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화
무료소설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영제국의 폐급장교 4화
4화 폭풍전야 (2)
게이츠 상사는 요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의 출처는 당연하게도 아서 그레이 소위였다.
그레이 소위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이 중대에 전해졌을 때, 그는 중대장 해리슨 대위와 체스를 두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탄식했다.
아, X발. X 됐군.
신도 참 무심하시지.
하필이면 그런 놈을 살려두시다니.
그레이 소위의 악명은 옆 대대조차 알 정도로 유명했다.
해리슨 대위와 게이츠 상사는 늘 이번에는 어떤 사고가 터질지 전전긍긍하며 지내야 했고, 그레이 소위가 사고를 칠 때마다 욕은 그들이 먹었다.
정작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장본인은 반성은커녕 미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집안만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모가지 당했을 인간이.
애초에 장교만 아니었더라면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고도 남았다.
게이츠 상사는 오래전, 사관후보생이 되지 않겠냐는 연대장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때 그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지금쯤 그는 중위나 대위 계급을 달고 있었을 것이고, 그레이 소위를 마음껏 두들겨 팰 수 있었을 것이다.
징계는 피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상관 폭행'은 아닌 데다가 그레이 소위가 저질러 놓은 일이 워낙 많으니 기껏해야 감봉이나 근신 정도로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후회한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레이 소위가 부대로 복귀한 뒤부터 게이츠 상사의 주 업무는 그레이 소위의 감시로 고정되었다.
이는 해리슨 대위가 직접 명령한 것으로, 사고를 저지를 기미가 보이면 그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지하라는 의도였다.
"저항한다면 무력을 사용해도 좋네. 아니, 제발 그래 주게.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네. 어차피 진급은 포기했으니, 이제 내 관심사는 저놈을 어떻게 조지느냐는 것뿐이야."
해리슨 대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게이츠 상사는 이후 눈에 불을 켜고 그레이 소위를 감시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사고를 저지르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양아치가 중대원 모두의 얼굴에 먹칠하는 걸 막아야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쩐지 그레이 소위는 게이츠 상사가 기억하는 평상시의 모습과는 달랐다.
장교식당이 어디인지 깜빡한다던가, 멍 때리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던가, 병사들이 자신에게 경례를 대충 한다고 투덜거리던 인간이 경례를 대충 해도 그냥 넘어간다던가.......
사고의 휴유증 때문인 건가.
아니면 해리슨 대위에게 아주 박살이 나고 몸을 사리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닐 거야.......'
갖가지 사고를 저지르고 뻔뻔하게 굴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바뀐다고?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물며 그레이 소위 같은 인간말종은 더더욱 바뀌지 않는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게이츠 상사가 인생을 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레이 소위에게 큰 변화가 있던 건 확실했다.
이제쯤 한 번 사고가 나거나 조짐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는데 너무나도 조용하다.
특히 요즘에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돌아다녔다.
한 번은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감싸안고 혼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혹시나 사고를 쳐나 싶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가까이 다가가자 알 수 없는 말들이 귀에 닿았다.
낫질 작전...... 만슈타인, 바게트 놈들, 됭케르크...... 이게 다 무슨 말들이지?
서로 연관성도 없고, 처음 듣는 단어들의 나열이다.
저 인간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미치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하기에는 병영 생활이나 훈련에도 성실하게 임하고 있었고.......
'판단하기 어렵군.......'
게이츠 상사의 의문증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저녁이 되자, 그는 중대장실로 향했다.
이제까지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문을 두들기자 해리슨 대위의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접니다, 중대장님."
"아,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반기는 해리슨 대위가 보였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한참 동안 씨름하다가 이제 겨우 끝이 난 모양이다.
"그래. 그놈은 좀 어때? 뭔가 수상한 기색은 없던가?"
"예, 중대장님. 일단은 잠잠합니다만, 뭔가 이상합니다."
게이츠 상사의 말에 해리슨 대위는 미간을 좁혔다.
담뱃갑에서 새 담배를 뽑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이상하다니, 또 무슨 사고를 치려던 것처럼 보이던가?"
"그런 것 같진 않았습니다만....... 뭐랄까, 아예 사람이 변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이 변했다고?"
"예.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본성을 숨기고 연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사고 후유증을 앓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평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흐음,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
신음을 뱉는 그에게 게이츠 상사는 그간 자신이 관찰해온 그레이 소위의 모습들에 관해 설명했다.
물론 소위의 이상한 혼잣말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자신에게 있어 알지 못할 단어의 나열이라 할지라도 좀 더 경험이 있는 해리슨 대위라면 뭔가 알 수도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해리슨 대위는 부하가 하는 얘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게이츠 상사가 얘기하는 동안,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제가 보고 들은 전부입니다. 앞으론 어떻게 할까요?"
"으으음......."
해리슨 대위는 좀처럼 답을 하지 못했다.
직접 보고 들은 게이츠 상사도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사안이었다. 그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되는 눈치였다.
섣불리 결정했다간 더 큰 사고가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부하를 계속 의심할 순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뭐라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군. 자네 말대로 사고 휴유증일 수도 있고, 당분간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일 수도 있겠어. 일단은 한동안 지켜보자고. 자네한텐 수고스러운 일이지만, 부탁 좀 하겠네."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결국 애매한 유보 결정이 떨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게이츠 상사는 여전히 찜찜한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
X됐다, X됐다, X됐다!
숨을 쉬기만 해도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수명이 1분씩 줄어드는 기분이다.
오늘은 1940년 5월 9일.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5월 9일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4시간 남았다.
차라리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이토록 귀에 거슬린 적은 처음이다.
내일 본격적인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된다. 일명 낫질 작전의 개시다.
독일의 예상된 침공에 연합군은 즉시 벨기에로 향한다.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휩쓸어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라며 기고만장해한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역사를 알면 잘 알다시피 그건 어디까지나 미끼다.
진짜 적은 아르덴 숲을 돌아 연합군의 후방을 치고, 이는 사상 유례가 없는 작전이 되어 프랑스는 겨우 6주 만에 독일에 떨어지고 만다.
당연히 연합군은 이로부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내가 소속된 영국군을 포함해서.
이변이 없는 한, 역사는 예정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 거대한 물줄기는 언젠가 나라는 존재도 휩쓸게 되겠지.
이런 위급한 시기에 아무것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서 재앙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니!
도축되기만을 기다리는 가축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러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미친 척하고 사령부로 달려가서 내일 독일군이 침공한다고 말해야 하나?'
나름 큰 결심이었지만, 금방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결론이 나왔다.
장교이긴 했지만 완전 밑바닥 짬찌에, 그것도 과거 벌인 사건 때문에 폐급 취급을 당하는 나다.
이야기를 듣고 자시고 정신병원이나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탈영해야 하나?
앞으로 일어날 전투에 휘말려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보다 탈영병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 건데?
그리고 재수 없이 헌병들에게 체포된다면?
전시에 탈영하면 충분히 사형감인데?
혹시라도 적군에게 잡히면 그것도 문제다.
그나마 독일군은 '열등한 슬라브'가 아닌 앵글로색슨족인 영국군 포로들을 비교적 잘 대우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한다.
먹을 것이라곤 희멀건 양배추 수프와 흑빵이 전부에, 유흥거리라곤 아무것도 없는 포로수용소에서 자그마치 5년을 보내라고? 돌았냐?
물론 전장에서 개죽음당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가능하다면 포로 신세는 피하고 싶다.
아......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 9시였다.
취침 소등까지 앞으로 1시간 남았다.
불안한 마음에 방을 서성이던 나는 책상 서랍 속에 있던 스카치 한 병을 꺼내 들었다.
과거 아서 그레이가 마시던 것인데, 아직 내용물이 조금 남아있었다.
술이 몸에 들어가면 당장은 불안감을 잊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 망설임 없이 스카치 뚜껑을 땄다.
달큰하면서도 비릿한 알코올 특유의 냄새가 코를 강타했다.
으음, 마셔본 술이라곤 소주와 맥주, 와인, 막걸리가 전부였던 내겐 무척 강렬한 향이 아닐 수 없다.
냄새만 맡아도 만만찮은 놈이란 것을 알겠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 이규태 아닌가.
부대 회식 때 행보관과 주량 대결까지 붙어본 적도 있다고(비록 졌지만).
올 테면 와보라지!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단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
"......."
그레이 소위의 방에 방문한 게이츠 상사는 어이가 없이 말문이 턱 막혔다.
점호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무 낌새가 없어서 들어갔더니, 맨바닥에 큰 대(大)자로 뻗어있다.
코까지 고는 걸 봐선 아주 깊게 잠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진한 알코올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마침 바닥에 드러누운 소위의 옆에는 텅 빈 스카치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것이...... 정말로 대영제국의 장교란 말인가?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이젠 어이가 없어서 한숨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간 조용하다 싶었는데 술에 취해 점호도 빠지고 발랑 누워 자빠지다니.
게이츠 상사는 그간 그레이 소위에게 품고 있던 의문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그럼 그렇지.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뀔 리가.
"혹시나 했던 내가 병신이지. 빌어먹을."
그래도 술주정 안 부리고 그냥 드러누워 자는 게 어딘가.
군기 위반으로 지적할 게 한둘이 아니지만, 근간 쳐온 사고에 비하면 이 정도는 조용히 넘어가 줄 수준이다.
게이츠 상사는 안도 반, 경멸 반의 한숨을 쉬며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레이 소위는 바닥에 그대로 둔 채로.
***
같은 시각.
독일과 벨기에 국경 근처엔 회녹색 도장을 한 트럭들이 전조등을 끈 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트럭마다 중무장한 병사들이 한가득 타고 있었다.
방향은 프랑스 쪽인 서남쪽.
1940년 5월 9일 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