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룡전설 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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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9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룡전설 98화
신룡전설 4권 - 23화
“시간이란 참 빠른 것이오.”
허허로운 음성이 방 안에 쓸쓸히 맴돌았다.
“시간이야말로 하늘마저도 통제할 수 없는 가장 자유로운 놈 아닙니까.”
“하늘의 뜻조차도 마음껏 거스를 수 있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군.”
피처럼 붉은 용포(龍袍)를 입은 50대 후반의 남자.
너무나 평범해서 여느 저잣거리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입은 핏빛 용포는 그가 감히 쉽게 대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의 눈엔 그 어떠한 힘이 느껴지기보다는 공허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남자의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은 70대 초반의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얼굴만 늙었을 뿐, 두 눈만큼은 여느 젊은 청년 못지않은 생기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자리가 내겐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호통을 치듯 말하는 노인을 남자는 희미한 웃음을 띠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하늘이 정해준 자리가 있는 법이오. 한데, 나는 아무래도 그 하늘의 뜻을 거스른 모양이오. 이 자리는… 처음부터 내 자리가 아니었소.”
“교주님!”
교주(敎主)!
천하 무림의 모든 무인들이 두려워하는 혈천신교의 지고한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이 바로 핏빛 용포를 걸치고 있는 남자였다.
“지금이라도 이 자리를 진정한 주인에게 주는 것이 옳은 것 같소.”
“교주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천하에 있어서 그 누가 교주님을 대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안 될 말씀이십니다! 아직까지 본교는 교주님이 지키셔야 합니다!”
노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교주는 이미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굳혔는지 조금도 뜻을 꺾지 않았다.
“한 달이면 충분할 것이오. 그리 알고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털썩!
“교, 교주님!!”
노인은 교주의 발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런 모습을 보고 교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피곤하니 대장로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교주님!! 명을 거둬주십시오!!”
명을 거두기 전까지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강경한 태도로 소리치는 노인, 대장로 용당운의 모습에 교주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대장로를 배웅하도록 하게.”
“존명.”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음성.
그리고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대장로의 곁에서 2명의 사내가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제 고작 40대나 되었을까?
한참이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대장로의 어깨를 잡은 두 사내는 마치 하나처럼 말했다.
“대장로는 물러나라.”
“교주님!!”
여전히 물러날 태세를 보이지 않는 대장로의 모습에 두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일으켰다.
“놓으시오!!”
말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쉽게 몸이 일으켜진 대장로. 붉어진 얼굴과 그의 몸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강맹한 기세는 당장이라도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감히!”
우측의 사내가 눈을 번뜩이며 대장로의 어깨를 힘주어 잡자 미약한 신음과 함께 폭퐁과도 같은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물러나라!”
좌측의 사내가 말과 동시에 잡은 대장로의 어깨를 앞으로 밀어내자 어떠한 저항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대장로가 방 밖으로 밀려났다.
“으으음……!”
고통에 찬 신음성이 대장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움직였던가?
대장로의 좌우측에 서 있던 사내들은 어느새 방 앞을 가로막았다. 두 사내는 대장로를 한차례 바라보고는 똑같이 눈을 감아버렸다.
‘이들의 무공은 도대체 그 한계가 어디인가?’
대장로는 두려운 눈으로 두 사내를 바라봤다.
혈천좌사(血天左使), 혈천우사(血天右使)!
그 적수를 찾을 수 없는 혈천신교 최강의 무인들!
혈천신교 역사상 그 어떤 무인도 이들 두 사람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 대단했던 혈천신마 오자량 역시도 두 사람을 상대로 백여 초를 버티지 못했을 정도로 혈천좌․우사의 무공은 절대적이었다.
이들 혈천좌․우사는 오로지 교주의 명만을 목숨처럼 받들며, 행한다. 교주의 명이라면 혈천신교의 무인들조차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은 맹목적으로 살아간다.
교주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바뀐 교주의 명을 따르며, 정확하게 백 년에 한 번씩 혈천좌․우사는 자신들의 자리를 후계자에게 넘기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혈천신교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혈천좌․우사. 어쩌면 이들이 있었기에 혈천신교 내에서 교주의 위치가 절대적이라 불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인가?’
대장로는 혈천좌․우사를 바라보고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법.”
대장로는 그늘진 얼굴로 탄식했다.
이미 교주의 입 밖으로 나온 이상, 그 누구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한 달 뒤에 벌어질 혈천대전!
대장로는 급한 발걸음으로 석당진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第十四章. 혈천대전을 열흘 앞두고…….
혈천대전이 벌어지는 날까지는 앞으로 열흘.
약 26년 만에 벌어지는 혈천대전을 위해 혈천신교 내의 모든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혈외원의 경비나 잡일을 맡은 천외당 무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바쁜 이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오늘 안으로 대회장을 만들지 못하면 다들 죽은 목숨이라는 것만 알아들 둬!”
거대한 나무와 돌 등을 운반하는 무인들을 향해서 40대 초반의 중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혈천대전을 위해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이 바로 새로운 교주의 탄생을 알리게 될 혈천대(血天臺)이다. 간단하게는 비무대라고 할 수 있다.
혈천대를 비롯해서 혈천신교의 교주와 장로들이 비무를 구경할 수 있는 특단석(特段席), 수많은 인사(人士)들이 비무를 구경할 수 있는 상단석(上段席)과 그 외의 혈천신교 무인들이 구경할 수 있는 하단석(下段席).
이 모든 것들을 만드는 사람은 당연히 책임자인 도편수와 그 휘하의 목공(木工)과 석공(石工)들이겠지만, 그들을 도와 기타 잡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천외당 무인들이었다.
“젠장! 더러워서, 원!”
큼지막한 바위를 나르며 한 사내가 욕설을 뱉어냈다.
흙먼지가 잔뜩 달라붙은 지저분한 푸른 무복의 천외당 무인인 정대문은 혈천대전이 시작된다는 공식적인 이야기와 함께 그날부터 시작된 노동에 죽을 지경이었다.
벌써 20일째 이어지고 있었다. 대충 일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도 또 어떤 잡일을 해야 할지 모르기에 정대문은 물론이고, 천외당 무인이라면 어느 누구 하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오월상!!”
“예, 예!”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오월상, 아니 왕무적은 급히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천외당 무인들의 일을 감시, 감독하는 혈천암영대(血天暗影隊)의 무인이었다.
혈천신교 11장로인 모연화의 직속 무력 단체인 혈천암영대. 적어도 천외당 무인들에게 있어서는 감히 대적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이들이었다.
왕무적을 부르는 혈천암영대 무인을 모든 천외당 무인들이 궁금한 얼굴로 바라봤다.
“저놈은 또 무슨 일로 부르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저놈은 우리보다 팔자가 좋다니까!”
“제기랄!”
“젠장! 저놈이 나보다 뭐 대단한 게 있다고 저런 특별대우를 받는 건지! 빌어먹을!”
천외당 무인들은 은연중에 왕무적을 시기하고 있었다. 같은 천외당 무인으로서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는 그는 몇 번이나 궂은일을 하다 말고 홀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처음은 혈외원 내원에서 불렀었고, 두 번째는 광한파파가 직접 그를 찾아왔으며, 세 번째는 혁련가에서 사람이 와서 그를 한차례 데려간 적 있었다. 그 다음은 혈천신교 4장로인 풍소동의 직속 무력 단체인 혈천도수대(血天刀手隊)에서 그를 불렀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그를 부르거나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로 인해 매번 왕무적은 짧게는 하루, 길게는 3일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어떠한 이야기를 듣고 왕무적은 어디론가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또 누가 부르는 거야?”
천외당 무인들은 비록 그것이 왕무적의 뜻이 아닐지라도 매번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를 부러워하는 한편,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모두 죽고 싶은 거냐?”
감시, 감독을 하는 또 다른 혈천암영대 무인의 외침에, 잠시 일을 멈추고 있던 천외당 무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각자의 일을 이어나갔다.
[도대체 왕 소협만 왜 매번 저렇게 눈에 띄는 걸까요?]
백서린의 물음에 진평남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번에 왕무적을 부른 사람은 왕정이었다.
“오랜만이오.”
혈천신교로 들어오고 나서 두 사람은 첫 대면이었다. 지금까지 두 번 정도 왕정의 말을 은밀히 전한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혈천신교 내에서 그와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혈천도수대의 손에 이끌려 풍소동의 앞에서 꽤나 곤혹을 치렀던 왕무적이다. 고작 천외당의 무인 주제에 북궁연과 광한파파는 물론이고, 혁련가에게까지 관심을 받았으니 풍소동으로서는 당연히 왕무적을 수상스럽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장추진과의 일이 큰 몫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천외당 무인인 왕무적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과분한 관심이었다.
풍소동의 의심을 받고 3일이 지나서야 왕무적은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왕정이 자신을 대놓고 찾아왔으니, 또다시 그런 귀찮은 일을 당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런 왕무적의 심정을 알기 때문인지 왕정은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안심시켰다.
“더 이상은 당신을 귀찮게 할 일이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앞으로 열흘 후면 혈천대전이 벌어질 것이오. 모든 이목은 혈천대전에 쏠릴 테고, 이미 한차례 의심을 했다가 풀려났으니 더 이상은 당신을 의심할 사람이 없을 거란 말이오.”
왕정의 말에 왕무적은 그렇다면 다행이라는 듯 찌푸렸던 얼굴 표정을 살짝 풀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으시오.”
중요한 말이라도 하려는 듯 왕정은 다소 무거워진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혈천대전이 벌어지면 강경파 쪽에서는 어떻게든 풍도백을 교주 자리에 앉히려고 할 것이오.”
“풍도백?”
왕무적이 되묻자 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 가문인 풍가(風家)의 후계자로, 앞으로 보름 후에 삼 년 폐관(廢關) 수련을 깨고 나올 것이오.”
왕정의 말에 왕무적이 물었다.
“그렇다면 장추진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어차피 장추진은 풍도백을 위한 들러리일 뿐이오. 실력뿐만이 아니라 교주로서의 모든 것들이 풍도백과는 비교도 되지 않소.”
혈외원에서의 이야기만 들어봐도 장추진은 이미 교주로서 그 자질이 한참이나 부족했다. 물론 실력만 있다면 그가 아무리 심성이 나쁘더라도 상관없겠지만, 왕무적이 느끼기에 적어도 그는 혁련신보다 약간 뒤처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장추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과 이미 그를 교주로 만들기 위해서 강경파가 뜻을 모았다는 사실이 왕무적으로서는 약간의 충격이었다.
“장추진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오?”
왕무적이 본 장추진은 결코 그걸 납들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아주 잠깐의 만남이었고 서로 대화를 나누어본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이는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로 인해서 현재 장추진이 크게 불만을 품고 있소. 그는 어떻게든 풍도백을 제치고 교주가 되려고 발버둥을 칠 것이오. 하나, 어림도 없을 테지. 문제는… 그런 장추진과 그보다 더욱 뛰어난 풍도백을 어떻게 물리치고 혁련 공자가 교주가 되냐는 것이오.”
이미 혁련신이 온건파의 대표라는 것쯤은 알고 있기에 왕무적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왕정은 잠시 주변을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서줘야겠소.”
“내가 어떻게 나선단 말이오?”
왕무적의 물음에 왕정은 혹시나 싶어서 전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혁련 공자가 교주가 되기 위해서는 장추진과 풍도백을 모두 물리쳐야 하오. 장추진은 솔직히 혁력 공자의 힘으로도 크게 어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풍도백은 다르오. 해서 당신이 혈천대전에 참가하여 장추진과 풍도백을 모두 물리치도록 하시오.]
“…….”
왕무적은 아무런 말없이 왕정을 바라봤다.
[강경파 쪽에서는 풍도백보다도 장추진을 먼저 올려보낼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때 당신이 나서서 장추진을 제압하고, 이후에 풍도백을 물리친 다음에 혁련 공자에게 패배를 하도록 하시오.]
[날 천외당 무인으로 행세하게끔 한 이유가 그것이오?]
[그렇소.]
[내가 따르지 않겠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왕무적의 물음에 왕정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물었다.
[교주가 되고 싶소?]
[…….]
[허황된 꿈은 꾸지 마시오. 혈천대전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교주가 될 수 없으니.]
왕정의 말에 왕무적은 어째서 그러냐는 듯 그를 바라봤다.
[혈천신교의 교주가 되기 위해서는 혈천대전의 참가자가 반드시 혈천신교의 교인이어야 하오. 하지만 당신은 아니지 않소? 무엇보다도… 당신은 이미 우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오.]
확신에 가득 찬 왕정의 말에 왕무적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곧바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당신이 동료들을 생각한다면 결코 우리의 뜻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오.]
[……!]
왕무적의 머릿속에 백서린과 진평남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당신이 우리의 뜻대로만 잘 따라준다면 당신의 동료들은 물론이고, 당신이 원하는 물건들을 손에 넣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말을 마친 왕정은 품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왕무적에게 건넸다.
[만박귀자 허 어르신께서 보내는 서찰이오.]
서찰을 건네받는 왕무적의 모습에 왕정은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명심하시오, 혁련 공자에게는 반드시 패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멀어지는 왕정의 모습을 보며 왕무적은 서둘러 서찰을 품에 넣고는 천외당 무인들이 일을 하고 있는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돌아간 작업장에서 백서린과 진평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