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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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21화
21화 뜻밖의 초대 (3)
언젠가 런던에 가는 것을 꿈꾸기는 했다만, 그 런던이 1940년의 런던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열차에서 내린 나는 어렵지 않게 나를 마중 나온 '환영단'과 마주할 수 있었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 둘, 정장 차림의 사람이 일곱.
한 명은 여자인데 지나칠 정도로 큰 안경을 쓰고 있는 게 특이했다.
기품있는 흑색 정장에 파란색 넥타이를 맨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내게 웃는 얼굴로 악수를 권했다.
"자네가 아서 그레이 소위로군! 만나서 반갑네!"
"가,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우리는 절친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힘찬 악수를 나눴다.
"자, 얼른 가도록 하지. 총리 각하께서 자네를 기다리고 계신다네!"
"알겠습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나도 모르게 갓 전입온 신병처럼 큰 목소리로 말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중년의 남자는 허허 웃으며 내 등을 두들겼다.
"이 친구, 긴장했구만! 긴장 풀게나. 우린 독일군이 아니니까!"
"하하하하하!"
"하하하...... 알겠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상상되니 쪽팔리네.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구만.
그나저나 진짜로 처칠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게 정말로 꿈은 아니겠지?
살다 살다 역사책에 나오던 그 '윈스터 처칠'을 만나게 될 줄이야.
어째 독일군과 싸우러 갈 때보다 더 긴장되는 것 같다.
***
차는 그 유명한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멈춰 섰다.
주변은 카메라와 수첩을 든 기자들로 가득했다. 어디서 정보를 미리 들은 건지 잘도 모여 있었다.
여기 오게 된 장본인인 나도 안 지 몇 시간 전인데 말이야.
차가 멈추고, 내가 문을 열고 내리자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번쩍거리는 섬광 세례에 눈이 따가웠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는 차 안에서, 기자들 앞에선 무조건 웃는 얼굴을 하라는 당부를 받아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문 앞에서 대기하던 중무장한 헌병이 문을 열자 나는 눈을 의심했다.
"허허허, 이 나라의 영웅께서 드디어 나타나셨구만."
처칠이,
그 처칠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띤 채로.
"소위! 아서! 그레이! 입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쳤던가.
말을 더듬거리거나 실수라도 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연습했다. 다행히 훈련의 성과는 충분했다.
아무튼, 2차 세계 대전의 큰 흐름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과 첫 만남은 순조롭게 시작했다.
처칠은 내 우렁찬 목소리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하하하! 씩씩해서 좋구만! 이게 젊음이라는 건가? 반갑네, 그레이 소위!"
"영광입니다, 총리 각하!"
우리가 악수하자 기자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지금 찍힌 이 사진이 신문, 그리고 훗날 역사책에 실리게 될지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내가 지금 누구든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자아, 이 먼 곳까지 오느라 배가 많이 고플 텐데 식사부터 하지. 그다음엔 차를 마시면서 얘기도 나누고."
"알겠습니다, 총리 각하!"
"이 친구 아직도 얼어있군. 긴장 좀 풀어, 이 친구야!"
그는 내게 긴장을 풀라는 의도로 등을 두들겼다. 그런데 어째 좀 아프다.
본인 딴에는 가볍게 친 것이지만, 생각보다 힘이 세서 그런지 맞는 사람 임장에선 등이 따끔거릴 정도다.
이 양반, 생긴 것만큼이나 힘도 세구나.
본의 아니게 아는 게 하나 늘었군.
만찬실로 가는데 기자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문이 닫히기 전, 정부 측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3시간 후에 다시 이곳으로 모여달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3시간 후라, 그 안에 밥 먹는 시간과 차 마시면서 수다 떠는 시간이 포함된 것이겠지?
만찬실로 들어서자,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식탁보가 씌워진 커다란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각 자리에 명표가 놓여 있었는데, 내가 앉을 자리는 처칠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예상은 했다만, 아무래도 꽤나 떨리는 시간이 될듯하다.
부대를 방문한 국방부장관 옆자리에서 밥을 먹는 병사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제야 좀 알 것 같구만.
가장자리가 화려한 무늬들로 장식된 접시는 여기에 음식을 담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불손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수저도 무게가 제법 나가는 진품 은제 수저였다.
수저가 이렇게 무거워서야 제대로 식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사이, 요리사들이 음식이 담긴 커트를 밀면서 만찬실 안으로 들어섰다.
부대에서 한 번도 맡아볼 수 없었던 기가 막히게 맛있는 냄새를 풍기면서.
"그레이 소위, 자네를 위해서 준비한 만찬이니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먹게나. 자, 와인 먼저 마시고!"
"아, 감사합니다."
처칠이 잔을 들자, 웨이터가 다가와 와인을 따랐다. 그 동작이 너무 우아해서, 마치 발레를 보는 것 같았다.
대영제국의 총리 관저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저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도 차원이 다르구나.
처칠이 먼저 와인을 마시는 걸 확인한 뒤에야 와인을 마셨다.
상큼하면서 은은한 단맛이 먼저 느껴지고, 그 다음 알코올 특유의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듯하다가 다시 부드러운 단맛이 혀를 감쌌다.
와인에 대해서 무지한 나조차도 이게 얼마나 고급 와인인 줄 알 수 있었다.
역시 고급은 맛부터가 다르구만.
끝내준다, 진짜.
"어떤가? 마음에 드나?"
"어우, 최곱니다. 이렇게 맛있는 와인은 제 인생 처음입니다."
"허허, 이 친구, 호들갑 떨기는. 이 정도는 보통인데, 뭘. 그레이 가문의 일원이면 와인은 질리도록 마셨을 텐데 말이지."
아, 맞다. 나는 귀족이었지.
그렇다면 귀족들에겐 이 정도 와인은 평범하다는 뜻일까?
사람들이 괜히 귀족, 귀족거리는 게 아니었구만!
와인을 맛보는 사이 요리사들이 음식을 차례차례 식탁에 올려놓았다.
음식은 영국 요리와 인도 요리가 반반 섞여 있었다.
그 유명하다는 비프 웰링턴부터, 스테이크, 요크셔 푸딩(고기를 굽는 과정에서 생기는 기름으로 만든 빵), 오믈렛, 각종 과일이 토핑으로 올라간 파이, 인도의 상징하는 요리인 커리까지.
그 외에도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는데, 죄다 이름을 모르는 것들이었다.
뭐,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엔 스테이크 하나 써는 것도 쭈뼛거리면서 했는데, 나중에는 주변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마음껏 먹었다.
자주 있는 자리가 아닌 만큼, 이때 즐기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후회한다.
그러니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게다가 이 자리는 나를 위해서 마련한 자리라니까, 마음 놓고 먹어도 된다!
처칠, 저 양반도 긴장 풀고 마음껏 먹으라고 했잖아!
요리는 대체로 맛있었다.
영국 요리하면 맛대가리 없는 요리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요리 호소인'들이 떠오르겠지만 놀랍게도 정말로 음식은 맛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총리가 먹는 음식인데 맛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맛이 좋았던 것은 과일과 생크림을 얹은 파이였다.
비프 웰링턴이나 스테이크는 맛은 좋았지만 고기가 너무 덜 익었다는 감이 없진 않았고, 커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시큼하고 짠맛이 났다. 그래도 맛있었지만.
식사하는 도중에 처칠은 내게 가벼운 농담을 건네거나 질문을 자주 던졌다.
"내가 군생활을 한 지 오래되어서 말인데, 요즘 군대는 어떻게 나오나? 맛있는 거 자주 나오나?"
"예, 그렇습니다."
사실은 뻥이지만.
아니,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잖아.
눈앞에 있는 사람은 사단장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그런가?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구만?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각하."
"......하하하"
설마 1940년의 영국에서, 그것도 처칠의 입에서 '요즘 군대 편해졌네' 같은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갈수록 어메이징하다.
***
식사가 끝난 후에는 응접실로 이동해서 차를 마셨다.
제공된 홍차 역시 군대에서 마시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향만 맡아도 고급품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 자네에게 물어볼 게 조금 있는데, 괜찮겠나?"
홍차에 무지막지한 양의 크림을 부으며 처칠이 내게 물었다.
일개 소위한테 물을 게 뭐가 있나 싶었지만, 정석대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각하."
"전차병인 자네가 보기엔 우리 전차들은 어떤 것 같은가? 소감이 궁금해서 그런 것뿐이니 허심탄회 얘기해주게. 그냥 자네의 생각이 궁금하니 말이야."
처칠의 질문은 조금 뜻밖이었다.
전차들이 어떤 것 같냐니.
평소에 생각하던 게 있지만, 그걸 여기서 말해도 될까?
분위기도 생각해야 하고 말이지.......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말해보겠는가.
그냥 내 생각을 말하라고 했으니 있는 그대로 말해도 되겠지.
설마 그 '윈스터 처칠'이 신병에게 놀리듯 함정을 팠을 리 없고.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성능입니다만, 개선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
처칠은 내 답변이 자기 생각과는 많이 달라 놀랐는지 찻잔을 든 손을 멈췄다.
설마...... 나 실수한 건가?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만.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대체 뭘까?
하지만 이미 질러버린 이상 물러나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게나."
"예, 제가 탑승했던 전차는 마틸다 1과 마틸다 2로, 마틸다 1은 장갑이 튼튼하지만 속도가 너무 느리고, 무장이 기관총 1정뿐이라 적 기갑차량을 상대로는 무력합니다. 마틸다 2는 2파운더 주포가 달려 있어서 본격적인 전차전이 가능하지만, 포탄이 문제입니다."
"포탄이 문제라고?"
처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 말은 불량품이 많다는 소리인가?"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마틸다 2는 보병전차인데, 포탄은 오직 철갑탄밖에 없습니다. 이게 왜 문제냐면, 실전에서 적 보병들과 대전차포를 상대하려면 유탄이 필수인데, 그게 없어서 보병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공축기관총만 사용해야 합니다."
아서 그레이가 되기 전부터 생각했던 부분이라 막힘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실제로 얼마 전 제가 참전했던 아라스 전투에서, 적 대전차포를 격파하기 위해 공축기관총의 사정거리까지 무리하게 진격하다가 역으로 격파당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내가 직접 목격한 적은 없으니까). 유탄이 있었다면 없었을 일인데 말입니다. 따라서 개선이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리를 함께한 인물 중 몇몇이 내가 하는 말을 열심히 받아적었다.
전차와 관련된 부서나 업종의 관계자들일까?
아씨, 계속 말해도 되는 거 맞아? 하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렇군. 잘 알겠네. 관련 부서에게 잘 전달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각하."
"계속 말하게나. 아무래도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참에 다 하고 가야지."
"그, 그래도 됩니까?"
"물론!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자네 같은 최전선에 싸우는 이들의 말이 아닌가! 고칠 게 있다면 고쳐야지!"
기왕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봐야지.
어차피 못 할 말도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