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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전설 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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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신룡전설 124화

신룡전설 5권 - 24화

 

 

 

 

 

“아가씨께서는 혁련 공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니 이만 돌아가 주시오.”

 

광한파파의 말에 혁련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유가 무엇이오?”

 

광한파파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냉랭한 눈빛으로 혁련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혁련신은 여느 때완 다르게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대체 북궁 소저가 계속해서 날 외면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내게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오? 광한파파! 말을 해보시오. 광한파파라면 알고 있을 것 아니오? 내게 그 이유라도 속 시원하게 말을 해주시오!”

 

“나는 모르니 이만 돌아가 주시오.”

 

광한파파의 대답은 여전히 싸늘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혁련신의 얼굴에 미소가 생겨났다. 하지만… 비틀어졌다. 마치 지금의 상황이 더없이 우스워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보기 흉할 정도로 미소를 비틀었다.

 

“내가 그가 아니라서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거요?”

 

혁련신의 물음에 광한파파는 스치듯 아주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가씨께서는 현재 혁련 공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니 당장 돌아가 주시오!”

 

더 이상 귀찮게 했다가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협박성 어조로 경고하는 광한파파의 말에도 혁련신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경하게 자신의 뜻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당장 북궁 소저를 만나봐야겠으니, 광한파파는 비키시오! 비키지 않는다면 내 힘으로라도 뚫고 가야겠으니 괜한 싸움 하기 싫거든 비키도록 하시오!”

 

혁련신이 강제적으로 밀고 들어오자 광한파파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내려앉았다.

 

“아무리 혁련 공자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의 무례는 참을 수 없소!”

 

광한파파의 살기가 혁련신의 전신을 꽁꽁 묶었다.

 

광한파파는 왕무적에게 죽은 청안, 홍안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천혈원 소속의 고수이다. 그런 그녀가 무슨 이유로 북궁연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지 알 순 없지만, 그녀가 천혈원 소속의 고수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혁련신으로서는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혁련신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북궁 소저야말로 내게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니오! 내 비록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엄연히 삼 가문인 혁련가의 혁련신이오! 최소한 한 번쯤은 못 이기는 척 날 만나줘야 하는 것 아니오? 이는 나와 우리 혁련가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오?”

 

지금까지 자신의 배경을 들먹인 적이 없는 혁련신이다. 그런 그였기에 어쩌면 그가 장추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평가를 받아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장추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그의 자존심의 분노임을 모를 광한파파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도 벌써 수차례나, 아니 십여 차례나 혁련신의 방문을 거절한 북궁연이 다소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북궁연이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행동이 너무 심하다 하더라도 광한파파는 그녀의 의견을 따라줘야 했으며,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북궁연을 만나려는 혁련신을 막아야만 했다.

 

“긴말 하지 않겠소. 당장 돌아가시오.”

 

최후 경고라는 듯 광한파파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정말로 혁련신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밀고 들어오면 가차 없이 손을 쓸 태세였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혁련신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기에 설사 광한파파가 자신에게 손을 쓰더라도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해보시오.”

 

말과 함께 발을 내딛는 혁련신의 모습에 광한파파의 눈에서 노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빠른 속도로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았다.

 

광한파파의 빙염심장(氷染心掌)이었다. 결코 상대를 봐주지 않겠다는 듯 장력을 뿜어내는 손속은 매서웠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혁련신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손을 들어 장력을 마주했다.

 

펑!

 

“큭!”

 

단 일장!

 

비틀거리며 뒤로 다섯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난 혁련신은 분명히 광한파파의 상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장력이 마주치면서 장심으로 스며든 차디찬 한기는 혁련신을 떨게 만들었다.

 

‘광한파파……!’

 

혈천신교의 장로라 하더라도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수. 천혈원의 고수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되었다.

 

하지만!

 

‘죽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은 물러나지 않겠다!’

 

결심 그대로 죽더라도 오늘만큼은 반드시 북궁연을 만나겠다고 굳게 다짐한 혁련신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

 

광한파파의 눈에 살기가 더욱더 짙어졌다.

 

조금 전의 일장은 분명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일장이었다. 혁련신이 자신의 일장을 막았다는 것이 다소 놀랍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는 혁련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후계자였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일장은 막았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은 제아무리 혁련신이라고 하더라도 어림없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혁련신이 혈천신교 삼 가문인 혁련가의 후계자라고 하더라도 광한파파는 그가 고집을 부리는 이상 결코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엄연히 자신은 그에게 경고를 했고, 그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다. 이는 자신이 그를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런 자세한 것까지 다시 한 번 일일이 말을 할 만큼 광한파파는 너그럽지 않았다. 당장만 하더라도 혁련신이 다시 걸음을 내딛어 앞으로 다가오자 곧바로 장력을 또다시 펼친 것이다.

 

혁련신은 또다시 날아드는 광한파파의 장력에 이를 악 물며 쌍장을 내질렀다.

 

퍼엉!

 

“크윽!”

 

또다시 뒤로 세 발자국이나 밀려난 혁련신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광한파파, 끝까지 그리 나오겠다면 나 역시 더 이상은 물러나지 않겠소!”

 

그 말과 함께 혁련신은 손을 허리춤으로 움직였다. 장법으로 안 되니 자신도 더 이상은 참지 않고 검법을 펼치겠다는 행동이었다.

 

“흥!”

 

광한파파는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코웃음을 치며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푸르스름한 기류를 잔뜩 머금은 그녀의 양손은 당장이라도 혁련신의 전신을 산산이 부숴놓을 것만 같았다.

 

혁련신이 막 검을 뽑으려는 순간!

 

“파파, 물러나세요.”

 

북궁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전하러 갔던 광한파파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불안함처럼 광한파파와 혁련신이 살벌한 대치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보고 급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광한파파는 고개를 돌려 북궁연을 바라보고는 이내 알겠다는 듯 몸을 물렸다. 그러면서 혁련신을 싸늘하게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혁련신은 광한파파가 물러나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검병을 쥐었던 손을 내려놓으며 북궁연에게 다가갔다.

 

“북궁 소저.”

 

“왜 자꾸만 절 찾아오시는 겁니까?”

 

북궁연의 말에 혁련신의 얼굴에서 그려지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북궁 소저…….”

 

북궁연의 표정은 차가웠다. 아니, 실제로는 차갑지 않았지만 적어도 혁련신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지고 있었다. 마치 왜 만나기 싫다는데 자꾸만 찾아와 귀찮게 하냐는 듯 노골적인 불쾌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오래 말하고 싶지 않으니 용건만 빨리 말하라는 듯 재촉하는 북궁연의 모습에 혁련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만을 바라봤다.

 

‘어째서… 어째서 내겐 이리 대하는 것입니까?’

 

얼마 전에 보았던 그녀는 지금 혁련신의 눈앞에 서 있는 북궁연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행복한 웃음과 수줍은 미소 대신 감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은 혁련신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머리를 뜨겁게 만들었다.

 

“북궁 공자의 일로 소저께서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아 위로라도 해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상심이 크시겠지만 견뎌내셔야 합니다.”

 

애써 웃으며 말을 하는 혁력신. 그러나 돌아온 북궁연의 대답은 그의 웃음을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걱정해주신 혁련 공자님께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제게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와 혁련 공자님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게 무슨 일이 있을 적마다 혁련 공자님께 위로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혁련 공자님의 말씀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기지만, 제가 부담스러우니 더 이상은 혁련 공자님께 이런 말을 듣지 않았으면 합니다.”

 

냉정한 북궁연의 말에 혁련신은 물론이고, 광한파파마저도 다소 놀랍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사실, 북궁연이 지금까지 혁련신의 구애를 거절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냉정하게 대한 적은 없었다.

 

“북궁 소저, 어찌 그런 말씀을… 저는 소저가 걱정되고, 무엇보다도 저는 소저를…….”

 

“혁련 공자님, 그 이상은 말씀하지 마세요. 누가 들어 오해라도 할까 두렵습니다.”

 

북궁연의 말에 혁련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 있는 그의 모습에 북궁연은 더 이상 들을 이야기도, 할 말도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몸을 돌렸다.

 

그렇게 북궁연이 두 발자국을 내딛었을 때였다.

 

“그를 좋아하는 겁니까?”

 

“네?”

 

북궁연이 고개를 돌리자 혁련신이 미미하게 떨리는 얼굴로 물었다.

 

“그를 좋아하는 겁니까?”

 

북궁연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혁련 공자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를… 왕무적 그를 좋아하는 겁니까?”

 

혁련신의 직접적인 물음에 북궁연은 더욱더 붉어진 얼굴로 다급히 대답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리고 그분은 교주님이신데, 혁련 공자님은 어찌 함부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사실을 누가 알기라도 하면…….”

 

“보았습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지금과는 너무 다른, 행복해 하는 북궁 소저의 얼굴을. 저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환한 웃음을 그의 앞에서는 잠시도 잃지 않으시더군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혁련 공자님!”

 

북궁연은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될까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어느 여인이나 보일 수 있는 행동.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남에게 들킬까 부끄러워하는 모습. 그런 그녀의 모습이 혁련신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너무 아파서…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혁련 공자님의 말씀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군요.”

 

서둘러 몸을 돌려 내원으로 들어가는 북궁연의 모습을 보며 혁련신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견딜 수 없을 때에야 혁련신은 몸을 돌렸다.

 

“왜… 왜 그놈이 나타난 이후부터 내가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 거지? 그놈이… 그놈이 무엇이기에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거냔 말이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는 질투와 증오,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선 짙은 살기가 드리워졌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이대론 포기할 수 없어, 결코…….”

 

혁련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급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第十五章. 반갑지 않은 손님(客)

 

 

 

 

 

“홍노와 청노의 죽음을 이대로 넘어갈 생각들이오?”

 

백옥. 여인의 피부라 하더라도 이보다는 곱지 못할 것이다.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쯤이라 여겨지는 중년 문사는 여인조차도 감탄하고 탐을 낼 만큼 고운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 그 말은 복수라도 하자는 것이오?”

 

중년 문사의 말에 반문을 한 사람은 60대 초반의 노인이었는데, 여느 저잣거리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인상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즉, 특징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인상의 노인이었다.

 

“훌훌, 복수라니.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들의 복수를 해야 한단 말이오?”

 

웃음을 흘리면서 말하는 60대 중반의 노인은 앞니가 빠져 있어 말을 할 적마다 작게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우스꽝스런 모습과는 다르게 두 눈에서는 기이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이대로 잠자코 있기엔 체면이 뭣하긴 하지.”

 

두 눈이 왕방울만 하고 머리통이 웬만한 사람보다 두어 배는 더 큰 50대 중반의 대머리 남자가 은근슬쩍 말하며 다른 이들을 훑어봤다.

 

“맞소. 아무리 우리가 제각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비상시엔 함께 믿고 싸워야 하는 동료들이오. 홍노, 청노와는 뜻이 다르다곤 하지만, 그들도 엄연히 우리의 동료들인데 이대로 그들의 죽음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오.”

 

중년 문사의 말에 앞니 빠진 노인이 우습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다고 교주에게 복수를 하자는 거요?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잊은 거요? 우리는 혈천신교가 멸문의 위기에 빠질 때, 그것을 막고자 존재하는 것인데, 지금 와서 동료가 죽었다고 혈천신교를 이끌고 있는 교주에게 복수를 하자? 훌훌! 내가 보기엔 그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을 것 같소.”

 

평범한 인상의 노인 역시 동조하며 말했다.

 

“암, 웃기는 일이지. 복수할 대상이 없어서 교주에게 복수를 하자니… 그것만큼 웃기는 일은 없는 법이지. 따지고 보면 홍노와 청노는 죽음을 자처한 것인데, 그것을 두고 우리가 복수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체면을 깎아먹는 일이지.”

 

“그렇지만 교주는 천마혈풍장을 익히고 있소! 천마혈풍장이 어떤 무공인지 모르지는 않을 터! 솔직히 지금의 교주가 사 대 교주처럼 미쳐버리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법! 홍노와 청노 역시도 그것을 예방하고자 일을 벌였을지도 모르는 건데, 이대로 우리가 가만히 있는 건 아무래도 아니지.”

 

대머리 남자의 말에 중년 문사가 맞다는 듯 동조했다.

 

“나 역시 솔직히 홍노와 청노의 복수보다는 그 점이 염려되고 있소. 사 대 교주처럼 지금의 교주가 미쳐서 본교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면 그땐 어쩔 셈이오? 그와 같은 비극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그럼, 그럼!”

 

대머리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럴 적마다 그의 커다란 머리가 갑자기 땅으로 툭! 떨어지지 않을까 보는 이가 걱정될 정도였다.

 

“광한파파에게선 어떠한 소식도 없는 거요?”

 

평범한 인상의 노인의 물음에 중년 문사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몇 차례나 전서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이라고는 이미 자신은 천혈원의 일에선 손을 떼기로 했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만 하더이다.”

 

“훌훌, 북궁연이라는 계집이 광한파파의 어디를 그리 자극했기에 그리 나온단 말이오?”

 

중년 문사는 자신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광한파파는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은 천혈원의 일과는 엮이기 싫다는 말을 남기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북궁연의 호위가 되어버렸다.

 

도대체 북궁연이 무슨 방법으로 광한파파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모르지만, 천혈원의 고수들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사실, 천혈원이라는 곳 자체의 특성상 광한파파가 있거나 없거나 큰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일에선 손을 뗀 이들이었고, 혈천신교가 멸문의 위기에 처하지 않는 이상은 결코 움직일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마음까지 얼어붙었다고 여겼던 광한파파가 무슨 이유로 북궁연에게 달라붙어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듣자니 북궁연이라는 계집이 절색이라고 하니… 계집이 좋아졌나 보지.”

 

“…….”

 

“…….”

 

대머리 남자의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바라봤다. 가끔가다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내뱉는 그였지만 지금의 말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머리 남자는 연신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듯 커다란 머리통을 끄덕이고 있었다.

 

“홍노와 청노의 복수는 아니더라도 우선 신임 교주를 만나볼 필요는 있을 것 같소. 그가 어떤 자인지 우리도 미리 알아놔야 할 테니 모두 그를 만나보러 갑시다.”

 

중년 문사의 말에 앞니 빠진 노인이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나는 신임 교주가 어떤 인간이건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 가지 않겠소. 어차피 우리는 우리의 일만 하면 되는 것 아니오? 귀찮게 신임 교주를 만나고 하는 건 사양이오.”

 

이어서 평범한 인상의 노인까지도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밝혔다.

 

“나 역시 신임 교주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없소.”

 

중년 문사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가 혈천신교를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궁금하지도 않소? 만약에 그가 혈천신교를 나락으로 이끈다면 어쩔 것이오? 그때도 지금처럼 뒷전에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할 것이오?”

 

평범한 인상의 노인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니 그럴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건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의 일이고, 지금 우리가 속단할 이유는 없지 않소? 솔직히 지금 그를 만나서 우리 맘에 들지 않는다고 어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가 홀로 홍노와 청노를 죽였다면… 우리가 달려든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대머리 남자가 무슨 말이냐는 듯 큰 소리로 반박했다.

 

“청노와 홍노가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하여도 우리 넷과는 비교할 수 없지! 제아무리 신임 교주가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넷이면 어림도 없을 텐데!”

 

“훌훌! 우리가 넷이라면 그는 셋이오.”

 

앞니 빠진 노인의 말에 대머리 남자가 의문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앞니 빠진 노인이 답답하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차며 대꾸했다.

 

“교주의 말이라면 죽음까지도 불사할 혈천좌사와 혈천우사가 있다는 것을 잊을 것이오? 우리가 혈천신교의 멸문을 막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들은 교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걸 잊었소?”

 

“…….”

 

대머리 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들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나 혈천좌사와 혈천우사를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냉정하게 따지면 혈천좌사와 혈천우사는 천혈원의 개개인과 비교했을 때, 더욱 강한 무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코 그릇된 판단은 아니었다.

 

홍노와 청노를 죽인 신임 교주와 그의 안전을 목숨처럼 지키는 혈천좌․우사라면 아무리 자신들 넷이라고 하더라도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들은 어쩌다 자신들의 신세가 이리도 처량해졌는지 어이가 없어졌다. 천혈원은 혈천신교의 마지막 비장의 한 수였다. 본래부터 열을 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초라했다.

 

물론 홍노와 청노가 살아 있고, 광한파파까지 예전처럼 천혈원을 위해 한목숨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을 때라면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제아무리 신임 교주와 그를 지키는 혈천좌․우사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한들 능히 한 판 멋지게 벌여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승리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쩔 생각이오?”

 

중년 문사의 물음에 대머리 남자가 잠시 두 노인을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나는 신임 교주의 낯짝이라도 한번 봐야겠소.”

 

중년 문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두 분은 그냥 이대로 잠자코 있으시오. 추 형은 나와 함께 신임 교주를 만나보도록 합시다.”

 

“그럽시다.”

 

중년 문사와 대머리 남자가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도 없다는 듯 두 노인은 관심도 주지 않았다.

 

천혈원은 본래 이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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