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4화
14화 됭케르크 철수작전 (1)
5월 24일, 우리는 그 유명한 됭케르크 해안에 도착했다.
영화 <덩케르크>를 영화관에서 본 적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 내가 그 현장에 있다니.
이래서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는 건가.
영화로도 제작된 그 역사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에 전율이 일면서도 한편으론 왜 굳이 내가 이곳에 있는 거지, 하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와보고 싶은 곳이긴 했지만, 총알이 날아다니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생각은 1도 없었는데 말이야.
됭케르크 해안은 까놓고 말해서 개판 5분 전이었다.
언젠가 올 배를 기다리며 무작정 줄을 서 있는 병사들의 뒤에는 사기도 잃고 군기도 빠진 병사들 수백, 수천 명이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독일군이 보면 군침을 질질 흘릴 각종 차량과 화포, 탄약상자가 해변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여기가 해변인지, 쓰레기장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모래사장에 누워서 태연하게 일광욕을 즐기거나 카드를 치는 병사들도 있었다. 민가에서 구한 술을 마시며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이들도 많았다.
혼돈과 평화, 질서와 무질서로 혼합된 이곳에서 우리는 이틀을 기다렸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자 중대원들은 눈에 띄게 실망했다. 그리고 불안에 떨었다.
"뭐야, 왜 배가 한 척도 없는 거야?"
"배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었어?"
"독일군이 언제 이곳에도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제정신이냐?"
비단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역전의 용사인 게이츠 상사조차도 해안가에 배가 없다는 사실에 극도의 실망과 불안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미래를 아는 나는 앞으로 이틀 뒤면 영국 본토에서 온 배들로 됭케르크 해안이 붐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놈들아. 곧 영국으로 우릴 구하러 배들이 올 거야. 그때까지 일광욕이나 즐겨. 백날 걱정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소대장님은 걱정 안 되십니까?"
애덤의 물음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응. 전~혀!
물론 가오 떨어지니 이렇게 말하진 않고, 최대한 근엄한 척을 하며 대답했다.
슬슬 품위란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나도 걱정되지. 하지만!"
"하지만?"
"명색이 장교가 겁에 질려 벌벌 떨기라도 해봐라. 병사들이 어떻게 보겠냐? 그러니 아무리 무서워도 무서운 티를 내지 말아야지. 그게 바로 장교야! 알겠냐?"
그러자 애덤은 감동한 얼굴을 했다.
하여간, 단순해서 속이기 쉬운 녀석이라니까.
그래도 의심 한번 없이 내 말을 철석같이 믿는 모습을 보니 정감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소위님이 생각하시기엔 정말로 배들이 올 것 같습니까?"
이번엔 게이츠 상사였다.
목소리와 말투에서부터 걱정과 불신이 느껴진다.
하지만 미래를 아는 내 입장에선 공연한 걱정일 뿐이다.
"네. 그러니 걱정 놓으세요, 상사. 우리나라는 자국의 군인들을 버리는 나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예,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의외로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게이츠 상사는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젓더니 구석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들을 영국으로 데려다줄 배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
"다행히 독일군은 현재 진격을 멈춘 상태요."
입에 두툼한 시가를 문 처칠은 독한 시가 연기를 뿜어내며 말을 이어갔다.
"현재 포위망 안에 갇힌 총병력의 수는 동맹군인 프랑스, 벨기에군 병력까지 모두 합쳐서 자그마치 34만이나 되오.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이 병력을 최대한 많이 구출해서 무사히 영국 본토로 수송하는 거요."
처칠은 입에 문 시가를 잠시 내려놓곤 지휘봉으로 됭케르크라 표시된 지도의 붉은색 점을 가리켰다.
붉은색 점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이 그려져 있었고, 원 안에는 파란색 말판이 몰려있었다.
원 바깥에는 독일군을 상징하는 검은 말판들이 원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많은 인원을 모두 수송하기엔, 배가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지."
처칠의 고민거리는 바로 배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됭케르크 포위망에 갇힌 아군의 구출을 위해 해군이 가진 배란 배는 모두 총동원했지만, 그것만으론 역부족이었다.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보다 더 많은 배가 필요했다.
"무슨 방법이 없겠소이까?"
처칠의 시선은 자연스레 도버 해협의 경비를 책임지는 해군 중장 버트럼 램지 제독에게로 향했다.
해결책을 묻는 처칠의 눈빛에 램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본토로 대피한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해군에게도 작전에 참여해줄 걸 요청했습니다, 총리 각하."
"반응은 어떻소?"
"모두 다 흔쾌히 작전에 참여하겠다고 전해왔습니다."
참석자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처칠은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그건 다행인 일이지만, 그래도 배가 부족하진 않겠소? 인원이 얼마나 되는데."
램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해군이 가진 배를 총동원한다고 해도 34만이나 되는 병력을 모두 실어 나르기엔 절대적으로 무리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램지는 처칠의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할 말이 있다는 걸 감지한 처칠은 눈을 끔뻑거렸다. 말해보란 의미였다.
"필요한 수량을 맞추려면, 부득이하게 민간 소유의 선박들을 징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램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당 부문의 관료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잠깐, 제독님. 그건 무리입니다. 아무리 사안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민간인들 소유 선박까지 무차별적으로 징발하는 것은 좀......."
"반발이 엄청날 겁니다."
그러나 램지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도 이런 결정은 내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단 말입니다!"
"그만, 그만! 두 의견 다 자~알 들었으니 그만들 하시오!"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려는 기색이 느껴지자 처칠이 끼어들었다.
그는 다시 시가를 한 모금 음미한 뒤, 미리 준비해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래, 천하의 대영제국 정부가 배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분명 안 될 일이지."
강제로 자기 배를 빼앗긴 민간인들의 격렬한 항의를 우려하던 관료들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하지만 이어진 처칠의 말은 안심하던 그들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려갈겼다.
"하지만 어떡하겠소? 배가 부족해서, 까딱 잘못하면 대영제국의 아들들이 그대로 물고기밥이 될 처지인데. 안 그렇소?"
"그렇습니다."
"그러니 당장은 해군 소유의 배를 전부 구출 작전에 투입하고, 동시에 민간인들에게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도록. 시기가 시기인 만큼, 투덜거리는 사람 한두 명쯤은 나와도 결국엔 이해해줄 거요. 이게 다 나라를 위한 알이니까."
"알겠습니다, 총리 각하."
램지는 겉으로 무뚝뚝한 척 연기했지만,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이로써 포위망에 갇힌 연합군 34만 명에겐 살길이 열린 셈이었다.
***
하늘에서 우렁찬 굉음이 들려오자,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병사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피해, 피해!"
"온다!"
이윽고 쾅 소리와 함께 해변에 연기구름이 피어올랐다. 시커먼 재와 모래, 자잘한 파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하물에 맞아 뇌진탕에 걸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 나는 버려져 있던 브로디 철모를 머리에 쓰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파편들이 철모에 맞을 때마다 귓가에 탕탕 소리가 났다.
크기가 5mm도 되지 않는 것들이라 충격은 별로 없었다.
됭케르크 해변에 포위된 아군은 뚱뚱보 괴링의 공군에게 날마다 얻어터지고 있었다.
해변에 있는 대공포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수량이 부족해서, 독일기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그럴 때마다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제엔장! 또 온다!"
"야, 피해!"
"살려줘!"
방금 폭탄을 투하한 슈투카가 기수를 돌려 다시 날아오는 걸 본 병사들은 또다시 살기 위해 뛰었다.
나 역시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었다.
사이렌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쾅.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중심을 잃은 몸이 뒤로 넘어지면서 엉덩이가 지면에 닿았다.
고운 모래사장이라 그렇게 아프진 않았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천만다행히도 이번에도 폭탄이 저 먼 곳에 떨어졌다.
임무를 마친 슈투카는 다시 기수를 돌려 동쪽으로 날아갔다.
"이 개새끼!"
슈투카에게 농락당한 병사들이 울분에 차 주먹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슈투카는 이미 작은 점이 되어 날아가는 중이었다.
공습이 끝나고, 주변에 다시 잠잠해지자 나는 흩어졌던 중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다행히 모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냐?"
모두 멀뚱멀뚱 서서 옆 사람 얼굴을 쳐다보는 것을 보니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인원수에도 이상은 없었다.
"좋아, 해산. 모두 멀리 가지 말고 이 주변에 모여 있도록."
철모를 벗어 안에 들어간 모래 알갱이들을 털어내는데, 게이츠 상사가 다가왔다.
고개를 든 나는 그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턱에 수염이 수북한 게 전래동화에 단골로 나오는 산적처럼 보였다.
"오랫동안 면도를 하지 못했더니, 가려워서 미칠 노릇입니다, 허허."
"하하하...... 하긴 대검으론 깔끔하게 면도를 할 수 없으니 말이죠."
멋쩍게 웃던 게이츠 상사는 곧 정색하며 물었다.
"그나저나 소위님.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 우린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까요?"
됭케르크 해변을 밟은 지도 벌써 3일이 지났고, 곧 4일이 되기 직전이었다.
배가 오긴 왔지만, 수가 적어 극소수의 병사들만 탈 수 있었다.
지금도 배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을 열심히 실어 나르는 중이었지만, 수가 터무니없이 적어 대다수 병사가 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중이었다.
게다가 식량이 없어서 장교부터 이등병까지 모두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심지어 마실 물조차 부족해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상황이었다.
굶주림과 갈증으로 모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게이츠 상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며칠 사이에 그는 기골이 장대한 사나이에서 평범한 중년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과 쑥 들어간 두 눈은 그가 어떤 고생을 겪고 있는지 말없이 보여주었다.
물론 미래를 알고 있는 나도 괴로웠다.
"조금만 참으세요, 상사.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도 곧 배에 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우리 차례가 오려면 족히 한 달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게이츠 상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 말대로, 지금처럼 배가 조금씩 온다면 여기에 있는 모든 병사가 배를 타려면 족히 반년은 더 걸린다.
나는 그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안다.
배에 타지도 못하고 독일군의 포로가 되거나, 그대로 굶어 죽는 것.
그게 가장 두려운 거겠지.
"차라리 싸우다가 죽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산 송장처럼 멀뚱멀뚱하게 지낼 게 아니라......."
"아, 저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수평선을 가리켰다.
말이 잘린 게이츠 상사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소위님, 왜 그러십니까?"
"저길 봐요, 상사!"
때마침 사방에서 환호성을 터져 나왔다.
영문을 모르던 게이츠 상사도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병사들과 함께 환성을 질렀다.
다 죽어가던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소리였다.
수평선 너머로 수없이 많은 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