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2화
12화 돌아온 탕아
1시간하고 20분 뒤, 아군 전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한 우리는 곧 놀라운 시선으로 우릴 쳐다보는 수십 명의 병사에게 둘러싸였다.
그도 그럴 게, 난데없이 독일군의 트럭을 타고 나타난 데다가 독일군 포로들까지 데리고 왔으니. 그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난데없는 소란에 짜증을 내며 지휘 텐트 밖으로 나온 한 소령은 우릴 보곤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경례한 뒤, 관등성명과 소속 부대, 이제까지의 일들을 설명했다.
"......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소령님."
내 말을 들은 소령은 그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이거였다.
"......그 말이 사실인가, 소위?"
"그렇습니다, 소령님!"
소령은 내가 한 얘기를 도저히 믿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혼자서 전차 1대로 독일군을 쓸어버리고, 포로가 된 아군 병력을 구출한 것도 모자라 노획한 트럭을 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나 같아도 증거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믿지 못하겠구만.
하지만 내가 한 얘기는 모두 사실이었고, 더군다나 증거품까지 눈앞에 있었다.
독일군의 상징인 철십자 마크가 그려진 오펠 블리츠(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트럭) 3대와 독일군 포로들까지.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맞습니다, 소령님. 아서 그레이 소위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저와 제 부하들이 증인입니다."
함께 한 대위도 내 편을 들어주었다.
소령은 포로들과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내가 구출한-병사들, 그리고 나와 대위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일단은 알겠네. 상부에 보고한 뒤,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겠네. 그동안 푹 쉬고 있도록."
"감사합니다, 소령님!"
그러나 푹 쉬고 있으라는 소령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독일군이 근처까지 진격해오는 바람에 급히 진지를 옮겨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소령은 내 소속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다.
내가 속한 제7전차연대는 어제 있었던 아라스 전차전에서 박살이 난 후, 남은 병력을 이끌고 퇴각 중이었다.
물론 비단 제7전차연대만이 아니라 영국 원정군 전체가 퇴각 중이었다.
아라스 전차전 이후로 전황은 독일군 쪽으로 빠르게 기울고 있었다.
"원대까지 이걸 타고 가면 된다네. 그럼, 행운을 빌지."
"감사합니다, 소령님!"
소령의 배려로 나와 애덤은 원대까지 사이드카가 달린 오토바이 2대를 나눠타고 갈 수 있었다.
트럭은 모두 물자와 부상병들을 태우는 데 써야 해서 내줄 수 없다며 소령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우린 원대까지 걷지 않고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오토바이는 한 번쯤 타보고 싶었다. 헤헤.
도로는 퇴각하는 군 병력과 피난을 가는 프랑스인들로 가득했다.
피난민들의 행렬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만 갔다.
차를 타고 가는 피난민들은 극소수였고, 대다수가 마차를 타거나 걸어서 피난 중이었다.
남자들은 짐이 실린 수레를 끌었고, 여자들은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 힘없이 걸었다. 아기를 등에 없고, 유모차에 생필품을 실은 여자들도 있었다.
울어대는 아이들을 달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피난민들의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6.25 전쟁 당시 우리나라 국민도 저랬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 내 코가 석 자였던 탓에 저들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내겐 더욱 씁쓸하게 다가왔다.
"끝이 안 보이는구만."
"무엇이 말입니까?"
혼잣말이었는데 소리가 컸는지 들은 모양이다.
오토바이병은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내게 물었다.
"저 피난민 행렬 말이야. 끝이 안 보인다고."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독일놈들이 몰려오고 있다는데. 살고 싶으면 튀어야죠, 뭘."
다시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5분 뒤 이번엔 그 오토바이병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소위님. 외람되지만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그래?"
"저희는 어디까지 후퇴하게 되는 겁니까?"
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개 병사들은 지금 아군이 어디까지 후퇴하는지 모르겠지만, 미래의 기억을 가진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지금 말해줘도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아무려면 어떠나 싶기도 했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 떨어진 것 자체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미래 지식 하나 흘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아마도 됭케르크가 될 것 같군."
"예? 됭......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됭케르크. 프랑스 해변가 이름이야. 그곳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아니, 그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단 말입니까?"
그는 우리가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는 말을 믿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래. 저 피난민들을 보면 모르겠냐? 우린 졌어. 적어도 지금만큼은 말이야."
"그럼, 영국으로 돌아간 후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쩌긴. 다시 재정비해서 돌아오게 되겠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적어도 지금 수상은 히틀러가 죽기 전까지 전쟁을 계속할 양반이니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십니까?"
아차, 나도 모르게 너무 많이 떠든 모양이다.
이쯤 해서 슬슬 입조심을 할 필요가 있었다.
입이 가벼워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그냥 흘려듣게. 절반은 내 망상이니까."
"망상치곤 무척 확신에 차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흘려들으라고...... 어?"
얘기를 적당히 돌리며 하늘을 보고 있던 내 시야에 이상한 게 포착됐다.
한 무리의 까만 점들.
처음엔 새인 줄 알고 그냥 넘기려고 했지만, 어째 새치곤 좀 큰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점들은 몸집을 불려가며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새들이 원래 저렇게 빨랐나?
그리고 반짝이기까지 하네?
"적기다!"
"예?"
"적기라고, X발! 우측으로 돌아! 튀어!"
이런 X발, 적기다! 공습이라고!
급하게 도로에서 벗어나 오토바이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이렇게 맑은 날씨에 웬일로 하늘이 잠잠하다 했는데, 역시나였다.
독일군, 그것도 전과에 목말라 하는 공군이 이런 날씨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까만 점들이 순식간에 Bf109로 변신해 지상을 향해 선회한다.
곧 우왕좌왕하며 흩어지는 피난민들과 패잔병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부어댔다.
비명과 고함,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적기의 엔진음과 총성에 파묻혔다.
저 잔인한 놈들은 다시 기수를 돌려 재차 공격을 가하기 위해 날아왔다.
퇴각하는 병사 중 극소수가 소총으로나마 대공사격을 가했지만, 저 강철 새들을 떨어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독일군 조종사들은 총알 몇 발을 가볍게 무시하곤 그대로 기관총탄을 퍼부어댔다.
피어나는 흙먼지 속에 핏방울이 섞여 있었다.
사냥을 끝낸 적기들은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자신들이 날아왔던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엔진소리가 서서히 사그라들자, 나는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적기는 어느새 티끌보다 작은 점으로 변모했다.
"어이, 괜찮냐?"
"예, 괜찮은 것 같습니다, 소위님."
다행히 오토바이병은 무사했다.
뒤따르던 애덤은?
"애덤! 살아있냐?"
"예, 소대장님!"
다행히 애덤 녀석도 살아있었다. 녀석의 오토바이병도.
제때 방향을 바꾼 덕분에 우리는 적기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로에 가득했던 피난민들과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단 한 번의 공습만으로 피난 행렬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도로는 총알에 맞아 숨이 끊어진 사람들과 곧 숨이 끊어질 사람들. 살아남았지만, 가족과 동료를 잃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절망 섞인 비명과 절규, 힘없는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당장 내 눈에도 피투성이가 된 유모차를 끌어안으며 오열하는 여자가 보였다.
그 광경을 계속 두고 볼 용기는 내게 없었다.
넋을 놓고 그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오토바이병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만 가지. 어차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소위님."
지금은 그저 다음을 위해 계속 움직여야 했다.
***
30분을 더 달려 원대에 도착했다.
나와 애덤을 원대까지 태워다 준 2명의 오토바이병은 우리가 사이드카에서 내리자마자 자기네 소속 부대로 돌아가 버렸다.
자식들, 갈 땐 가더라도 감사 인사는 받고 가지.
아무튼 원대에 도착했으니, 서둘러 생존 및 복귀 신고를 해야 한다.
지나가던 병사를 잡고 1대대 본부는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상병치곤 나이가 많아 보이던 그 병사는 내 질문에 귀찮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1대대 말입니까? 저쪽으로 가보십쇼."
군기를 중요시하는 장교라면 상병의 다소 무례한 태도에 화를 냈겠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빨리 소속 부대에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고맙네. 애덤, 들었지? 가자."
1대대는 철수 준비가 한창이었다.
원래 이곳에 오래 머물 예정이 아니었으니,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어느 중사로부터 1중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가르쳐준 곳으로 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틀림없는 1중대 인원들이었다.
때마침 구석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게이츠 상사도 보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게이츠 상사!"
자신의 이름이 불린 그는 고개를 뒤로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소위님? 아니, 어떻게 여기에......."
"전투 중에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방금 복귀했죠. 중대장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중대장님은 안 계십니다."
"엥?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전사하셨습니다. 지금 이 인원들이 1중대의 전부입니다."
게이츠 상사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1중대 병사들은 다 합해도 수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상상 이하의 숫자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패전할지 미리 알고 있어서 어느 정도 피해야 예상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럴 수가...... 그럼, 중대의 지휘는 누가 맡고 있습니까?"
"지금까지는 저였습니다만, 이제부턴 소위님께서 맡으셔야 합니다. 중대의 유일한 장교시니까요."
"허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원대로 복귀하자마자 임시 중대장직이라는 대형 폭탄을 떠안게 된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감출 수 없었다.
게이츠 상사와 나머지 병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던 것처럼.
아니, 나라고 좋아서 하고 싶은 거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