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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5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4화

34화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2)

 

 

"만나서 반갑습니다, 원수 각하. 저번에도 한 번 뵈었지요."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페탱이 내민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도 다시 만나서 반갑소이다, 외무장관."

"자, 날이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둘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 사람이라곤 검은색 복장의 웨이터들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엄격한 시험과 조건을 거쳐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레스토랑 밖에는 비시 프랑스군 헌병대와 독일군 무장친위대 병사들이 레지스탕스의 테러에 대비하여 철통같이 경계 중이었다.

 

주문한 요리와 와인이 나올 때까지 둘은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시간을 때웠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에 페탱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리벤트로프 장관, 당신도 얼마 전 모로코에 영국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물론입니다, 각하."

 

그걸 총통께 전한 사람이 바로 납니다.

 

리벤트로프는 코트 다뇨(Cotes d'agneau, 양갈비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썬 뒤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음, 알맞게 잘 익었군.

와인도 제법 훌륭한걸.

 

"그래서 말인데, 히틀러 총통께 내 말을 전해주셨으면 하오."

"말씀하시지요."

 

페탱은 적색 와인을 한 모금 삼켜 목을 축였다.

 

리벤트로프는 여전히 코트 다뇨를 써는 데 몰입 중이었다.

 

"총통께 내가 독일의 수용소에 갇힌 프랑스군 병사 5만 명의 석방을 부탁한다고 전해주시오."

 

그제야 리벤트로프는 코트 다뇨를 써는 일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말투에선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드러났다.

 

"하지만 각하, 총통께서 그것을 쉽게 허가해주실 리가 없다는 것을 각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이오. 하지만, 지금의 프랑스군만으론 모로코에 상륙한 영국군을 몰아내기란 불가능하오. 장관도 알지 않소이까?"

 

페탱은 다시 와인을 들이켰다.

긴장해서 그런지 자꾸만 목이 말랐다.

 

"내가 직접 북아프리카 주둔군에게 최후까지 저항하란 지시를 내렸지만, 그래도 상황이 많이 좋지 않소. 병력도 적고, 무기도 빈약하지. 이런 부대로 영국군을 물리치기란 불가능하오. 따라서 추가로 병력을 파견해야 하는데, 지금 프랑스 국내에 있는 병력으론 택도 없소. 그러니까 하는 말이외다."

 

페탱의 말대로, 비시 프랑스 내에 있는 프랑스군 병력은 수가 극도로 적어 치안유지용 부대에 가까웠다.

 

북아프리카에 병력을 증파하기 위해선 포로수용소에 있는 프랑스군 병사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빼 와야 했다.

 

리벤트로프는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잔에 담긴 와인을 마신 후 겨우 입을 열었다.

 

"음, 원수 각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총통께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도 알고 있소. 그러니 이렇게 전해주시오. 우리 프랑스가 동맹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선 더 많은 병사가 필요하다고 말이오. 까놓고 말해서 북아프리카가 모두 영국의 손아귀로 넘어가면 독일에도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지 않소."

 

그건 그래.

 

리벤트로프는 페탱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령 북아프리카가 모두 영국에게 넘어간다면 이집트 공략을 노리는 독일과 이탈리아에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좌우로 협공을 당해 리비아를 잃고 지중해로 밀려나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길 우려도 있었다.

 

그건 안될 일이지.

 

"각하의 말씀에 반박할 수가 없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총통께 각하의 뜻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외무장관."

 

***

 

메크네스를 점령하는 일은 의외로 금방 끝났다.

 

메크네스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군이 우리가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듣곤 바로 내뺐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메크네스에선 총성 한 발 울리지 않았지만, 아군은 제법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당장 내가 속한 1중대에서만 포격으로 전차 3대가 완파 당했고, 5대가 크고 작은 손상을 입어 정비중대로 보내졌다.

 

전투 중 사망자의 숫자만 9명, 부상자는 11명이나 되었다.

 

거기다 보병들의 피해까지 합산하면 사상자의 수는 200명을 넘겼다.

 

나 역시 머리에 난 상처 때문에 군의관의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전투가 끝나고 거울을 보니, 머리에 커다란 피멍이 든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군의관 말에 따르면 그렇게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내 머리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은 뒤, 몇 개의 진통제를 주었다. 그걸로 내 치료는 끝이었다.

 

"모두들 진짜 고생 많았다. 다들 수고했어."

 

무어 대위도 전투 중에 부상을 입었는지 관자놀이에 거즈와 반창고를 붙인 상태였다.

 

그는 우리의 공을 치하한 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이 거둔 성과와 사단 본부에서 우리의 공을 치하한다는 전문을 보내온 걸 설명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희소식이 있었다.

 

"우리는 이제 전진하지 않는다."

"?"

 

전진하지 않는다고? 이건 또 뭔 소리야?

 

"본부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르면 우리의 자리는 다른 부대가 대신할 예정이라고 하네. 우리는 다시 라바트로 돌아갈 거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새 목적지로 떠날 것이다. 알겠나?"

"예, 중대장님!"

 

모두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후방으로의 철수 소식이었다!

 

세상에, 이게 꿈은 아니겠지?

 

라바트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을 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제야 푹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날 괴롭히던 두통이 싹 사라진 듯했다.

 

"빠르면 내일, 늦어도 이틀 뒤엔 후속 부대가 우릴 대신하러 올 걸세. 오늘의 경계근무는 보병들이 대신 서준다고 하니 그렇게 알고, 다들 푹 쉴 수 있도록. 대신, 저녁에는 장비 점검이 있을 예정이니 잊지 말도록. 해산!"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그때, 무어 대위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레이 소위, 자네에겐 따로 할 말이 있네."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다고? 또 뭔데?

 

괜히 불안함을 느끼며 다가갔더니, 무어 대위는 내게 담뱃갑을 내밀었다.

그 자신은 이미 입에 한 개비를 물고 있었다.

 

"자네도 한 대 피우게."

"아...... 감사합니다만, 전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중대장님."

"그래? 의외군. 아, 그러고 보니 자네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못 봤구만."

 

무어 대위는 담뱃갑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자네의 활약 덕분에 적 포대를 신속하게 제압할 수 있었지. 내 부하지만, 정말 대단한 일이야. 아주 훌륭해."

"아닙니다, 중대장님! 다 부하들이 저를 믿고 따라와 준 덕분입니다!"

"이 사람, 겸손은. 부하들을 잘 다루는 것도 능력 아닌가?"

 

무어 대위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입과 코에서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가만 보니 이 양반, 도넛 만들기 장인이구만?

 

"그렇잖아도 대대본부에 자네 전공을 보고했더니, 아주 기뻐하더구만. 조만간 진급 소식이 있을 거야. 미리 알고 있으라고 불렀네. 알겠나, '예비 중위' 나으리?"

 

***

 

무어 대위의 말대로 이틀 뒤, 본부에서 공식 명령서와 계급장이 도착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중위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중대에 무어 대위를 제외한 다른 장교들은 모두 중위였는데, 이제는 나도 그 무리에 당당히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기쁘게 만든 것은 군복에 새 계급장이 달린 것도, 사람들이 나를 '그레이 소위님' 대신 '그레이 중위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후방으로의 철수였다.

 

우리 연대를 대신할 새 기갑연대가 메크네스에 도착하자, 우리는 지체 없이 메크네스를 떠나 라바트로 향하게 되었다.

 

라바트로 향하는 길은 우리가 메크네스로 향할 때처럼 길고, 지루하고, 모래먼지 투성이였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무척 즐거웠다.

 

티퍼레리까지는 길이 멀구나

 

참으로 머나먼 길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사는

 

티퍼레리까지는 길이 멀구나!

 

안녕, 피카딜리야,

 

잘 있거라, 레스터 광장아,

 

티퍼레리까지는 길이 멀지만

 

내 마음은 그곳에 있다네!

 

라바트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장교부터 이등병까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비스킷이나 미지근한 커피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울 필요도 없고, 전차 안에서 불편하게 새우잠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드디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됐네.

 

지금만큼은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부르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모로코의 사막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늘에선 스핏파이어 3대가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

 

"음, 페탱이 그런 말을 했다고?"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아서 그레이가 기쁨을 담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베를린에선 리벤트로프가 히틀러에게 페탱이 한 말을 전하고 있었다.

 

페탱의 말을 리벤트로프를 통해 전해 들은 히틀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턱을 괸 자세로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던 리벤트로프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제 직감으론, 그가 우리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런가."

 

히틀러는 페탱이 한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페탱의 말대로, 북아프리카가 그대로 영국에게 넘어가면 이집트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를 손에 넣는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페탱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엔 조금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나마 양심이 있어서 5만 명만 석방해달라고 요구하긴 했는데, 그 5만 명이 수용소에서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가자마자 독일을 향해 총부리를 돌리면 그때는 또 골치 아파진다.

 

그렇다고 페탱의 요구를 무시하자니, 괜히 프랑스의 반독 감정만 더 악화시키는 결과로 돌아오진 않을지 우려스러웠다.

 

뭐 하나 쉬운 일이 없구만, 정말.

 

혹시 모를 비시 프랑스의 반란과 영국군의 북아프리카 점령이라는 가정을 두고 저울질하던 히틀러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페탱의 말대로 프랑스군 포로 5만 명을 석방하게. 대신! 우리 독일에 협조적이고 영국을 증오하는 자들로 골라서 말이야. 무턱대고 아무나 내보낼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괴벨스 박사에게 전해서 그 모습을 촬영하도록 하게. 프랑스인들이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말이야."

 

히틀러의 계획은 이랬다.

 

페탱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랑스군 포로 5만 명을 석방하는 대신, 친독 성향의 포로들을 선별해 그들 먼저 우선적으로 석방하고, 그 광경을 영화로 촬영해 독일과 프랑스 전역에서 상영한다.

 

자국의 포로들이 '히틀러 총통의 은혜'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배신자' 영국군과 싸우기 위해 전장으로 가는 모습이 프랑스인들에겐 제법 나쁘지 않은 인상을 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인들 스스로 영국과 싸우길 청하는데 이를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영국군과 붙어먹지는 않을지 조금 우려가 되긴 하지만, 그래도 독일 병사들이 흘릴 피를 아낄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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