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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4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9화

19화 뜻밖의 초대 (1)

 

 

프랑스에서의 참패를 뒤로하고, 우리 중대는 재편성에 들어갔다.

 

영국 내에 있던 제대로 된 군인들은 모두 프랑스에서 됭케르크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숫자도 숫자였지만, 그들이 영국 육군 중에서 손꼽히는 정예라는 사실이 더 큰 문제였다.

 

순식간에 정예병력을 프랑스에서 잃은 영국군은 전국적으로 징집을 시행해 부족한 병력의 숫자를 채워나갔지만.

이들을 그나마 싸울 줄 아는 군인으로 훈련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전까지 독일이 가만히 있어 준다면 좋으련만.

 

전멸한 중대를 재창설하기 위해 새로운 장교들과 하사관들, 병사들이 대거 전입해 왔다.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다행히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편이었지만, 병사들은 대부분 입대한 지 얼마 안 된 신병들이었다.

 

전차도 새로 지급되었고, 중대장도 새로 도착했다.

 

새로운 중대장의 이름은 어니스트 무어 대위로, 앞의 해리슨 대위와는 달리 인자한 미소에 서글서글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머리숱은 해리슨 대위보다 더 없었지만(눈물).

 

"그래, 자네가 이제까지의 임시 중대장이었다지? 아는 어니스트 무어 대위일세. 잘 부탁하네!"

"아서 그레이 소위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중대장님!"

"그래, 그래. 목소리가 커서 좋구만."

 

무섭고 빡센 사람이 오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왔다.

어떤 상관이 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내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중대에 새로 도착한 전차들은 모두 마틸다 2 보병전차들로, 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열차에 실려 이곳으로 보내진 따끈따끈한 신품들이었다.

전차뿐만이 아니라, 보급품도 모두 헌 물건들은 반납하고, 새 신품들로 수령했다.

 

1905년, 극동에서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생산되었던 내 수통도 1년 전인 1939년에 생산된 새 수통으로 바뀌었고, 장구류도 모두 흠집 하나 없는 신품들로 교체되었다. 심지어 승무원용 헬맷까지도!

덕분에 부대의 사기는 비교적 좋았다.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갑자기 왜 이렇게 저희한테 신품들만 몰아서 주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입니다."

 

군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게이츠 상사도 이런 일은 난생처음인지 어리둥절했다.

 

나 역시 자세한 이유는 알지 못했으니, 대충 추측이나 할 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는 전부 다 '행정상의 착오'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무능하고 일 못 하는 공무원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1940년의 대영제국도 그 점에 있어선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가 받은 새 보급품은 원래대로라면 새로 편성될 사단의 병사들에게로 향했어야 했다.

 

하지만 도중에 필요한 서류가 누락되는 바람에 우리는 새 보급품을 수령하고, 정작 신생 보병사단의 병사들은 우리가 쓰던 헌 보급품을 수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헌 물품이라도 받은 부대는 행운아였다.

 

됭케르크에서 장비와 물자는 죄다 버리고 온 탓에 많은 부대가 기본적인 장비와 물자도 없이 맨몸으로 훈련을 받는 상황이었으니까.

 

대부분 사례와 반대되는, 예외 중의 예외인 상황이 우리 부대에만 일어났으니 이것도 어찌 보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이유가 어찌 되었던 간에 신품들을 받았으니 좋은 일이죠! 그렇잖아도 요즘 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니, 사기 진작용으로 준 것일 수도 있고요."

"생각해보니 소위님 말씀이 맞는 것 같군요. 저희야 뭐 상관없는 일이지만, 민간인들은 어떻게 하련지 모르겠습니다."

 

게이츠 상사의 말대로 군인들이야 새 보급품을 뿌린다던가, 배식을 늘린다던가 하는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사기를 올릴 수 있지만, 민간인들은 그리 단순한 방법으로 사기를 올리는 게 힘들었다.

 

됭케르크의 참사가 알려지자 여론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프랑스의 전장에서 아들을 잃은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울부짖으며 정부와 군의 무능을 성토하는 시위를 열었다.

민간인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군 막사에서도 시위대가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부는 죽은 내 아들을 살려내라!"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을 지지하지 않겠다!"

"이다음엔 우리들까지 전쟁터로 내몰 생각인가!"

"전쟁광 처칠은 즉시 사퇴하라!"

 

자그마치 20만이나 되는 병력이 그대로 증발하고 말았으니,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들 반전(反戰) 세력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수도 런던에서는 이미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처칠은 직접 대국민담화에 나서 어떤 일이 있어도 독일과 협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처칠의 방송은 되려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 되었다.

 

평화회담 대신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분노한 사람들은 얼마나 더 많은 영국의 자식들이 전장에서 죽어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며 처칠 내각을 비난했고, 데일리 메일이나 더 가디언, 타임스 같은 저명한 신문들도 일제히 처칠에 대한 날 선 비판이 가득 담긴 기사들을 쏟아낼 정도였다.

 

독일에 굴복할 수 없다며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자식이나 친척, 연인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사람들의 절규와 목소리를 억누르진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련지......."

 

게이츠 상사는 일부러 말꼬리를 흐렸다.

대놓고 말은 할 수 없지만, 그도 사실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정부가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당장 전쟁터로 가서 싸울 일이 없어지니까.

 

아시아엔 일본이 남아있고, 영국과 휴전한 독일이 얼마나 날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당장은 내가 죽을 일이 없어지니 얼마나 다행인가.

 

요즘 정세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영국 역사상 언제 이보다 더 반전에 대한 목소리가 강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알기론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난 이 시대 사람도 아니라고!

 

내가 왜 내가 태어난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싸우다가 죽어야 하는데?

 

비겁하다거나, 겁쟁이라고 욕해도 상관없다.

 

나는 영웅이 아니고, 될 생각도 없다. 그저 남들처럼 조용히, 편하게 살고 싶은 소시민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세상은 나를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

 

평소처럼 훈련을 마치고 막사로 복귀하는데 대대본부에서 호출이 들어왔다.

 

대대장이 나를 찾는다는 소식에 온몸의 털들이 쭈뼛 솟는 느낌이었다.

 

대대장이 왜 나를 찾지? 또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최근에 딱히 트집 잡힐 만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아마도.

 

다행히 분위기를 보니 나를 질책하기 위해서 찾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왜 부르는 거지?

 

내게 이 사실을 전하러 온 병사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아무튼 나는 그를 따라 대대본부로 뛰어갔다. 일단, 가보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소위 아서 그레이, 명령을 받고 출두했습니다!"

"왔군. 어서 오게."

 

대대장 윌리엄 브랜슨 중령은 엄숙한 태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본인 거고, 하나는...... 설마 내 거?

 

"와서 앉게. 커피 좀 들겠나?"

 

이미 커피가 내 자리에 놓여 있는 마당에 괜찮다고 사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하하, 뭘 이 정도로 감사할 필요까진 없네. 자, 식기 전에 들게나."

 

최근의 물자 통제를 반영하듯 커피 맛은 맹물에 가까웠지만, 향은 좋았다.

 

그나저나 대체 대대장은 무슨 일이 있길래 일개 소위에 불과한 내게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연대 최고의 폐급 장교였던 내게?

 

하지만 먼저 입을 열 처지가 아니라 일단 지금은 커피만 마셔야 했다.

 

잔의 바닥이 슬슬 모습을 드러낼 즈음,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브랜슨 중령이 말을 꺼냈다.

 

"솔직하게 말하겠네.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말도록."

"예? 아, 물론입니다."

 

그는 미사여구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넨 연대 최고의 골칫덩이였지. 그렇지 않나?"

 

브랜슨 중령의 첫 마디에 나는 마시던 커피를 그만 뿜을 뻔했다.

 

이 양반, 바로 팩트로 때려버리시네.

 

근데 그게 또 사실이긴 했다.

 

"하하하...... 그,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지난 프랑스 전선에 보인 활약을 듣고 깜짝 놀랐네. 연대 최악의 장교였던 자네가, 그런 대활약을 할 줄 누가 알았겠나?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여러 번 확인했을 정도야. 자네랑 동명이인인, 다른 장교의 얘기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네 얘기가 맞더군. 정말 대단한 활약이야."

"아......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럼 날 칭찬하러 부른 건가? 이렇게 커피나 마시면서 느긋하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겨우 덕담이나 나누자고 불렀다기엔 분위기가 조금 미묘했다.

 

뭐랄까, 아직 가장 중요한 얘기는 하지 않은 느낌이랄까.

 

브랜슨 중령의 눈치를 살폈지만, 중령은 태연한 얼굴로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그렇잖아도 자네 중대원들도 자네가 몰라보게 변했다고 입을 모아 말하더군. 이전에는 숨을 쉬듯 사고를 치고 다녀서 아주 꼴도 보기 싫었다던데, 사람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나? 나보다 더 놀라워하더군."

"과찬이십니다."

 

음...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이것도 칭찬이겠지?

 

그래, 칭찬으로 받아들이자.

 

아무튼 내가 모르는 사이 모종의 조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게이츠 상사도 나에 대해 비슷한 평가를 내렸던 것일까?

 

"그리고 자네 활약상을 들은 높으신 분들께서 자네를 꼭 만나고 싶어 하시네."

"예?"

 

뜻밖의 말에 놀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브랜슨 중령은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긴, 놀랄 만도 하겠지. 일개 소위를 높은 양반들이 만나고 싶어 한다니까.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라네. 그래서 한 며칠 동안은 그분들을 만나러 런던으로 가게 될 걸세. 이것도 일종의 업무니까, 가서 잘하도록. 내일 아침 일찍 자네를 데리러 사람이 올 거야."

 

......이거 현실 맞지?

응, 맞네.

 

"대, 대대장님. 죄송하지만 질문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뭐든지 물어보게."

"높으신 분들이라면 대충 누구신지......?"

 

브랜슨 중령은 악마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잖아도 조마조마한 내 심장을 터뜨려버렸다.

 

"그래. 자네는 알고 있어야겠지. 어디 가서 말하지 말게. 총리가 자네를 보고 싶어 한다네.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을 거야."

 

자, 잠깐 누구라고요?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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