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룡전설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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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룡전설 122화
신룡전설 5권 - 22화
백서린이 잔뜩 화가 나서 악담을 하는 여인들을 향해 다가가려고 했지만, 왕무적으로 인해 그 뜻을 곱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백 소저, 이 꽃은 마치 백 소저를 닮은 것 같습니다.”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꽃을 한 송이 꺾어 건네주는 왕무적의 행동에 백서린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던 여인들의 입이 쩍! 벌어지며 더 이상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동시에 천룡단 무인들이 서둘러 여인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자 그들은 백서린과 왕무적이 무슨 관계인지에 대해 깊은 의구심만을 품은 채 극화원을 나서야만 했다.
“왕 소협, 여긴 정말로 아름답네요!”
백서린은 여인들이 퍼붓던 악담을 깨끗하게 잊은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도 극화원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존재하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예. 저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입니다.”
왕무적 역시도 극화원의 아름다움에 진정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극화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잠자코 뒤를 따르던 북궁연이 슬쩍 왕무적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백서린은 견제의 눈빛으로 바라봤고, 왕무적은 그러냐는 듯 방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왼손을 내밀었다.
“……?”
북궁연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왕무적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이왕이면 다 같이 손잡고 가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왕무적의 오른손은 백서린에게 붙잡혀 있었다. 북궁연은 잠시 왕무적의 왼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고, 얼굴은 불이 날 정도로 화끈거렸지만 북궁연은 결코 왕무적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더욱더 힘을 꼭 주어 잡았다.
“자! 그럼 북궁 소저가 말씀하신 곳으로 가보도록 하죠.”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왕무적의 말에 북궁연은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서린은 한쪽 볼을 잔뜩 부풀리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 역시 왕무적의 오른손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잡았다.
“지금 이 시간부로 극화원은 잠시 폐쇄를 할 것이니 이만 돌아가시오.”
사색에 잠겨 있던 혁련신은 갑작스럽게 나타나 명령조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천룡단 무인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천룡단이 왔다는 것은 교주가 왔다는 말이 되니 잠자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왕무적이기 때문이다.
“알겠소.”
간단하게 답을 하고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딛던 혁련신의 눈에 각각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오는 일남 이녀가 보였다.
“북궁 소저…….”
왕무적의 왼편에서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거닐고 있는 북궁연의 모습은 혁련신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북궁연을 보아왔지만, 그녀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궁연은 자신의 처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혈천신교를 배반하고 떠나버린 북궁휘 때문임을 혁련신은 잘 알고 있었다.
친오라비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
몇 번이나 북궁연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혈외원을 찾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를 만나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던 혁련신은 자신의 고민과는 다르게 환하게 웃고 있는 북궁연의 모습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무적이 건네는 꽃을 수줍게 받아드는 북궁연의 모습에 혁련신은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짐과 함께 그녀에 대한 뜻 모를 배신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
왕무적과 북궁연, 백서린이 문득 시선을 돌려 혁련신을 바라보자 그는 급히 몸을 돌렸다.
‘왜 내가…….’
왜 자신이 몸을 돌려야 하는지, 어째서 자신이 저들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대로 한참을 서 있던 혁련신은 이윽고 걸음을 내딛어 빠르게 극화원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혁련신아, 혁련신아… 참으로 비참하구나, 비참해…….”
극화원을 나온 혁련신은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적랑-!”
적막한 한밤에 울려 퍼진 외침. 찢어질 듯 울리는 음성은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 정도로 애절했다.
벌컥!
“빈아!”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육소빈의 음성에 학천우는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허겁지겁 그녀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얼굴 가득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육소빈의 모습에 학천우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악몽이라도 꾼 것이냐?”
학천우의 물음에 육소빈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주르륵.
“빈아…….”
더없이 슬픈 얼굴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육소빈. 그녀는 학천우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꿈에서 적랑을 만났어요. 제가 적랑에게 달려갔는데… 적랑이랑 가까워지질 않았어요. 적랑은 저를 보고 웃고 있기만 했어요. 전 어떻게든 적랑에게 가려고 있는 힘껏 달렸지만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었어요. 그리고… 적랑의 곁에 이상한 여자들이 갑자기 나타났어요. 그리고는… 그리고는… 저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등을 돌려 그 여자들과 떠나갔어요. 할아버지, 이게 무슨 꿈이죠? 왜 적랑에게 갈 수 없었던 거죠? 어째서 적랑은 제가 아닌 다른 여자들과 함께 절 떠난 거죠? 왜… 어째서…….”
자신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리는 육소빈의 모습에 학천우는 그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저 꿈일 뿐이다. 꿈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개꿈이다, 개꿈’이라며 안심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자신의 품에서 울던 육소빈이 지처 잠들자 학천우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상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근래 부쩍 수척해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행복한 얼굴로 살아도 부족하기만 한 육소빈이 항상 걱정과 불안감으로 살아가자 학천우는 가슴이 쓰려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어디에 있는 거냐, 이 빌어먹을 놈아!’
환영단은 물론이고, 환영문(幻影門)의 모든 무인들을 이용해서 왕무적의 행방을 찾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육소빈의 방에서 나오자 진중악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벌써 수개월째 이어진 수련을 가장한 구타로 많은 정이 쌓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학천우의 눈빛이 고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기분이 좋지 않으니 당장 꺼지는 것이 네놈 신상에 좋을 거다.”
학천우의 말에 진중악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괜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아니 괜히 앞에 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진중악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학천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놈의 행방은 찾을 수 없더냐?”
학천우의 말에 그의 곁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꽤나 체격이 큰 거한의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지. 도대체 놈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답답할 뿐이었다.
신왕대 무인들과의 생활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말년에 재밌는 일이 생겼다고 좋아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육소빈을 생각하면 꼭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사내의 말에 학천우가 간단해 물었다.
“그놈에 관한 것이더냐?”
“그것은 아닙니다.”
학천우는 그럼 됐다는 듯 걸음을 내딛었다.
“나는 이미 환영문에서 손을 떼었으니, 보고할 일이 있다면 천이 녀석에게 보고해라.”
귀찮다는 듯 말하며 걸음을 내딛는 학천우의 뒷모습을 보며 사내가 말했다.
“그의 행방을 찾던 중 일단의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학천우는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자신에게 말을 하냐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여전히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천이 녀석에게 보고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왕무적과 함께 무림을 떠들썩하게 했던 자인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는 듯 학천우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사내가 바로 입을 열었다.
“세가맹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자인 듯싶습니다.”
“세가맹?”
“예. 제 생각에는 그들이 바로 팔대세가를 사대세가로 만든 장본인 같습니다.”
학천우는 두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이유는?”
“그들 중 백발, 백미의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은연중에 다른 이들을 이끌었으며,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환영 십 호의 말에 의하면, 무공을 추측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태상 문주님도 아시겠지만 환영 십 호는 저를 제외한 환영단 전체에서 가장 무공이 출중한 자입니다. 그런 그가 추측할 수 없을 정도라 했으니… 제 생각일 뿐이지만 최소 무림 삼십 대 고수와 비슷한 경지일 것이라 판단됩니다.”
학천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쉽게 흘려버릴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무림에 백발, 백미인 자가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환영 10호가 무공이 추측 불가능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환영 10호의 무공은 학천우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현재는 절정에 머물러 있지만 이미 극에 이르렀기에 이변이 없는 한 초절정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런 환영 10호의 말이었으니 사내의 생각처럼 환영 10호가 보았다는 백발, 백미의 사내가 적어도 무림 30대 고수 수준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더냐?”
학천우의 물음에 사내가 답했다.
“이렇다 할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이 심상치는 않다 합니다. 조만간 무슨 일을 벌일 것만 같다고 합니다.”
“음…….”
사내의 말에 학천우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차피 무림의 일에 깊게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쟁쟁했던 팔대세가가 사대세가로 줄어들었다는 건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었고, 그 흉수에 대한 것이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역시도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왕무적 그놈을 찾는 것이니 애꿎은 일에 힘을 쏟을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을 굳힌 학천우는 이어서 사내에게 말했다.
“그들의 일에 깊게 관여는 하지 말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라.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그들의 행방을 세가맹에 슬쩍 흘려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내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귀신처럼 사라졌다.
홀로 남은 학천우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어두웠다. 왠지 그 어둠이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왔다.
“너무 조용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