 미리 함정을 파둔 건가?
하지만 경비병들의 저항을 봤을 때 영국군이 미리 함정을 파둔 것 같지는 않았다.
"소대장님, 이곳도 비어 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탄약고 전체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것이라곤 겨우 수류탄 한 박스와 리-엔필드용 7.7mm 소총탄 두 박스가 전부였다.
치열한 교전의 결과치곤 썩 좋은 수확이 아니었다.
탄약고 내부가 비어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세르의 쿠데타군이 습격해오기 전, 탄약이 모든 부대로 반출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나세르의 쿠데타군은 텅 빈 탄약고를 차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희생을 감수하며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허탕을 쳤다는 생각에 나세르는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래도 영국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규모가 작긴 해도, 승리는 승리 아닌가.
"모두 철수한다. 동지들의 유해는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차에 싣도록."
수확은 적지만 임무 자체는 완수했으니 이제 떠날 차례였다.
나세르의 쿠데타군은 불타는 탄약고에 십수 명의 영국군 병사들의 시체들을 남겨둔 채 사전에 계획한 집결지로 유유히 떠나갔다.
***
"발터, 정지!"
베르거의 명령에 발터는 귀신같이 반응해 전차를 멈춰 세웠다.
"한스, 1시 방향에 적 전차다. 거리는 400. 비르크, 철갑탄으로 바꿔."
"알겠습니다!"
한스가 포탑을 돌리는 동안 비르크는 약실에 장전해둔 유탄을 빼내고 철갑탄을 장전했다.
4호 전차의 주포가 향한 곳에는 MK.6 경전차가 포탑만 전차호 밖으로 내민 채 사격 중이었다.
"장전 완료!"
"조준 완료!"
"발사!"
철갑탄에 포탑을 직격으로 맞은 경전차는 진하디 진한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 갔다.
한스는 틈틈이 공축기관총으로 참호 밖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영국군들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영국군이 전차의 기관총 사격을 피해 몸을 숙이고 있는 동안, 보병들은 참호 가까이 다가가 수류탄을 까 넣었다.
수류탄이 터질 때마다 주인을 잃은 팔다리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사람들 앞에서 묘기를 부리는 돌고래처럼.
"아아아아악!"
4호 전차가 참호를 타 넘을 때, 어느 영국군 병사는 그만 무한궤도에 팔이 짓밟혀 으스러지고 말았다.
그 병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팔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전차를 따라 진격하던 한 독일군이 그를 발견하고 총을 겨누었지만, 옆에 있던 병사가 막아섰다.
"됐어, 어차피 네가 쏘지 않아도 뒈질 놈이야."
"예? 하지만......."
"그냥 냅둬. 저놈들은 고통스럽게 죽어야 해. 저놈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이런 개고생을 하는 거라고."
하노마크 장갑차에 탑승한 병사들도 참호의 영국군을 향해 총질을 하거나 수류탄을 던졌다.
안 그래도 인원 부족과 탄약 고갈에 시달리던 영국군의 방어선은 독일군의 맹공에 금방 뚫리고 말았다.
전선을 돌파해 진격하던 독일군의 앞에 작은 조각상 같은 건물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로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카이로는 시내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과 연기 덕분에 멀리서도 훤히 보였다.
쌍안경으로 카이로를 응시하던 베르거는 산처럼 생긴 세모꼴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베르거는 활짝 웃어 보였다.
"저게 바로 피라미드로구만. 지금까지 사진으로 본 게 전부였는데......."
"여기서도 보입니다, 상사님!"
한스의 눈에도 피라미드의 모습이 보였다.
조준경을 통해 피라미드를 본 한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다수 병사가 피라미드를 사진으로 본 적은 있어도, 실물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핑크스도 보입니까, 상사님?"
위치상 밖을 볼 수 없는 비르크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서 스핑크스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안 보이네. 하지만 금방 보게 될 걸세."
***
"우...... X발."
웨이벌은 아직 살아있었다.
순간의 판단이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건진 것과 별개로 그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수류탄의 폭발력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책상은 걸레짝이 되었고, 폭발의 충격으로 그는 책상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파티에서 과음한 다음 날 깨어났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은 머리에서만 느껴지지 않았다. 팔과 다리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꼭 바늘에 찔린 것만 같은 날카롭고 괴로운 통증이었다.
눈을 떠보니 새끼손가락만 한 나무 파편이 팔과 다리에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웃기지도 않는군.
웨이벌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나뭇조각을 붉게 적시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수류탄을 던진 범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냄비처럼 단순하게 생긴 투박한 철모에 오른쪽 가슴팍에 달린 독수리 마크.
화룡정점으로 손에 들린 MP40까지.
아주 완벽한 독일군 공수부대원의 복장이었다.
"항복해라!"
웨이벌의 앞에 나타난 독일군은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영어로 항복을 명령했다.
하지만 웨이벌은 상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옆구리에 찬 권총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MP40의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웨이벌은 몸에 총알이 연달아 박히는 것을 느꼈다.
통증이 느껴지기도 전에, 그의 의식은 끊어졌다.
"죽어도 포로가 되는 건 싫었나......."
라머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이 쏴죽인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을 내려다봤다.
웨이벌의 육신은 이미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강하 도중 낙하산에 구멍이 뚫려 추락했던 그였지만, 기적적으로 이중으로 된 천막 위로 떨어진 덕분에 살 수 있었다.
몸 곳곳에 찰과상이 생기긴 했지만, 임무 수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었다.
행운의 여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라머스는 생각했다.
고트 미트 운스(Gott Mit Uns). 신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벨트의 버클에 새겨진 문구가 이토록 마음에 들긴 처음이었다.
"중대장님? 살아계십니까?"
"그래, 나 아직 안 죽었다."
라머스를 뒤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병사는 피 웅덩이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웨이벌의 시신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부하를 쳐다보며 라머스는 씩 웃어 보였다.
"네가 보기엔 어때? 이번에야말로 기사십자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냐?"
지난번 몰타에서의 공적으로 그는 기사십자장 후보에 올랐지만, 끝내 떨어지고 말았다.
극도로 혼잡한 전투 상황에서 그가 몰타 주둔군 총사령관 윌리엄 도비 중장을 사살한 것이 확실시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관료적인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분명히.
***
1940년 12월 20일,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입성했다.
카이로의 영국군은 다수가 전사하거나 추축군의 포로가 되었고, 카이로를 빼앗긴 영국군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 대대적인 퇴각을 감행했다.
카이로가 함락됨에 따라 수에즈 운하는 무용지물로 전락했고, 드넓은 지중해는 사실상 독일과 이탈리아의 앞마당으로 변하고 말았다.
대영제국의 앞날에 어둠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