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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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2화
42화 사막의 여우들 (1)
눈을 떴을 무렵에는 이미 전투는 끝나있었다.
내가 깨어난 곳은 야전병원이었다.
도처에 부상병들이 간이텐트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미동조차 없었는데, 잠시 후 군의관-자그마치 소령이었다-과 위생병들이 다가와 뭔가를 검사하더니, 들것에 실어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아무래도 시체안치소로 가는 듯했다.
"아, 중위. 깨어났구만. 정신이 좀 드는가?"
내가 깨어난 걸 발견한 군의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연기를 좀 마셔서 어지러울 거야. 그래도 급한 시기는 지났으니 안심하도록."
"가, 감사합니다......."
"어디 보자, 그리고 다리 쪽에 파편이 두어 개 박혀서 빼냈고, 팔뚝에도 화상을 입었지만 1도 화상이니 염려 말게나. 연고를 발라줬으니 이틀 정도 지나면 완전히 나을 걸세. 질문 있나?"
"아뇨, 없습니다."
"화장실 가고 싶으면 갔다 오게나. 조금 어지러울 순 있어도 걷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 말이야. 화장실은 텐트 뒤쪽에 있다네.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부턴 다시 임무에 복귀하게나."
군의관은 옆에 있는 환자에게로 다가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군의관의 진료가 끝나고, 한 20분쯤 지났을 무렵에 부하들이 찾아왔다.
의리 있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오, 깨어나셨군요, 소대장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래, 이 녀석들아."
이렇게 말하는 잭슨은 정작 뺨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듣자 하니, 불붙은 파편을 맞아서 화상을 입었단다.
토마스는 얼굴과 팔에 덕지덕지 붙은 반창고만 빼면 전체적으로 멀쩡했다.
그리고 애덤은...... 벌써부터 광대뼈가 드러날 지경이다. 대체 얼마나 싸댄 거야?
"군의관이 뭐라고 합니까?"
"별거 아냐. 연기 좀 마셔서 조금 어지러울 거라고. 파편도 다 빼냈으니 걸어 다니는 데 아무 지장 없을 거라는군."
"천만다행입니다."
매튜는 죽었다고 한다. 그것도 즉사였다.
샤르 B1 bis의 75mm 포탄이 전차의 전면장갑을 관통했을 때, 그는 그대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듣자 하니 시체가 아주 토막이 난 탓에 수습하는 데 애를 먹는 중이라고 한다.
오늘 처음 본 사이였지만,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거기다 전차 조종술은 애덤을 뛰어넘을 정도였고.
그런데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참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 식중독에 걸려 이번 전투에 불참한 애덤은 살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상한 음식들을 먹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식중독에 걸리지 않았을 테고, 이번 전투에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매튜가 아니라 그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생각해 보니 오늘 먹은 음식이라곤 출전 직전에 먹은 초콜릿이 전부다.
당연히 지금 위에는 든 게 없었고, 배는 빨리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너희들, 뭐 먹을 거 있냐?"
"어, 없는뎁쇼."
"저돕니다."
안타깝게도 잭슨과 토마스 둘 다 수중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애덤은 달랐다.
천부적인 식탐과 먹성을 자랑하는 그는 식중독으로 인한 설사에 시달리면서도 늘 먹을 것을 빼먹지 않았다.
"소대장님? 괜찮으시다면 이것 좀 드십쇼."
녀석이 품에서 꺼낸 것은 살구잼을 바른 비스킷이었다.
배고 너무 고팠던 나는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녀석의 손에서 비스킷을 낚아챘다.
"여윽시, 소대 최고의 조종수다워. 나는 니가 정말 자랑스럽다."
"과찬이십니다."
마실 것도 없이 그냥 먹은 터라 목이 텁텁하긴 했지만, 먹을 게 들어가자 배는 다시 잠잠해졌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지금부터 1시간하고 13분 뒤에는 저녁시간이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
지금이라면 그 맛없고 밍밍한 수프도, 푸석푸석하기 짝이 없는 군용 빵도 상관없었다.
그 어떤 음식이라도 맛있게 해치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시간아 빨리 흘러라!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행보관님께서 집합하라고 하셔서. 몸조심하십쇼."
"그래. 내 걱정은 말고 가서 니들 할 일이나 해."
부하들이 떠난 뒤, 나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텐트 가장자리에 있는 의자에 놓인 라디오에선 제목을 알 수 없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상병들의 심신 안정을 위해 틀어놓은 모양인데, 얼마 못 가 음악이 끝나면서 전시뉴스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오늘 뉴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용감한 해군은 대서양 진출을 노리는 간악한 적의 해군과 맞서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며.......
전시에나 흘러나올 법한 전형적인 뉴스로군.
말하는 것만 들으면 무슨 인간이 아니라 식인 괴물하고 싸우는 줄 알겠다.
아, 물론 나치는 괴물이란 소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막장이긴 하다만.
-......그리고 아군은 모로코와 알제리에서도 연일 승전보를 올렸습니다. 현재 아군의 선봉대가 알제 외곽에서 전투 중이며 늦어도 이틀 안으론 점령을 완료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다음 뉴스는 후방의 비행기지에서 병사들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이 열렸다는 것과 우리의 위대한 수상 처칠 나으리께서 병원을 방문해 부상병들과 시민들을 만났다는 소식이었다.
이외에도 재미도 없고 쓸모도 없는 얘기들이 이어지다가 뉴스가 끝났다.
그런데 의외로 반드시 나올 줄 알았던 이집트 전선 뉴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라지만, 아무래도 전황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언급을 피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안 그래도 여전히 반전파의 목소리가 높은데, 사실대로 말해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으니 조용히 넘어가자는 속셈이겠지.
사실대로 말했다간 반전파 입지만 세질 텐데 누구 좋으라고?
......그런데 아까 전부터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
"부관."
"예, 각하."
"참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무슨 의미인지 도통 짐작할 수 없는 상관의 물음에 한스 폰 루크 대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말입니까?"
"우리 같은 군인들이야 싸울 곳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굳이 이런 환경에서 살 필요가 없단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 이런 척박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
에르빈 롬멜 소장은 전에 본 베두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낮에는 찌는 듯한 더위에, 밤이 되면 한겨울마냥 춥고, 물조차 귀한 이런 곳에서 어째서 사람이 살 수 있는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맨 처음 이곳에 정착한 이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막에서 애를 낳고 살 생각을 했을까? 이곳에 무슨 장점이 있다고?
희대의 명장이라 불리는 롬멜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늙어서 몸뚱이가 예전 같지 않은데, 이곳에 오니 더 늙어진 것 같네. 하루가 지날수록, 나이를 1년씩 더 먹는 기분이랄까. 그러니, 영국군 따윈 빨리 해치우고 독일로 돌아가야겠어. 흰머리가 더 늘기 전에 말이야. 겨우 집에 갔더니 마누라가 얼굴 못 알아보면 섭섭하지 않겠나?"
"하하하하!"
한적한 카페에서 느긋하게 차나 마시면서 나눌법한 얘기를, 롬멜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지휘장갑차 안에서 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최전선에선 거친 총격과 포격이 오가는 중이었다.
롬멜의 명령은 간단명료했다.
탄약과 기름이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전진할 것.
"쏴! 쏴라!"
사막색 도장을 한 2호 전차가 영국군 진지를 향해 20mm 기관포를 퍼붓자, 기관총을 쏘던 영국군의 상체가 퍽 소리와 함께 깨진 도자기처럼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기관총이 침묵하자, 보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돌격을 감행해 피와 살점투성이인 참호로 뛰어들어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숨이 붙어있던 영국군 병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모래포대 사이로 포신만 삐쭉 내민 2파운더가 다가오는 전차를 향해 발포했다.
좌측 궤도가 끊어진 2호 전차가 정지하자, 이번에는 보이즈 대전차소총이 불을 토했다.
13.5mm 총탄은 정확히 2호 전차의 전면장갑을 맞추었지만, 장갑 표면에 약간의 흠집만 났을 뿐이었다.
되려 2호 전차가 곧장 반격을 가해 대전차소총 사수를 다진고기로 만들어놓았다.
"젠장, 쏴!"
아군의 처참한 죽음을 근거리에서 목격한 포수는 악에 받쳐 포를 쏘았다.
이번에는 포탄이 튕겨 나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차체 하단에 철갑탄을 맞은 2호 전차는 구멍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그대로 침묵했다. 격파였다.
"좋아! 다음 목......."
그러나 그들의 투지는 거기까지였다.
4호 전차의 75mm 유탄이 명중하자, 2파운더는 모래포대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대전차포를 운용하던 병사들도 화염에 삼켜졌다.
유탄에 맞아 형편없이 찌그러진 대전차포와 토막 난 병사들의 시체를 전차의 무한궤도가 무심한 듯 밟고 지나갔다.
***
"온다! 전투 준비!"
벌써 이 말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다니엘은 쉰 목을 억지로 쥐어짜 소리치며 서둘러 개인호로 들어가 철모와 소총을 집어 들었다.
나흘 동안 이어진 전투가 겨우 끝나고 이제 좀 쉬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독일군이 쳐들어왔다.
어제는 파스타, 오늘은 감자와 소시지라.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니 X발, 밥 좀 먹자고! 제발!
나흘 동안 비스킷 한 조각, 물 한 모금밖에 못 먹었던 말이다!
갑작스런 적군의 기습으로 막 솥뚜껑을 열고 배식을 준비하던 취사병들도 참호에 처박혀 국자 대신 소총을 들고 대기 중이었다.
잠시 후 독일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참호의 영국군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독일군의 규모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못해도 1개 연대는 됨직했다.
반면 이쪽은 겨우 1개 중대.
대전차화기라곤 2파운더 2문이 전부에, 그나마 남아있는 포탄은 스무 발 내외다.
차라리 항복할까?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 다니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인원과 무기론, 저 많은 독일군을 물리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와 그의 부하들이 아무리 열심히 싸운다고 해도, 죽는 독일군의 숫자만 달라질 뿐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무의미한 희생 대신 깨끗하게 승복하고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명예냐, 목숨이냐를 두고 그가 갈등하고 있을 때,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독일군을 향해 2파운더가 발포를 감행했다.
두 문 모두 동시에 발포하여, 1호 전차와 Sd.Kfz 222 경장갑차를 멈춰 세웠다.
허둥지둥 밖으로 튀어나오는 적 기갑병들의 당황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다니엘의 명령이 없어도 병사들은 알아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전차와 장갑차 사이에서 달려오던 독일군 몇 명이 바닥에 쓰러졌다.
일부는 죽지 않았는지 쓰러진 상태로 몸을 굴러 전차나 장갑차 뒤로 몸을 피했다.
이 새끼들, 사람 고민할 틈도 안 주네.
다니엘은 쓴웃음을 흘리며 소총을 들어 사격했다.
전투가 시작된 마당에, 가만히 서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불타는 장갑차 사이로 튀어나온 적병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긴 그는 적이 쓰러지는 걸 보고 다음 목표를 찾아 총구를 돌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귀에 피슉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손이 갑자기 돌처럼 딱딱하게 굳으면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왜 이래, 이거?
당황한 그는 노리쇠를 잡은 손에 힘을 줬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비단 손뿐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굳으면서 말을 듣지 않게 된 것이다.
시간상으론 분명 낮인데도, 일식 현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세상이 어두워졌다.
다니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졸린 거야?
이제까지 잠을 못 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잠이 올 리가 없는데...... 아니, 그보다 내가 뭘하고 있었더라?
분명 무슨 중요한 일을 하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째서?
다니엘의 영혼이 육체를 떠난 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다니엘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