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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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30화
30화 횃불 작전 (4)
총성이 가까워질수록 니콜라 알베크 일병은 자신도 모르게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같은 조에 속한 벤자민 발렘 병장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인지 연신 입술을 핥았다.
지금 상황에선 시간이 별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틈만 나면 손목에 찬 시계를 쳐다봤다.
"빌어먹을 영국 놈들. 벌써 저 모퉁이까지 왔구만."
벤자민이 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며 뇌까리듯 말했다.
"아군 포병대는 왜 아직도 가만히 있는 겁니까?"
니콜라의 물음에 벤자민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걔네들? 진즉에 다 전멸했잖아. 기억 안 나냐?"
"아...... 너무 긴장해서 깜빡했습니다."
프랑스군 포병대는 영국군의 공습으로 전멸한 지 오래였다.
포병대가 전멸해버리는 바람에 그들은 아무런 지원 없이 영국군에 맞서야 했다.
최신형 마틸다 전차에, 공군과 해군의 지원을 받는 영국군을 상대로 말이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니콜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처음 모로코에 배치되었을 땐 왜 많고 많은 곳 중에서 하필 여기인지 불만이 가득했지만, 덕분에 전쟁터에 가지 않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조국이 전쟁에서 패해 독일의 괴뢰국으로 전락한 것은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죽거나 불구의 몸이 되는 것보단 패전국의 군인으로 남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애초에 군에 입대한 것도 입대할 나이가 되어서였지, 애국심 때문에 입대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무난한 군 생활을 보내며 건강하고 멀쩡한 몸으로 제대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전쟁과는 거리가 먼 줄 알았던 이곳에서조차 전쟁이 일어나다니.
그것도 상대는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맹국이었던 영국이었다.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왜 자신한테는 운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일까?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영국군은 그들 코앞까지 다가왔다.
숨죽인 채 정면을 예의주시하던 벤자민은 영국군이 나타나자 반사적으로 니콜라의 어깨를 쳤다.
"왔다, 준비해!"
"예, 옙!"
니콜라는 훈련에서 배운 대로 베르티에 소총의 개머리판에 뺨을 갖다 댔다.
벤자민도 MAS 38 기관단총을 들어 올렸다.
둘의 목덜미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인근의 기관총 진지가 먼저 영국군을 향해 발포했다.
사격이 시작되자, 영국군은 전차 뒤로 숨거나 바닥에 엎드렸다.
적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린 틈을 타, 니콜라와 벤자민도 방아쇠를 당겼다.
"맞았다!"
니콜라는 자신이 조준한 영국군 장교가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그러자 곧바로 벤자민의 쿠사리가 날아왔다.
"조용히 해, 인마! 쏠 때마다 그 소리할 거냐?"
그는 기관단총을 난사해 영국군 2명을 동시에 쓰러뜨렸다.
교범대로 짧게 끊어서 쐈음에도 금방 탄창 1개가 바닥났다.
벤자민이 탄창을 교체하는 사이, 니콜라는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전차 뒤에서 폭발했다.
덕분에 전차 뒤에 숨어 있던 영국군 4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이번에는 벤자민이 소리를 질렀다.
"좋아! 바로 그거지!"
탄창 교환을 끝낸 벤자민이 다시 총을 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눈먼 총알이 날아와 그의 미간을 꿰뚫었다.
피가 튀는 걸 느낀 니콜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 벤자민 병장님......?"
벤자민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미간에 뚫린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가 그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갑작스런 전우의 죽음에 니콜라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어 눈먼 총알 한 발이 그의 관자놀이에 명중했다.
니콜라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라바트 시내로 진입한 아군은 프랑스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우리의 적들은 비단 프랑스군뿐만이 아니었다.
라바트에는 많은 프랑스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프랑스군은 그들을 후방으로 대피시키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의 민간인들이 라바트에 남아 있었다.
"소대장님, 앞에 민간인입니다!"
"어디?"
애덤의 말대로 전차 앞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더러워진 옷을 입은 소년이 서 있었다. 시내에 거주하던 민간인이 분명했다.
소년은 전차 앞에 버티고 서서 비킬 생각이 없는 듯했다.
보병들이 총을 겨눴지만,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인지라 섣불리 총을 쏘지 못했다.
"어떡합니까, 소대장님?""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애덤이 내게 해결책을 물었다.
"젠장, 내가 해결하지."
답답해진 나는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소년은 계속 같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야! 저리 가! 여긴 위험하다고!"
안타깝게도 나는 프랑스어를 봉쥬르(Bonjour)와 무슈(Monsieur), 마담(madam) 외엔 한 마디도 몰랐기에 영어로 소리쳤다.
녀석은 자신을 향해 손짓하며 소리치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솔방울을 닮은 F1 수류탄을 꺼내 내게 던졌다.
수류탄이 포탑을 맞고 굴러떨어지는 것을 본 나는 기겁하며 냉큼 포탑 안으로 들어갔다.
수류탄이 터지자 깜짝 놀란 애덤이 괴성을 질렀다.
"우앗!"
"소대장님, 괜찮으십니까?!"
토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다행히 나는 심장이 조금 놀란 것만 빼면, 멀쩡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수류탄을 던진 소년은 도망치다가 아군 보병들이 쏜 총탄에 맞아 픽 쓰러졌다.
방금 봤던 광경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맙소사, 어린애까지 수류탄을 던지다니.
이런 짓은 알카에다나 탈레반 같은 이슬람 광신도들이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전투가 시작되자, 프랑스 민간인들도 군을 도와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병사들처럼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아군을 공격했다.
물론 프랑스군이 미쳐서 민간인들을 강제로 전투에 끌어들인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영국이 싫다지만, 민간인들까지 동원해가며 싸울 놈들은 아니었다.
모종의 이유로 일부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가한 듯했다.
우리에게 있어 결코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전진하던 우리는 다시 프랑스군의 방어선과 마주쳤다.
우리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관총과 대전차포로 아주 성대한 환영 행사를 열어주었다.
정면에서 섬광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날선 금속음이 귀에 울렸다.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호치키스 25mm 경대전차포였다.
앞서 상대했던 르노 FT-17의 37mm 주포보다 관통력이 몇 배나 뛰어난 녀석이긴 하지만, 이 역시 마틸다의 장갑을 뚫기엔 한참 부족했다.
"정면에 적 대전차포다!"
티거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 옹이 대전차포는 전차 2대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정도로 대전차포는 전차병에게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잘 은엄폐를 한 경우에만 해당하는 말이다.
위치를 발각당한 대전차포는 전차병의 전과 1을 위한 손쉬운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놈의 전차가 발목을 잡았다.
잭슨은 대전차포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지만, 총탄은 대전차포의 포방패에 튕겨 나갔다.
프랑스군 대전차포병들은 포방패 뒤에 몸을 숨긴 탓에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총탄이 포방패에 튕겨 나갑니다!"
"아오, 썅!"
장전을 끝낸 대전차포가 재차 불을 토했다.
이번에도 포탄은 마틸다의 장갑을 뚫지 못하고 도탄 되었다.
철갑탄밖에 없어서 기관총으로 대전차포를 잡으려는 전차와 적 전차의 장갑을 뚫지 못하는 대전차포의 대결이라니,
자강두천이 따로 없구만.
"애덤, 전진해!"
"예!"
할 수 없이 나는 애덤에게 전진을 명한 뒤, 비상용으로 챙겨둔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적 대전차포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수류탄 핀을 뽑은 다음 힘껏 던졌다.
수류탄은 정확히 적 대전차포 뒤에서 터졌다.
폭발과 함께 사람의 팔다리로 추정되는 것들이 사방으로 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애덤과 잭슨은 본인들이 잡은 것처럼 환성을 지르며 신나 했다.
"놈을 잡았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소대장님! 어떻게 수류탄을 쓰실 생각을......!"
제4차 중동전쟁을 다룬 이스라엘 드라마 '눈물의 계곡(Valley of Tears)'에서 본 장면이 떠올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해본 건데, 정말로 성공할 줄이야.
내가 시도하고도 얼떨떨했다.
아무튼 대전차포를 잡는데 성공했으니,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모래주머니와 부서진 가구, 벽돌 따위를 쌓아서 만든 바리케이드는 전차에 부딪히자 금방 뚫리고 말았다.
"전진! 계속 전진해!"
우리는 거침없이 진격하며 도망치는 프랑스군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그때 벽돌더미 뒤에서 한 무리의 프랑스인들이 튀어나왔다.
모두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손에는 소총이 들려 있었다.
잭슨은 저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는 순간 즉시 기관총을 난사했다.
전차는 구멍투성이가 된 프랑스인들의 시체를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어느 용감한 프랑스군은 달리는 전차에 달려들어 수류탄을 해치 안에 까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은 전차에 오르기도 전에 발을 헛디뎌서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무한궤도가 넓적다리를 짓밟자, 입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전차를 뒤따르던 보병이 프랑스군의 관자놀이에 총알을 박아 넣어 고통을 끝내주었다.
"11시 방향에 적 전차다!"
이번에 나타난 녀석은 앞의 르노 FT-17보다는 발전한 르노 AMR 35 경전차였다.
무너진 건물 벽 뒤에 숨어서 우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이 시야에 들어오자 놈은 곧바로 포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포탄은 이번에도 도탄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녀석의 주포는 조금 전의 25mm 대전차포와 같은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회심의 일격이 허무한 실패로 끝나자 녀석은 후진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저놈이 도망치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조준 완료!"
"쏴!"
덜커덩 소리가 들리고 이어 탄피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가 포탑에 울러 퍼졌다.
프랑스군의 AMR 35는 어느새 화염에 휩싸여 연기를 무럭무럭 뿜어대고 있었다.
***
프랑스군의 공격은 계속되었지만, 갈수록 그 강도가 시들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전투를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총알이 다 떨어진 건가 싶었지만,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정면에 적...... 어? 잠깐만!"
프랑스군의 진지가 나타나자 잭슨에게 사격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적 진지에 걸린 백기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프랑스의 삼색기를 잘못 본 건가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총알이 날아오지 않았다.
뒤따르던 보병들도 진지에 걸린 백기를 보자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가 머뭇거리자, 프랑스군 장교 한 명이 진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옆구리에 권총집을 차고 있긴 했지만, 손에는 무기가 없었다.
"쏘지 마라! 항복하겠다!"
그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큰소리로, 그것도 영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무기도 없이 무방비한 상태로 걸어 나온 것을 보니 함정인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주저하며 해치 밖으로 상체를 내밀자 장교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턱이 인상적인 장교였다.
"우린 항복하겠소. 부하들에겐 모두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소이다."
"어...... 정말입니까?"
내 대답이 미덥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장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가리켰다.
백기 아래에 모여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프랑스 병사들이 보인다.
"정말이오. 프랑스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
항복한 프랑스군은 장교를 포함해서 모두 16명이었다.
16명이면 1개 소대도 되지 않는 숫자다.
하지만 아무리 수가 적어도 포로는 포로였다.
나는 곧바로 무어 대위에게 무전을 넣었다.
"여기는 선풍기. 뻐꾸기는 응답 바람."
-여기는 뻐꾸기. 무슨 일인가?
"장교를 포함해서 프랑스군 16명을 포로로 잡았다. 보병들에게 맡기고 계속 전진하는가?"
-아, 그럴 필요는 없다. 현 시간부로 모두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고 위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 그러니 포로들을 데리고 얌전히 현 위치에서 대기할 수 있도록, 이상.
30분 뒤 걸려온 무전에는 라바트의 프랑스군 수뇌부가 아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횃불 작전의 첫 시작은 아군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