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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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10화
10화 아라스 전차전 (3)
"저어, 소대장님? 들리십니까?"
"왜."
"죄송한데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해."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집으로 가는 중이지, 몰라서 묻냐?"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지금.
우리는 아직도 숲을 헤매는 중이다.
***
전투가 끝나고, 포성이 잠잠해질 때까지 숲에서 대기하던 나는 다시 무전기를 켜서 아군과 교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전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작동이 되질 않았다. 지지직 거리는 소음만 들릴 뿐, 어떤 응답도 없었다.
"야, 이거 갑자기 왜 이래?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잘만 작동하던 게 갑자기 왜 먹통이지?"
원인을 몰라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뒤늦게 전차에 달린 안테나 반으로 뚝 잘린 걸 발견했다. 보아하니 전투 도중 잘린 것이 분명했다.
안테나가 이런 상태니 무전기가 작동할 리가.
"아군이 있는 곳을 직접 찾는 수밖에 없나."
아군과의 교신이 불가능 하자 우리는 자력으로 본대와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나는 늘 가지고 다니지만,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지도를 펼쳐,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런 다음 아군이 어느 위치에 있을지 가늠해봤다.
몇 시간 전까지 우린 아라스에서 전투를 벌였다.
거기서 내가 왼쪽으로 움직였고, 한동안 쭉 직진만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이곳은 대략 이쯤 되겠군.
아라스에서의 반격이 실패했으니, 아군은 지금쯤 원래 위치에서 보다 더 서쪽으로 퇴각을 했을 거다.
따라서 우린 이제 서쪽으로 가야 한다.
정확히는 남서쪽이 되겠군.
북쪽과 동쪽은 독일군 천지니까.
내 짐작이 맞다면, 아군 전선까지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지금처럼만 쭉 간다면, 그리고 운이 좋다면 2, 3시간 안에 닿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랬는데.......
"소대장님, 정말로 이 길이 맞습니까?"
"맞다니까 그러네. 너는 평생 속고만 살았냐?"
"그건 아니지만......."
"그럼 운전이나 해. 이 길이 틀림없으니까."
애덤은 내가 영 못 미더운 모양인지(이해는 한다만) 계속해서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제대로 된 길이 맞는지 자꾸만 물어봤다.
마음 같아선 내 결정에 토를 다는 거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사실 나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다, 분명 지도상으론 지금쯤 갈림길이 나와야 하는데.......
불안해진 나는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지금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확인했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도상으론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늠해봤을 때도 제대로 남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근데 대체 갈림길은 언제 나타나는 거야?
혹시 지도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거라면.......
그런 생각이 들자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최악의 경우, 이대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독일군과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독일군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고.
그때, 해치를 열고 조종하던 애덤이 뭔가를 발견하곤 나를 불렀다.
"소대장님, 갈림길입니다!"
"응? 뭐, 진짜?"
천만다행히도, 지도는 정확했다. 그리고 내 판단을 틀리지 않았다.
우린 올바른 길로 오고 있었다.
"이제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됩니까?"
"잠깐만...... 오른쪽, 오른쪽 길로 가면 돼."
아직 아군 전선에 도달하려면은 조금 더 가야만 했지만, 올바른 길을 찾았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그러나, 불행의 신은 아직 나에 대해 관심을 거둔 게 아니었다.
10여 분 뒤, 애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소대장님?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인데?"
"그...... 기름이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뭐라고?"
이런 망할.
길에 신경 쓴 나머지 기름을 잊고 있었다.
올바른 길을 가고 있어도 기름이 없으면 전차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름 떨어진 전차는 그냥 고철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얼마나 남았는데?"
"이대로면 40~50분 후엔 바닥날 것 같습니다. 어떡합니까?"
후, 이제야 일이 좀 풀리는가 했더니 이젠 기름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기름이 다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전차를 버리고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아니, 잠깐. 그게 더 나을지 모르잖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차라리 그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전차는 크기도 크고 소음 때문에 적들에게 들킬 위험이 있었다. 토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는 덤이었고.
하지만 나름대로 정이 든 이놈을 헌신짝처럼 버리기에도 조금은 꺼림찍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전차를 버리고 걸어왔다고 말하면 어떤 문책을 받을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오랜 고민 끝에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냈다.
전차도 버리지 않고, 기름이 다 떨어지기 전에 아군 전선에 도착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우측으로 틀어. 그대로 쭉 가!"
"어? 이 길이 맞습니까?"
"그래. 이 길이 맞으니까 안심해. 우린 지금 지름길로 가는 거야."
기름이 부족하면, 지름길로 가면 되지!
사실 지도에는 총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이제까지 가던 길이 정석이었고, 지금 가는 길이 지름길이었다.
사실 지름길로 가도 기름이 다 떨어지기 전에 아군 전선에 당도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단축된다는 것은 확실했다.
물론 이 길에도 단점은 있었다.
길이 구불구불하고 험한 데다가, 독일군 전선과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어 아군이 아직 점령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뭐, 그래도 여태까지 독일군은 콧빼기도 보이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은 독일군이 근처에 없는 건 거의 확실했다.
있다면, 진즉에 나타났겠지. 안 그런가?
***
"후... X 같은 인생."
제임스 파커 일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는 2시간째 쉬지 못하고 걷고 있었다.
발바닥은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고, 흘러내린 땀 때문에 옷은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끔찍한 기분이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절실한 건 따뜻한 물로 하는 샤워와 안락의자였다.
그러나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 그런 '사치'가 허용될 리 없다.
하물며 포로들에겐 더더욱.
버밍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제임스는 어려서부터 폭력적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9평 남짓한 작은 집에서 살면서 그는 학교 수업을 자주 땡땡이치고 친구들과 함께 놀거나 좀도둑질을 했다.
그는 훔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훔쳤다.
빨랫줄에 널린 빨랫감부터, 과일가게 가판대에 내놓은 사과, 행인의 지갑, 부유한 동네에 사는 누군가의 자전거까지.
당연하지만, 그는 머리에 피가 마르기 전부터 경찰서 유치장을 제집마냥 들락날락하게 되었다.
제임스의 부모는 애초에 자식에게 아무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라 자식이 유치장에 가던, 재판을 받던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의 무관심 속에 결국, 이제까지의 범죄 전적들이 문제가 되어 제임스는 17살에 상습 절도로 2년 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갔다.
감옥에 나왔을 때, 그는 겨우 19살이었다.
이제 막 출소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푼돈과 부모님이 알코올 중독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적힌 짤막한 편지, 입고 있던 낡은 가죽 재킷이 전부였다.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떠돌던 그에게 식사와 숙소가 제공되는 군대는 제법 매력적인 직장이었다.
때마침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것도 그의 '취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군은 보다 많은 젊은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비록 전과자지만 체력에는 문제가 없었던 제임스도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달간의 훈련이 끝난 후, 그는 영국 원정군에 소속되어 프랑스 전선으로 보내졌다.
처음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훈련도 별로 없었고, 일주일에 한 번 외출도 허가되었다.
그는 동기들과 함께 외출을 나가 부대 근처의 작은 선술집에서 와인과 거위 통구이 요리를 시켜 먹으며 삶의 작은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독일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좋았던 시절도 끝을 맞이했다.
제임스가 소속된 보병 중대는 프랑스군과 협력하여 독일군 전차부대의 진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들이 전선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군은 그곳에 없었다.
독일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군에겐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죄다 도망친 것이다.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진 제임스의 중대는 참호를 파던 도중 독일군 기갑부대의 기습을 받았다,
중대장을 포함해 중대원 대다수가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히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다.
"젠장,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로 신세라니. 대영제국의 군인 체면이 말이 아니군."
제임스는 투덜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포함한 모두가 앞선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중이었다.
포로들의 대열 앞에는 부상자들과 노획한 무기들을 실은 독일군의 트럭 3대가 느릿느릿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야, 제임스. 이제 우린 어디로 가게 될 것 같냐?"
동기인 피터 메르클린이 말을 걸었다.
그도 제임스처럼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해 군 입대를 택한 젊은이들 중 한 명이었다.
"글쎄다. 아무래도 독일이겠지?"
"쳇, 독일은 싫은데. 여자들도 못생기고, 날씨도 우중충한 곳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암담하구만."
피터의 실없는 농담에 제임스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옆에서 포로들을 감시하던 독일군이 서투른 영어로 그들을 야단쳤다.
"거기, 너희 둘! 떠들지 마!"
"쳇!"
둘은 다시 입을 닫고 묵묵히 걸었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제임스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대로 포로수용소에 갇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갇혀 있을 생각을 하니 앞날이 캄캄해졌다.
물론 전쟁터에서 죽는 것보다 포로수용소에서 얌전히 지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영국에서 교도소 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제임스는 차라리 전쟁터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가축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갇혀 있는 신세가 되는 것보단 전쟁터에서 총알을 피해 다니는 게 그에겐 훨씬 나았다.
"에휴, 내 팔자야....... 이럴 줄 알았다면, 해군에 지원할 걸 그랬나?"
"수영도 못하는 녀석이 해군은 무슨."
"거기, 조용히 하라고 했......."
다시 독일군이 한소리 하려는 차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트럭 엔진 소리와는 사뭇 다른 소리였다.
포로들은 물론, 독일군도 걸음을 멈추었다.
한편 소리는 점점 커졌다.
제임스는 지금 들리는 소리가 무한궤도 구르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무한궤도 소리가 확실했다.
"이봐, 저기!"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피터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제임스의 눈도, 그들을 감시하던 독일군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바로.......
***
"애덤, 기름이 이제 얼마나 남았냐?"
"20분 뒤엔 엔진이 꺼질 것 같습니다."
"그래? 20분 뒤면 이놈과도 작별이구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20분밖에 없었다.
아직까진 다행스럽게도 길은 지도에 표시된 대로 이어졌다.
기름이 다 떨어지기 전에 아군 전선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도를 쳐다보는데, 애덤이 갑자기 전차를 멈춰 세우는 것이 아닌가.
"야, 애덤! 왜 멈추냐? 아직 멈추라고 말 안 했는데."
"소, 소대장님! 앞을 좀 보십쇼!"
"앞?"
애덤의 말대로 앞을 본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트럭 3대와 줄지어 늘어선 병사들이 우릴 멍하니 서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군인가?
나는 나를 응시하는 병사들 중 일부가 영국군 특유의 납작한 브로디 철모를 쓰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병사들은 다른 철모를 쓰고 있었다.
네모나게 각이 진, 투박하게 생긴 철모.
저걸 쓰고 있다는 것은 분명.......
"독일군이잖아!"
기어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