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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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5화
45화 사막의 여우들 (4)
독일군의 알렉산드리아 소식은 영국 전역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특히, 대영제국의 총리 미스터 처칠에겐 더더욱 그랬다.
요 며칠간 영국군의 알제 함락 및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괴멸이라는 승전보에 취해 있던 처칠은 이집트에서 들려오는 패전 소식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함락 직전이고, 카이로에선 이집트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니.
그는 전보를 받는 즉시 전쟁성으로 달려가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비상 회의를 연다고 해서 당장 전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알렉산드리아를 사수해라, 이 말 외에 더 할 말이 있던가?
광인처럼 날뛰는 처칠에게 직언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외무장관 이든이 입을 열었다.
"각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이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처칠은 그를 홱 노려보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실을 직시하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알렉산드리아를 사수하라는 명령은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처칠이 말을 꺼내기 전, 알렉산더도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외무장관님의 말이 맞습니다, 각하. 이미 알렉산드리아는 틀렸습니다. 지금 당장 구원군을 파견하라고 명령해도 도시의 함락은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면? 다른 수가 있단 말인가?"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은 카이로 방어에 집중하는 겁니다."
처칠 자신도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끝났다는 것을.
저들의 말대로 알렉산드리아는 포기하고, 남은 병력으로 방어선을 굳히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전에는 몰타가 그리되더니, 이번에는 알렉산드리아로군. 다음번에는 카이로가 되려나? 아니면 수에즈? 그도 아니면 이곳 런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처칠이 힘없이 뇌까렸다.
회의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알렉산더 장군."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처칠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분노에 가득 차 있던 목소리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 있었다.
"예, 각하."
"알제리에 상륙한 아군은 어디까지 진격했나?"
"지젤까지 전진했습니다."
지젤은 알제와 튀니지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알제를 빼앗긴 비시 프랑스군은 튀니지를 향해 퇴각하는 중이었고, 영국군은 그 뒤를 쫓고 있었다.
"못해도 일주일 뒤에는 튀니지 국경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독일군이 카이로에 도달하기 전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튀니지를 손에 넣어야 하네. 그래야 독일 놈들이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네. 수에즈를 잃으면, 우린 금방 바그다드까지 밀려나고 말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하는 거냐, 치매 왔냐?
마음 같아선 이렇게 쏘아주고 싶었지만,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는 알렉산더였다.
***
전투는 절정을 지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헉! 헉! X발, 진짜!"
카를로 루치아노 상병은 브레다 M30 경기관총을 들고 잔해와 시체로 뒤덮인 거리를 내달렸다.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다녔다.
카를로의 동료들도,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총탄에 맞아 저세상으로 갔다.
그가 속한 1분대의 생존자들은 카를로 본인을 포함해 겨우 4명이 전부였다.
"카를로! 여기야, 여기!"
동기인 알베르토 로시가 손을 흔들었다. 그는 포격으로 무너져 내린 어느 집 벽 뒤에 숨어있었다. 벽에는 아직도 형이상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벽지가 붙어있었다.
카를로는 슬라이딩을 하듯 벽 뒤로 몸을 던졌다.
총탄 두어 발이 벽에 맞았지만, 알베르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용케 살아남았구나. 나는 진즉에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말이야."
"너 같은 놈도 살아있는데, 내가 죽을 수 없지."
알베르토의 농담에 가볍게 응수하면서 카를로는 기관총을 놓을 자리를 탐색했다.
저곳이 좋겠군.
그는 받침대만 남은 창틀에 조심스레 기관총을 올려놓았다.
"다른 분대원들은?"
"건너편에 있어. 여기서는 안 보일 거야."
"물 좀 있냐? 내 건 다 마셔서 없어."
"나도 부족하거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알베르토는 자신의 수통을 카를로에게 건네주었다.
열기 때문에 수통 속의 물은 한 번 끓였다 식힌 물처럼 뜨뜻했다.
카를로가 수통을 입에 가져가려는 순간, 적이 시야에 들어왔다.
영국군 열댓 명이 조심스레 걸어오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끝에 위치한 5명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흑인이었다.
영국군에도 흑인이 있었나?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카를로는 잠시 넋이 나갔다가, 이내 자신의 임무를 떠올리곤 서둘러 기관총을 잡았다.
"영국군이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영국군들이 도미노처럼 주르륵 쓰러졌다.
대열의 끝자락에 위치한 덕분에 목숨을 건진 3명은 왼쪽의 건물 뒤로 몸을 피했다.
건물 뒤편에서 거친 욕설이 날아왔다.
Fuck, Bloody hell 등등.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카를로도 욕으로 응답했다. 그것도 영어로.
"오, 뭐야? 너 영어 할 줄 알았냐?"
"새꺄, 당연하지. 전에 미국 갈 거라고 내가 말 안 했냐?"
2년 전, 카를로는 미국행을 준비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작은 식당을 차린 그의 삼촌이 사업이 번창해 그에게도 미국행을 권유해서였다.
삼촌의 편지를 받은 카를로는 바로 미국행을 준비했다.
미국으로 가 삼촌 밑에서 일하며 돈을 잔뜩 번 뒤, 다시 나폴리로 돌아와 새 집을 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징집 영장이 날아오는 바람에 그는 미국행이라는 꿈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제대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이번에는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자연스레 카를로의 복무기간도 무기한으로 연장되고 말았고, 지금은 이집트에서 영국군과 총질을 주고받는 신세가 되었다.
"하여간 너랑 나랑 재수는 아주 더럽게 없어요, X발. 안 그렇냐?"
"야, 나는 빼줘. 너만큼 재수 없는 인간은 지구상에 없거든?"
원래대로라면 알베르토는 후방 중에서도 후방인 밀라노의 군사령부에서 복무할 예정이었다.
그와 사귀는 여자의 친척이 군에서 제법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바람둥이였던 알베르토는 여자친구를 놔두고 옆집 누나와 바람을 피우다 걸렸고, 덕분에 밀라노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리비아로 보내지고 말았다.
"너 솔직하게 말해. 그때 그 여자 놔두고 바람 피우던 거 후회하냐?"
"내가? 그럴 리 있겠냐. 밀라노 못 간 것은 아쉽긴 하다만, 그래도 그 뚱녀랑 평생 살 것도 아니었거든. 남자가 어떻게 평생 한 여자만 사귀어야 하냐?"
"하여간 이 새끼, 얼굴은 모델급인데 마음씨는 쓰레기 그 자체라니까."
서로 과거를 곱씹고 있을 때, 다시 영국군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숫자가 제법 많았다.
"X발, 그 사이 플라나리아처럼 증식이라도 했냐? 더럽게 많네!"
"일단 쏘기나 해, 인마!"
미친 듯이 쏘아대는 총탄에도 영국군은 꾸준히 전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총탄까지 떨어졌다.
이런 X발! 하필이면 지금!
카를로는 온갖 쌍욕을 토해내며 예비 탄창을 꺼냈다.
총탄이 다 떨어지면 탄창만 교환해주면 되는 다른 탈착식 기관총들과 달리, 브레다 M30은 지랄 맞게 복잡한 장전과정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장전 손잡이를 당겨 노리쇠를 후퇴시켜 놓은 뒤, 탄창 멈치를 꾹 눌러 탄창을 반 회전시키고, 20발짜리 클립을 탄창에 밀어 넣고 클립만 당겨서 빼내고, 탄창을 원래대로 돌려서 장착시키면 끝.
이 모든 과정을 훈련 때도 아니고 실전에서도 반복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브레다 M30은 모든 이탈리아군 병사들의 원성을 샀다.
당연한 얘기지만, 탄창 교체를 끝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적군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카를로가 탄창을 교환하는 동안, 알베르토는 혼자서 영국군에 맞섰다. 그의 카르카노가 쉬지 않고 불을 뿜는 사이 카를로는 필사적으로 탄창을 갈아 끼웠다.
긴장해서 그런지 자꾸만 손이 엇나갔다.
"야! 아직 멀었어?"
"잠깐만! 이제 됐다!"
겨우 탄창 교체를 끝낸 카를로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지만, 불행의 여신은 아직 그를 떠나지 않았다.
탄창이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총이 불발되는 것이 아닌가.
"뭐해? 빨리 안 쏘고?"
"X 됐다. 총이 고장 났어."
"뭐라고?!"
하다 하다 이제는 총 자체가 고장이 나버렸다.
길고 복잡한 탄창 교환방식만큼이나 복잡한 내구도 때문에 브레다 M30은 자주 고장을 일으켰는데, 특히 날씨가 무덥고 먼지가 많은 아프리카 전장에서는 잔고장이 더더욱 심했다.
당황한 카를로는 총몸을 손으로 쳐댔지만 총은 여전히 묵묵부답.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우왓!"
어느새 근처까지 온 영국군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벽에 맞고 튕겨 땅바닥에서 폭발했다.
기적적으로 카를로와 알베르토는 털끝도 다치지 않았지만, 사방이 적이었다.
X발, 이제 어떡하지?
카를로는 앞이 컴컴해지는 느낌이었다.
항복할까? 그런데 영국군이 조금 전까지 자기들을 향해 기관총을 쏴대던 우릴 살려줄까?
곧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데, 다시 한번 기적이 일어났다.
쾅!
맞은편 벽이 무너지면서 거대한 4호 전차가 굴러오는 것이 아닌가.
난데없이 괴물과 맞닥뜨린 영국군들은 당황했다.
마치 저승사자라도 만난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들을 향해 포탑과 차체에 장착된 MG34 두 정이 불을 뿜었다.
카를로와 알베르토를 향해 다가가던 영국군들은 죄다 벌집이 되어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이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둘은 이내 정신을 차리곤 미친 듯이 만세를 외쳤다.
"살았다! 살았다고!"
"저 친구들 좀 봐라. 우리가 대신 해치워줬다고 엄청 좋아하는군."
베르거의 말에 한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가 구세주처럼 보였는가 보죠."
***
영국군의 저항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상황이 절망적이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병사들도 생겨났다.
이미 패배가 확실시된 이상, 목숨이라도 챙기고 보자는 심리였다.
"쏘지 마! 쏘지 마!"
"항복하겠다!"
그러나 항복하는 병사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을 떠나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당연한 본능이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으니 말이다.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항복하는 영국군을 쏘지 않았다.
무기를 압수하고, 손에 깍지를 끼게 한 뒤 후방으로 보냈다.
후방은 투항하는 영국군들과 이를 처리하는 추축군들로 만원이었다.
"각하, 위험합니다."
"뭐가 위험하다는 건가? 이미 적들은 거의 다 정리되지 않았나."
롬멜은 루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휘장갑차에서 내려 알렉산드리아 시내를 걸었다.
비록 전보다 사그라들긴 했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총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롬멜의 참모들은 행여 구석에 짱박혀 있던 영국군이 나타나 롬멜을 향해 기관단총이라도 갈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지만, 롬멜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숱하게 사선을 넘나들었던 그였다. 그런데 겨우 패잔병 따위를 두려워해서야.
"베를린에 전보를 보내게. 알렉산드리아 점령을 완료했다고."
"아직 도시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어허, 사실상 점령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러니 잔말 말고 전보나 보내게. 총통 각하께서 기뻐하실 거야."
루크는 롬멜의 명령대로 베를린에 전보를 보내기 위해 뛰어갔다.
참모들과 함께 영국군들의 피로 얼룩진 거리를 걷던 롬멜은 멈춰서서 담배를 꺼냈다.
그러자 참모들도 일제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
격렬한 전투 끝에, 승리감을 맛보며 피우는 담배의 맛은 황홀했다.
롬멜은 두어 모금을 더 빨아 들은 뒤, 옆에 있던 병사에게 줘버렸다.
"각하, 선두 부대로부터의 보고입니다."
"말하게."
"알렉산드리아 주둔 영국군이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했답니다. 수뇌부는 공습과 잇단 전투에서 모두 죽는 바람에 해군 대령이 최선임자라고 합니다."
"그렇군."
롬멜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투가 시작될 때, 푸른색이었던 하늘은 어느새 피처럼 진한 선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