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지존기 121화
무료소설 대륙지존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0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대륙지존기 121화
제4장 동행 (4)
덩그러니 남겨진 에이프런은 무진의 행동에 기가 막혔다.
‘나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말을 하는데 그냥 퍼자! 지금 잠이 오냐!’
밤새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야 정상적인 사내다.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자 버리는 무진의 행동은 사내로서 해서는 안 되는 극악한 만행이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집 안에 침대는 하나밖에 없다. 그렇다는 것은 에이프런은 바닥에서 자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진짜 자요?”
“안 잡니다.”
에이프런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앞에서 두고 아무렇지 않게 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진짜로 자는 줄 알고 당황했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흥, 당연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누워 있어요?”
“말하기 귀찮아서 그렇습니다.”
‘뭐?’
무진의 직선적이고 거침없는 솔직한 대답에 에이프런은 9서클 빙계마법에 걸린 존재가 되어 버렸다. 황당함을 넘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식의 대접은 그녀 난생처음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점프해서 누워 있는 무진의 가슴 정중앙을 팔꿈치로 찍어 버리고 싶었다.
‘젠장, 얻어먹은 게 있어서 양심상 그럴 수도 없고!’
아무리 뻔뻔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녀도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은 있었다. 결국 밤을 새고 아침이 밝아 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다고 숙녀를 내버려두고 먼저 자요!”
눈을 감고 있던 무진은 순간 허탈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요즘 숙녀는 험준한 산길을 홀로 여행하고, 라피도를 겁집으로 후려 패고, 낯선 사내의 집에 머뭇거리지도 않고 들어가는지 한번 의심해 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대륙의 보편적인 숙녀의 기준이라면 재정비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말을 걸어도 무진이 반응이 없자 그녀도 제풀에 지쳤다. 산길을 여행하느라 피곤했고, 식사를 마치자 나른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졌다. 방 안에서 잘 수 있는 곳에 누워서 수면을 취했다.
푸우우우! 후우웁! 푸우우우! 후우웁!
눕자마자 잠을 자다니 생각보다 더 무던한 성격을 지녔다. 에이프런의 호흡소리가 일정해지자 무진의 눈동자가 잠시 떠졌다 감겼다.
“겁이 없군.”
너무 쉽게 경계를 푸는 그녀의 행동이 어설프게 느껴졌다. 무진이 애초부터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그녀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진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때론 여인의 직감이 이성적 판단을 능가할 때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에이프런은 무진을 보자마자 그것을 느꼈을지 모른다.
산의 능선과 능선이 V자로 이어지는 곳에서부터 거대한 빛의 구슬이 솟아오른다. 구슬은 지극히 밝은 빛을 담고 있으며 어둠을 몰아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온 세상의 어둠을 저 멀리 능선 밖으로 몰아낼 때, 산의 어둠도 사라졌다. 밤새 세차게 내린 빗방울에 반사되는 아침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맹수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던 어두웠던 산이 밝아지자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커튼으로 가려 놓았던 창문 사이로 비추어진 햇살에 무진이 일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난 무진은 집의 가장자리 끝에서 자고 있는 에이프런을 보았다. 분명히 왼쪽 끝에 기대서 자고 있었는데 오른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잠버릇이 고약하군.”
무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대(大)자로 누워서 당당하게 누워 자는 에이프런의 모습은 대범 그 자체였다. 나 잡아먹으라고 떠드는 것보다 한 술 더 떴다.
끄응!
무진은 창문을 가린 커튼을 쳤다. 환한 빛이 그녀의 눈 부위를 간질거리자 고개를 젖히며 빛을 차단했다.
낯선 집에서 자는 사람들 대부분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거나, 미세한 소리에 반응해서 깨기 마련이다. 반면에 에이프런은 대범했다. 사방으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귀엽군.”
무진은 그 모습을 보자 주하영이 다시 한 번 생각났다. 그녀도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몸부림을 치곤 했었다. 부스스하게 일어났던 주하영은 무진을 보며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건 다했다.
“으음!”
에이프런이 그제야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어제 너무 많이 먹었는지 목이 탔다. 주섬주섬 일어나서 주변에 있던 물병을 찾아 마셨다.
꿀꺽! 꿀꺽!
목선이 올라갔다 내려갔다는 반복하더니 ‘꺼어억’ 트림을 한 번 하고 정신을 차렸다. 온전히 방 안을 보게 된 에이프런은 빤히 바라보고 있는 무진을 볼 수 있었다.
‘잠깐 내가 뭐 했지?’
사내가 보는 앞에서 굉장히 민망한 짓을 하다가 들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기에 손을 댔는데.
“까아아악!”
에이프런 놀라서 소리쳤다. 밤에 기름진 음식을 대량으로 섭취하고 곧바로 잔 에이프런이었다. 얼굴이 부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 즉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오러심법을 운용했다. 오러심법의 좋은 점은 탁기를 배출하고, 군살을 빼준다는 것에 있었다. 미용을 위해서는 충분히 오러심법을 운용해야 했다. 그녀가 오러를 수련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미용관리에 있었다.
후우우우! 후우우읍!
금세 에이프런은 오러심법에 심취했다. 심법을 운용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가 건드리면 무척이나 위험하다. 어제 처음 본 무진 앞에서 오러심법을 운용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무진조차 당혹스럽게 만드는 그녀의 행동이었다.
‘종잡을 수가 없군.’
오러심법을 충분하게 회전시켜준 에이프런은 얼굴을 만져 보았다.
“겨우 원상 복귀했네.”
여인의 입장에서 얼굴은 생명과 같다. 미세한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조국도 팔아버릴 수 있다는 속설도 있었다. 사내들이 설마라고 하는 일도 여인에게는 설마가 아니었다.
무진은 에이프런이 운기조식하는 동안 식탁에 앉아서 차분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에이프런은 또다시 식욕이 왕성하게 솟구치는지, 입맛을 다셨다. 어제 먹은 요리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매너 없게 혼자 먹는 거예요?”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사람보다는 낫다고 보는데.”
“에이, 사내가 쪼잔하게 정말 그럴 거예요?”
“쓸데없는 말보다는 식사나 하지.”
“그러는 게 좋겠네요.”
무진의 말투가 어제와 달라졌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순간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에이프런이었다. 지금 당장은 요리를 시식하는 게 먼저였다. 그녀는 예의 차리지 않고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를 다 하고 난 후 무진은 옷을 추스르고 집을 나섰다. 그녀도 없어진 것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무진의 뒤를 따랐다.
집에서 나온 무진은 마력을 발동했다.
“변환.”
퍼어어엉!
화려한 소리와 연기가 퍼지고 집이 구슬로 변했다. 사실 연기와 소리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공간으로 집을 집어넣는데 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날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음향효과를 만들어 놓은 지그프리트였다. 설정상 소리와 연기가 나야 신비하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무진이 집을 구슬로 변환시키고, 아공간 안으로 집어넣는 장면을 본 에이프런은 제법 놀란 눈치였다. 집을 구슬 안에 넣어 휴대할 수 있다면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쯤 가지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이거 어떻게 만든 거예요? 나도 하나 만들어 주면 안 돼요!”
“나도 모른다.”
“정말 몰라요? 설마 주기 싫어서 그런 말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안다고 해도 너에게 만들어 줄 이유는 없다.”
“꼭 말을 해도.”
“귀찮게 말 시키지 마라.”
무진은 쓸데없는 말 대신 원래 가려던 길로 천천히 걸었다. 에이프런은 같이 가자는 말도 없이 먼저 가는 무진의 행동을 보고 열불이 터졌다.
‘이거 설마 계획된 작전 아니지.’
무관심을 동원하여 관심을 끈다. 특이함에 여자들은 한 번쯤 흥미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것을 계획적으로 이용하는 전문적인 선수가 무진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카데미 시절 플라워스네이크(꽃뱀)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그녀였다. 사내들의 성향, 행동을 대부분 파악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그녀이기에 의심이 들었다.
‘냄새가 나!’
확실히 무진은 그녀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곁에서 무진의 행동거지를 간파하고 싶다는 플라워스테이크로서의 무궁한 호승심을 자극했다.
‘잠깐! 아침부터 지금까지 저 자식이 반말했잖아!’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하대를 에이프런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귀족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반말할 수 존재는 같은 귀족뿐이다. 그녀가 비록 평민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서로를 존중해줄 필요는 있다고 보았다. 어느 면에서 그녀는 상당히 공평무사했다.
에이프런이 고민을 하든 말든 무진은 멀어져만 갔다.
“기…다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녀도 말을 놓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도 산을 벗어나야 한다. 방향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 데로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은 무진을 따라 사람이 사는 마을로 가야 한다.
* * *
“빌어먹을!”
어두운 밤을 지나 아침이 될 때까지 추적하고 있던 그들은 짜증이 치밀었다. 원하던 목표물이 정해진 길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정대로라면 반나절 안에 도착을 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기는커녕 올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아무래도 그년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닌지.”
“뭐야?”
이번 암살행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일의 중요성이 크기에 비밀유지가 가장 최우선이었다. 길드 내에서도 알고 있는 자가 적고, 이번에 차출된 자신들은 특급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목표물이 제법 실력이 출중하다고는 하나 미리 알고 대비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알고 있었다면 신중히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왕국으로 오는 길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웬만하면 왕국 밖에서 처리하려고 했건만 어쩔 수 없지. 2차 목적지로 간다.”
“예.”
사사사사삭!
그들은 무척이나 빨랐다. 다수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나지 않는 발걸음을 보였다.
* * *
에이프런은 무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무진은 에이프런이 따라오는 것을 모른 척 봐주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한마디도 없이 걷고 있던 에이프런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먼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무진이 말을 걸지 않자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급한 것은 에이프런이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그걸 알아서 뭐 하게.”
“좀 물어 보면 성의 있게 좀 대답해라.”
“소니아왕국.”
“진짜?”
“믿지도 않을 거 왜 묻지.”
“그게 아니라 나도 소니아왕국으로 가거든.”
“그런가.”
에이프런으로서는 다행이었다. 길을 헤매지 않고 무진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무진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자 에이프런은 승부욕이 발동되었다.
어떤 사내든 10초 내외로 굴복시킬 수 있었던 그녀였다. 아직 자신의 매력을 보지 못해서 무진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어, 같이 가는 김에 심심하지 않겠어!’
무진을 굴복시키고 난 후 시원하게 차 버리는 것이다. 애걸복걸하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무진을 상상하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호호호호!”
한동안 웃던 그녀는 시선을 느꼈다.
‘응?’
에이프런의 눈동자에 무진이 보였다. 혼자서 실실 쪼개고 있는 에이프런을 본 무진이 비웃는 듯한 썩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웃고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눈동자에 한심하다는 빛이 역력했다.
‘저게 날 비웃어!’
에이프런은 실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창피함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붉어진 얼굴을 정리하고 난 후 에이프런은 승부욕을 불태웠다.
‘좋아! 이렇게 된 김에 반드시 자빠뜨려 주마!’
무진은 에이프런의 다짐과는 상관없이 홀로 걸었다.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그것은 신경 쓸 이유가 되지 못한다.
‘내가 많이 물러졌군.’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도 많은 사람을 죽였던 무진이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귀찮게 하는 에이프런을 죽이지 않고 데리고 간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무진의 침묵으로 인해 에이프런이 여정에 끼게 되었다. 침묵은 긍정이라는 당연한 논리를 앞세운 에이프런이었다.
에이프런은 무진의 옆에 자리하면서 은밀하게 유혹의 1단계를 전개했다.
1단계-시선집중.
사내의 시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 사내는 한순간의 욕정에 휩싸여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순간까지 조금씩 사내의 시선을 끄는 행동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마법사지?”
“그렇다.”
“아공간을 여는 것을 봐서는 6서클은 되겠네! 대단하다! 젊은 나이에 6서클은 굉장한 건데.”
“잘못 알고 있군.”
“뭐?”
“난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나이가 많다.”
관심사를 이끌어 내고, 사내의 장점을 칭찬해주는 것이 효과적인 유혹방법이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대화를 잘라내는 무진의 솜씨가 상상을 불허했다. 일단 막히고 나자 어색함 그 자체였다.
“동안이구나!”
“그런가.”
무진의 시큰둥함에 에이프런은 화가 치밀었다.
‘칭찬하면 반응 좀 해라!’
무진의 나이는 일흔이 넘어간다. 일흔의 나이에 동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감흥이 있는가! 다 늙어서 그런 소리 들으면 좋아할 노인네들 많지 않을 것이다.
에이프런은 2단계 관심유발, 3단계 스킨십을 적절하게 사용해 봤지만 무진은 여전했다. 반응은커녕 달라붙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이거 설마 게…이는 아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압도적인 매력과, 천사 같은 아름다움에 넘어오지 않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 전에 무진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다.”
“뭐?”
“불쾌하군.”
“왜…갑자기?”
‘설마 속마음을 읽는 건가!’
사람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마법을 사용하여 상대의 기억을 읽는 리드마인드마법이 있기는 하지만 오러를 수행한 자들의 기억을 억지로 읽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더군다나 에이프런은 보통의 오러수행자가 아니다. 이미 일정 수준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아니겠지.’
9서클 대마법사라면 모를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인간 중에 9서클 마법사는 대륙십강에 속하는 몇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대륙십강은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